일망타진
유왕이 선비들을 움직여 연명으로 호소문을 냈다. 이대로 분열된 채로 백성들이 겪어야 할 고난이 얼마나 큰지 절절하게 호소하며 통일을 촉구했다.
그에 발맞춰 군왕이 군벌들에게 서신을 돌려 연합을 제안했다. 힘을 합쳐 중원에 야욕을 드러낸 마교를 처리하고, 그 과정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자는 내용이다.
물론, 남은 군벌도 왕이나 공 혹은 후의 자리와 일정한 자치권을 인정한다고 서신으로 명백히 밝혔다.
군벌 중 절반 이상이 마중구문의 지시를 받기에 연합은 아주 쉽게 성사됐다. 거기에 정의연이 자청하여 각 군벌 수장의 호위를 담당하니 구색도 좋고 모든 게 좋았다.
군비는 수많은 상인이 자발적으로 주머니를 헤쳤고 보급은 중원 각지의 표국들이 책임졌다. 야장들은 외상으로 잘 만든 무기와 갑옷을 각 군벌에 보급했고 마상들이 상행을 멈추고 자신이 보유한 말을 모두 군대에 대여했다.
한마디로 중원 전체가 마교를 징치하기 위해 힘을 합친 것이다.
그에 맞서 마교 역시 교도를 소집해 급히 군대를 만들었으나, 수적으로 형편없이 밀렸다. 백만 군세를 만들 수 있는 마교라고 하지만, 무기나 갑옷의 보급 및 군량 확보 등 문제 때문에 겨우 이십만을 모았다.
그에 반해 일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원의 연합군은 보급 부대를 빼고도 이백만 군세를 모았고, 그중 최소 삼십만은 정예다.
이십만과 이백만 군세는 세세겁화봉과 가까운 곳에서 만났다.
중원의 군대는 마교를 격파한 후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마교에 용혈이 있고 옥새가 있다는 장점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유일하게 남은 우위는 상대의 보급선이 길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마교에 심은 간세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백 명 이상 규모의 움직임이 모조리 파악 당한 바람에 보급선을 끊는 일도 어려웠다.
연합군의 진영에선 이미 승리를 의심치 않고, 군벌들은 전투에 대한 대비보다 서로 교섭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황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한 명이라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쓰고, 황제가 될 가망이 아예 없는 자들은 조건을 가늠하며 어디에 줄을 댈지 신중히 고민했다.
이에 연합군의 진영은 군대라기보단 거대한 정치판이 되었고, 일부 부대 사이에서 힘겨루기가 몰래 진행됐다.
이는 원정하는 군대에서 가장 기탄해 마땅한 일이지만, 전력의 현저한 차이 때문에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전투는 예기치 못한 시점에 벌어졌다.
연합군은 자신이 황제로 미는 군벌에게 군공을 몰아줘야 하기에 연맹 상황에 따라 군의 배치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협의가 진행되지 않으면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마교가 먼저 싸움을 걸었기에 전투가 발생했다. 연합군은 원래 마교의 도발을 무시하려 했으나, 고작 이십만 군세를 상대로 며칠이나 전투를 미루는 바람에 연합군의 인심이 황황했다.
마교 첩자의 소행인지 자연적으로 발생한 소문인지 모르지만, 연합군이 마교가 두려워 감히 전투를 벌이지 못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었다.
연합군 수뇌는 급히 진을 가다듬어 마교와 맞서려 했으나, 일부 군벌은 자리 배치에 불복하며 자신이 지지하는 군벌 쪽으로 군대를 옮겼다.
차라리 정예 삼십만만 동원해 싸웠으면 훨씬 깔끔했겠지만, 그건 새 황제가 옹립된 후 어떻게든 높은 작위를 받으려는 각 군벌의 반발로 이백만 군세가 모두 전투에 투입됐다.
장안에 열리던 오일장보다 훨씬 난잡한 상황이지만, 연합군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난장판인 모습이더라도 기본적으로 머릿수 차이가 너무 크고 무장 수준도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다.
그런데 전투의 진행이 연합군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후방에 적군이 출현했습니다."
"규모는?"
"헤아리기 힘듭니다. 최소 십만으로 추정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합군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후군에서 일부 차출하여 막는 데 치중하라 전해라."
황제가 되거나 황제를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 힘 있는 군벌은 모두 앞으로 갔고, 힘없는 자들만 후군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군세만 해도 삼십만이 되어 앞에 있는 마교의 이십만 군세를 쓸어버릴 때까지 막고만 있는 데 문제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것은 형편없는 오산이었다.
"급보입니다. 후군이 무너졌습니다."
그제야 연합군도 뭔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적의 깃발은 확인했는가?"
"촉이라는 글자를 새겼는데,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군벌이 하도 난립하여 깃발만 해도 백 개는 되었다. 같은 글자를 모양이 조금 다르게 새기는 군벌들도 있어 깃발만 보고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중군에서 오만, 좌익과 우익에서 각각 오만씩 차출하여 뒤로 보낸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누구나 정면을 막아선 마교 군대를 물리치고 세세겁화봉의 교주전에 깃발을 꽂을 생각뿐이었다. 어느 부대에서 얼마를 차출할지 논의가 길어지며 군의 사기가 형편없이 떨어졌다.
"후방 부대에 새로운 깃발이 올라왔습니다."
"무슨 깃발?"
"황실을 상장하는 육조황룡六爪黃龍을 새긴 깃발입니다. 진짜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진짜인지가 중요하지 않잖아! 당장 중군과 좌우군을 모조리 뒤로 돌려라. 명을 어기는 부대가 있으면 그 수장의 목을 즉참한다."
생사가 갈리는 전장이다. 싸우다 보면 저승사자들이 보이기도 하는 이곳에선 이성보다 감성이 통한다. 장수의 아무 의미 없는 호통으로 기세가 올라 지던 싸움을 뒤집을 수도 있고, 고작 상대의 천 명도 안 되는 지원군에 기겁하여 다 이긴 전투를 포기하고 물러나는 일도 있다.
군왕의 추상같은 호령에 차출이 빠르게 이뤄졌다. 그러나 결국엔 늦었다.
촉씨 가문에서 육성한 오만 정예가 앞장을 서고, 촉과 대리의 땅에서 긁어모은 온갖 부대가 뒤를 따랐다.
이미 후군의 삼십만 군대를 바싹 마른 대나무 쪼개는 기세로 무너뜨렸기에 그 기세가 남달랐다.
반면, 연합군은 세 곳에서 급히 차출하며 명령 체계도 제대로 안 되었고, 부대 배치도 미리 협의가 이뤄진 게 하나도 없어서 군대라기보단 그냥 사람을 모아놓은 수준이었다.
"황제 폐하의 친정이다."
이때다 싶은 첩자들이 활동했다. 이 첩자들은 추영이 황실의 이름으로 매수한 군벌이 있고, 오지열이 정의연에서 포섭한 무인이 있고, 단순하게 돈에 매수당한 자도 있었다.
"폐하께서 반란군을 징치하러 직접 왕림하셨다."
"도망쳐라. 도망쳐야 산다."
"투항하자. 투항해서 광명을 찾자."
맞서는 자, 뒤로 물러나는 자, 옆으로 도망치는 자, 멍하니 가만있는 자. 후군보다 나은 병사들이지만, 오히려 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뒤에서 촉의 이십오만 군세가 파죽지세로 돌파하는 데 반해, 먼저 도발한 마교의 이십만 군대는 오히려 수비에 치중했다.
"군을 물려라."
이대로는 중군의 지휘부가 몰살할 판이어서 군왕은 어쩔 수 없이 마교와 싸우는 백만이 넘은 군대를 뒤로 물렸다.
"끝장이다. 마교의 기습에 지휘부가 몰살했다."
"도망쳐라. 북쪽으로 가면 살길이 있다."
"북쪽에 보급 부대가 있다. 북쪽으로 도망쳐라."
첩자들이 다시 활약했다. 잘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진 후퇴 명령에 혼란하던 병사들이 첩자들의 외침에 깜빡 속았다.
처음엔 수백 명이었는데, 차 한 잔 끓일 시간도 안 되어 도망가는 병사 숫자가 수천으로 늘었다. 수천은 곧 수만이 되었고, 결국엔 이십만 명이나 도주했다.
"놈들이 물러났습니다."
마교는 물론, 당장 중군을 덮칠 것 같던 후방의 부대도 빠르게 물러났다.
"기병도 아닌데 기동력이 어찌 그리 뛰어나단 말인가."
군벌 하나가 한탄했다. 후방에 나타난 부대는 평소 험한 산을 자주 타다 보니 중원의 부대보다 기동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촉의 군대를 처음 접한 중원의 군벌들은 너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전황을 보고하라."
군왕이 참모에게 지시했다.
"전방에서 삼백오십칠 명 사망, 이십만삼천칠백 명 실종. 후방에서 오천칠백삼십 명 사망, 십일만 명 정도가 실종했습니다. 그리고 첩자 칠십여 명을 색출했습니다."
말이 실종이지 탈영이 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사기가 바닥을 치는 지금 굳이 탈영 혹은 도주라는 말로 기분을 잡치게 할 정도로 참모는 멍청하지 않았다.
"첩자들은 모조리 오체분시한 후 높은 곳에 걸어라."
군왕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제국이 건재할 때도 군에 황제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가문이다. 사실 마중구문의 지시로 연합군을 조성하며 황제의 꿈을 살짝 품었었는데, 이대로는 마교를 멸하더라도 군왕에게 황제 자리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급보입니다."
그러나 첩자들을 오체분시하라는 명령이 전달되기도 전에 전령이 뛰어 들어왔다. 등에 노란 깃발을 세 개나 멘 전령은 숨을 고르느라 미처 입을 열지 못했다.
"이걸 마시거라."
군왕이 술을 담은 가죽 부대를 던져줬다. 전령은 감사하다는 치사도 없이 급히 아귀를 묶은 줄을 풀고 술을 입에 쏟았다.
"보급 부대가 전멸했습니다."
"전멸?"
비록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한 부대라고 하지만, 건장한 장정이 오십만 명이나 된다. 더구나 이만이나 되는 기병이 있어 어느 부대가 공격을 받든 늦지 않게 지원하도록 철저히 구성을 짰다.
"포로가 되었는지 도주했는지 모르지만, 현재 보급 부대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교 소행인가?"
"확실치 않지만, 표항군의 깃발을 본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육조황룡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촉의 군대가 이백만 명이나 되는 군세를 보고도 신나게 뛰어든 이유다. 이미 오십만이나 되는 보급 부대를 표항군과 함께 공격해 별 손실 없이 이겼고,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전리품을 얻었다.
중원과 비교해 야만적인 삶을 사는 촉과 대리의 대부분 부족 전사들은, 오십만의 네 배인 연합군을 이기면 훨씬 많은 식량과 가죽 그리고 병장기를 얻는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겁 없이 덮친 것이다.
"큰일입니다. 보급 부대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 확산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규율을 책임진 군왕의 심복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보고했다.
"저는 아닙니다. 그리고 전령 중 제가 가장 빨리 달려왔습니다."
전령은 아주 위험한 직업이다. 좋은 소식을 전하면 은자를 상으로 받기도 하고 진수성찬을 얻어먹기도 한다. 그러나 나쁜 소식을 전하다가 목이 잘리거나 팔다리가 잘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전령은 대부분 눈치가 빠르다. 나쁜 소식은 입을 꾹 다물고 절대 누설하지 않고, 좋은 소식은 양념을 잔뜩 쳐서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닌다.
그래서 군왕의 얼굴이 굳자 바로 부복하여 억울함을 호소했다.
"너무 방심했구나."
군왕이 탄식했다. 그리고 그저 자신들이 방심한 거로 여기는 다른 군벌들과 달리, 군왕은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지금까지 봐온 윗선의 능력으로 봤을 때, 촉의 군대가 움직인 것이나 마교의 계략 그리고 표항군을 비롯한 제국 북부 군대들의 동향을 모를 리 없다.
'토사구팽인가? 아니면 철저한 몰락인가?'
자신이 버림받은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제국을 주무르던 의문의 세력이 몰락한 건지 모르지만, 군왕은 일단 자기와 가문의 안위를 챙기는 게 우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 작가의말
마중구문의 팔다리까지는 아니고, 손가락 발가락 자른 정도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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