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두제혼
대족괴가 사라진 동시에 무룡이 움직였다.
조형래는 검은 안개 때문에 크게 놀랐는데 손청우가 노혼을 언급하며 대놓고 질책하자 적잖이 당황했다. 거기에 옥경 도사가 갑자기 불붙은 검을 휘두르다 쓰러지는 바람에 머리가 굳어버렸다.
화룡점정으로 검은 안개 사이에서 대족괴로 의심되는 존재가 나타나기까지 했다.
연이은 괴사에 당황한 나머지 조형래는 무룡이 자신을 덮칠 때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후발선제後發先制.'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형래는 자신을 기습한 덩치만 크고 내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대를 일 검에 해치우려 했다.
여기서 괜히 질질 끌다가는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특히 가까운 곳에서 미친놈처럼 눈알을 희번덕거리는 손청우가 제일 걱정이다.
조형래의 창경검법蒼勁劍法은 화산의 개파조사가 사시장철 푸르고 굳센 소나무를 보며 영감을 얻어 만든 검법이다. 비바람은 물론 추위와 폭설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를 닮은 이 검법은 상대가 힘으로만 휘두른 검 사이를 뚫고 정확히 심장을 찔렀다.
'됐다.'
그러나 이어진 진행은 조형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자신의 검이 심장 부위를 찌른 순간 상대의 다소 어설프던 검법이 갑자기 바뀌었다.
'노도박안?'
완벽한 노도박안이다. 검날이 유독 긴 시커먼 검이 조형래의 목과 팔 그리고 가슴을 난도질했다.
'나는 왜?'
조형래는 왜 자신의 검이 상대 가슴을 뚫고 심장을 찌르지 못했는지 미처 궁금을 풀지도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무룡이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조형래의 목을 벴다.
"누구냐!"
무룡은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버린 후 검집에 넣고 품에서 검은 천을 꺼내 조형래의 머리를 쌌다. 조형래의 머리를 왼손에 들고 몸을 일으킨 무룡은 자신을 둘러싼 화산 제자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구 년 전에 마교의 기습을 왜 몰랐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무룡의 말에 화산 제자들이 주춤하며 서로 눈치를 봤다. 원래대로라면 대사형인 청웅이 나서야 하는데, 조형래의 죽음을 목격한 청웅은 겁에 잔뜩 질려 제자들 뒤에 웅크리고 숨었다.
"궁금하긴 하오."
손청우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이걸 보시오."
무룡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손청우에게 건넸다. 빠르게 읽은 손청우가 내공을 실어 크게 외쳤다.
"비겁하게 암습하여 노혼 사부를 죽인 마교 장로 후문영에게 조형래가 보낸 편지다."
손청우와 가까이 있던 화산 제자들이 다가가 확인했다. 낙관은 확실히 조형래였고 적힌 날짜는 마교가 화산을 기습하기 보름 전이었다.
편지의 내용은 구 년 전의 기습과 전혀 관련이 없었으나 조형래와 마교의 장로가 서신을 통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문제다.
"이게 진짜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소?"
"너희 중 조형래의 필체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가?"
손청우는 바로 몸을 돌려 청웅한테 가서 몸을 수색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연거푸 일어나자 겁을 제대로 먹은 청웅은 손청우가 자신의 품을 뒤지는 데도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이건 얼마 전에 조형래가 칠일제를 지내겠다면서 비둘기로 보낸 서신이오. 필적을 대조해 보시오."
여럿이 나섰으나 누구도 다르다는 말을 못 했다. 금침회혼법도 척척 성공할 정도로 손이 정교한 무룡이 꼬박 이틀을 공들여 흉내 낸 거여서 조형래가 살아나도 헷갈렸을 것이다.
편지를 보낸 조형래와 받은 후문영 모두 죽었으니 확인할 방법도 따로 없다. 다른 사람의 얼굴로 똑같이 분장하는 재주도 있는 강호기에 필체만으로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지만, 마교가 화산에서 살육을 버린 다음 조형래가 빠르게 움직였던 걸 떠올리며 화산 제자들은 점점 심증을 굳혔다.
"그댄 누구고 이 편지는 어떻게 그대 손에 들어간 거요?"
화산 제자들이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무공만 강한 줄 알았는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솜씨도 여간한 게 아니었다.
'화무룡 때문에 빛이 바래긴 했지만, 손청우 역시 웬만한 문파라면 대사형 자리를 차지할 만한 천재였지.'
그간 잊고 지냈던 손청우의 재능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이 년 전에 후문영이 죽은 건 모두 알 것이오."
화산 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문영의 죽음은 마교가 정의연의 짓으로 몰고 정의연이 마교 짓으로 모는 바람에 한때 화제였다.
노혼을 비열하게 암습해 죽인 흉수라 화산 제자라면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다.
"후문영의 염통이오. 내 스승이나 다름없는 노혼의 무덤에 바치려고 내내 몸에 지니고 다녔소."
무룡의 손에 말라비틀어진 심장이 하나 있었다.
"그 편지는 후문영의 몸에서 발견한 거요. 아무래도 그 편지로 조형래를 협박해 무슨 일을 시키려 했던 것 같소."
대부분 제자는 무룡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후문영은 마교의 지낭으로 알려졌지만, 무공도 대단한 자요. 당신 말을 들어보면 후문영을 죽인 게 당신이라는 것 같은데,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모르겠소."
"방금 보지 않았소? 조형래의 검이 내 살을 뚫지 못했소."
"실례하겠소."
갑자기 허리에서 검을 뽑은 손청우가 전력을 다해 무룡의 가슴을 찔렀다. 무룡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손청우의 검을 그대로 받았다.
손청우보다 내공도 심후하고 검법의 경지도 높은 조형래조차 무룡의 마환기공을 뚫지 못했다. 나이치고는 빼어나다고 해도 아직 공력이 부족한 손청우의 검도 당연히 막혔다.
"실례가 컸소. 그대는 내 사부를 해친 두 원수를 죽여 복수해준 은인이오. 이 손청우의 절을 받으시오."
검을 검집에 넣은 손청우가 넙죽 엎드려 절을 올렸다. 구 년 전 노혼 덕분에 목숨을 건진 자들이 덩달아 무릎을 꿇었다.
"예를 차릴 것 없소. 당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스승으로 생각하는 노혼을 위한 복수요."
말을 마친 무룡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대화하는 사이 검은 안개가 어느새 옅어져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협객은 어디로 가시오?"
"조형래의 식솔들이 눈을 퍼렇게 뜨고 따뜻한 밥을 먹으며 세상을 활보하고 있소. 내 그자들을 마저 응징해야겠소."
"그건 우리 화산의 일이오. 마음은 고맙지만 협객께선 여기서 멈추시오."
말을 마친 손청우가 검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나 손청우는 당장 장안으로 가서 화산을 팔아 호의호식한 조씨 가문을 멸문할 것이다. 내게 힘을 보탤 제자가 있는가?"
"돕겠소."
"따르겠소."
"사백을 따르겠습니다."
순식간에 팔십 명이 넘은 제자가 나섰다. 대부분은 노혼의 검에 목숨을 구원받은 제자였다.
조형래를 따라온 자들이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태반은 무공도 모르는 시종이고, 남은 자들은 조형래가 고용한 무사들이었다. 객잔과 주루 사업 때문에 조형래의 식솔들은 모두 장안에 있었다.
"장로회에 건의하오. 역적 조형래와 결탁하여 대사형 자리를 무단으로 차지한 청웅의 단전을 폐하고 화산에서 제적하시오."
진정 고수로 불릴 만한 자들은 화진악을 따라 도주하다 목숨을 잃었거나 마교에 저항하다 장렬히 희생했다.
현재 장로회라고 하는 자들은 화진악과 같은 배분 중에서도 별 볼일이 없던 자들이다.
커다란 사건이 터지는 내내 한 명도 나서지 못했을 정도로 줏대가 없고 조형래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던 자들이라 서슬이 퍼런 손청우의 말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곧 청웅의 단전에 대침이 박히고 팔다리 힘줄이 잘렸다.
"우리는 장안으로 가서 역적의 뿌리를 뽑겠소. 남은 사람들은 칠일제를 마저 완성하시오."
손청우가 절반이 넘은 제자를 데리고 떠나자 무룡 역시 공동묘지를 떠났다.
일이 끝난 듯하여 보이자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옥경 도사가 제자들과 함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법사를 이어갔다.
"사백, 그게 진짜 후문영의 심장입니까?"
"그래. 어차피 죽을 놈이었는데 내가 더 빨리 죽게 했지."
"심장에 오줌을 싸도 되겠습니까?"
"사부 제사를 지낸 다음 네 마음대로 해라."
무룡은 대족괴로 변장했던 계혼과 함께 조양봉 꼭대기로 갔다.
"사부. 아직도 배후에서 지시한 놈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화산을 바로 세운 것에 만족하고 그만 편히 눈을 감으세요. 남은 복수는 우리 산 사람들 몫입니다."
"사조 덕분에 하찮은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덤으로 사는 삶, 사조의 복수와 화산의 명예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둘은 조형래의 머리와 후문영의 심장을 무덤 앞에 놓고 제사를 지냈다.
"사백.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네 성질을 죽일 수 있겠느냐?"
"당연히 그리할 겁니다."
"마교 사람들과도 웃으며 지낼 수 있겠느냐?"
계혼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넌 아마 마교 사람이라면 다 미울 것이다. 그러나 마교도 사람 사는 곳이고 거기에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다양하게 섞였다. 진정한 복수는 복수심에 삼켜지지 않고 행복한 삶을 좇는 것이다."
계혼에게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무룡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복수도 못 한 주제에 행복할 자격이 어디 있습니까?"
"복수를 못 해도 행복할 자격은 있다. 단, 행복하려고 복수를 포기하면 안 되는 것이다."
"사백 말씀대로 마교의 작자를 만나도 화내지 않고 꾹 참아보겠습니다."
"사부와 헤어질 각오는 되었고?"
무룡은 처음부터 계혼을 데리고 화산을 떠날 생각이었다. 계혼의 불같은 성격은 손청우가 대사형이 되고 이후 장문인이 되는 데 큰 걸림돌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무룡은 계혼에게 제대로 된 벽파검법을 전수하고 노혼과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도울 작정이다. 자신은 평생 내공을 못 움직일지도 모르니 계혼을 벽파검법의 진정한 전수자로 키울 마음을 먹었다.
"혹시 사백과 사부는 이미 얘기가 다 된 겁니까?"
계혼은 성질이 더럽고 화를 쉽게 내서 그렇지 멍청하지 않다. 대화의 흐름을 통해 무룡이 자신을 데려갈 의사가 매우 큼을 알아챘다.
"그래. 난 지금 당장 화산을 떠날 생각이니 넌 날 따를지 남아서 사부를 모실지 선택해라."
계혼은 무덤 앞에 놓인 심장을 주워다가 벼랑 끝에 놓았다. 그러고는 바지를 내려 오줌으로 심장을 밀어 벼랑 밑으로 떨궜다.
후문영의 심장은 새나 쥐 혹은 벌레의 배를 채워주며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백을 따르겠습니다."
"그럼 호칭은 사부로 바꿔라. 청우는 이제부터 네 소사부다."
"네, 사부."
모옥으로 가서 짐을 간단하게 챙긴 계혼은 조양봉과 멀어지는 내내 눈물을 글썽이며 자꾸 뒤돌아봤다.
"이제부턴 성질을 다스리는 법을 익혀야 한다. 파도가 아무리 심한 바다도 깊은 곳은 고요하다. 그 고요함 덕분에 파도가 마음껏 날뛸 수 있는 것이다."
"사부는 바다를 보았습니까?"
"너도 곧 보게 될 거다."
- 작가의말
말라비틀어졌다고 해도 꽤 무게가 나가는 심장을 오줌발로 밀어낸 걸 보면 우리 계혼이는 아주 건강합니다. 결혼하고 이쁨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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