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장大終章
천수천안은 주선진도를 얻으려고 통천교주의 신물인 청평검을 분질렀고, 검의 저주를 받았다.
사마귀와 화무룡을 생포했을 때 검을 그대로 둔 것도 자신감이 넘쳐서가 아니라 마중구문의 소속은 검을 만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인피요괴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력의 검극을 상대로 살짝 고전했다. 검극은 비록 품은 힘이 약하지만, 경지만큼은 높아서 천수천안에게 어느 정도 위협이 되었다.
"성가시군."
천수천안이 마교를 가장 먼저 덮친 건 복수심 때문이 아니다. 현재 중원의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가장 강한 세력이기에 제일 먼저 와해하려는 것뿐이다.
그런데 가볍게 생각하고 왔더니 검극이라는 자 혼자서 자신을 일각이나 막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지."
검극은 심검으로 공격도 하고 수비도 했다. 원래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싸워도 멀쩡해야 하는데, 수비에도 막대한 기운을 낭비한 바람에 일각 만에 지쳐버렸다.
"맞아. 내 할 일은 여기서 끝이야."
추영이 주문한 것보다 반 각이나 시간을 더 끈 검극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도망쳤다.
"그래. 또 무슨 수작이 남았는지 보자."
마교에 도착하자마자 벽력문이 벽력대진으로 천수천안의 발목을 잠깐 잡았었다. 급히 준비하느라 미흡한 부분이 많은 것도 있지만, 술사들의 정점이나 다름없는 천수천안 앞에서 벽력대진이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나다."
"오랜만이군. 나도 욕심을 덜 부렸으면 최소 백이라도 천계로 갔을 텐데."
천수천안은 오만한 성격 때문에 혼이나 백 중 하나를 버리고 천계로 가기보단 혼과 백이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천라지망으로 천계로 가는 길이 막힐 때까지 승천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딴 소릴 하는 걸 보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절검문주가 천수천안을 비웃으며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뭐지? 절검문의 그 잘난 절검은 어디다 팽개치고 이딴 조잡한 검술을 내게 펼치는 거야?"
절검문의 가장 강한 비기인 절검은 검룡이 탄생하면서 사라졌다. 비록 지금도 절검을 펼칠 수 있지만, 예전과 같은 위력이 안 나온다.
어차피 절검문주도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기에 굳이 기운과 심력을 낭비해 절검을 펼칠 이유가 없다.
"양의검이라고 꽤 괜찮은 검술이다. 내가 아직 그 진수를 터득하지 못해 조잡해 보일 뿐이다."
절검문주가 절검을 펼치더라도 천수천안을 죽일 순 없다. 그저 천 개나 되는 목숨 중 아주 조금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인간을 모두 소멸해야 하는 천수천안으로선 목숨 하나도 쉽게 여길 수 없다. 최후의 최후가 되면 목숨 한두 개로 성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천수천안이 절검을 염두에 두고 조심한 덕분에 절검문주 역시 기운이 소진될 때까지 시간을 끌고 물러났다.
"오호. 고작 저거였어?"
마교가 천수천안을 상대로 준비한 건 환신이었다. 사마귀의 염천공이 역대 교주들보다 더 높은 경지를 이뤘기에 파괴에 이어 순환의 환신까지 소환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내가 답영술踏影術을 익혔는데 말이야."
천수천안이 기껍게 웃었다.
답영술은 그림자를 밟아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법술이다. 사실 그림자를 밟는 건 답영술의 아주 낮은 단계일 뿐이다.
답영술의 진수는 상대의 일부를 통해 전체를 공격하는 것으로, 익히기도 펼치기도 어려워서 대부분 술사는 그런 법술이 있는지도 모를 정도다.
"내게 시신弑神의 영광을 주다니. 아직 하등 생물의 염念을 통해 힘을 키우는 단계인 것 같은데 함부로 꺼내 쓰면 되겠어?"
천수천안의 몸에서 천 개의 발이 나와 땅을 강하게 밟았다. 천수천안은 천 개의 독립된 개체나 다름없기에 답영술을 천 명이 펼치는 것과 같다.
대부분 술사는 익히지도 못하고, 운 좋게 익혀도 위력을 못 내는 답영술을 세상 누구보다 강하게 펼쳤다.
마교에서 신령한 불의 수하로 아는 네 환신은 사실상 신령한 불이 세상에 보내는 본신의 힘이 구체화한 것이다. 천수천안은 답영술로 두 환신이 아닌 신령한 불의 본체를 직접 공격했다.
"하하. 역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어."
천수천안에겐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보유한 지식으로 다른 답을 찾기 어렵고, 보유한 힘 역시 제사가 실패한 국면을 수습할 수 없었다.
후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목숨을 보전하거나 승천에 성공하는 것만 생각했고, 그림자들의 지식과 남명해에 있는 요괴와 마물의 힘을 흡수한 뒤 직접 인간을 전부 소멸하는 길을 골랐다.
여기까지는 부득이한 선택이었지만, 첫 목적지로 마교를 고른 건 천수천안이 거듭 고민하여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천수천안에게 어마어마한 호재였다.
차라리 시간이라도 끌었던 검극과 절검문주와 달리, 두 환신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소멸하여 사라졌다.
더구나 답영술로 본체까지 소멸하여 마교는 모시던 신을 영영 잃고 말았다.
"무언독왕이라는 자가 산을 엎은 적 있다지?"
기세가 오른 천수천안은 손가락을 가볍게 놀려 세세겁화봉을 들어 올렸다. 무룡이 공간을 깨닫고 산을 뒤집은 것보다 몇 수 더 높은 재주다.
"보자. 독무곡이 저긴가?"
즐겁게 중얼거린 천수천안이 세세겁화봉을 던졌다. 사실 돌멩이를 던지는 것처럼 손에서 놓은 게 아니고 계속 기운을 소모해 나르는 것이다. 그러나 산을 움직이는 기운이 보이지 않기에 마치 던진 것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어허. 천생연분이었나 보군."
세세겁화봉은 독무곡의 파인 곳에 정확히 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사람이 많이 사는 입구 근처가 아니라 중반 부분에 박혔기에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다.
"곧 지옥문이 열릴 거다."
혼자 중얼거린 천수천안은 인간은 물론 대부분 동물의 귀에 들리지 않는 음성을 발사했다. 천하에 널리 퍼진 요괴와 마수가 천수천안의 거역할 수 없는 부름에 지체 없이 마교로 달려왔다.
죽여야 할 인간이 많은 천수천안으로선 마교의 수백만이 되는 교도를 일일이 찾아 죽일 순 없다. 그러나 요괴와 마수들의 도움이 있다면 며칠이면 된다.
"죽여야 할 놈이 한둘이 아니네."
강한 자만 죽이는 거로 부족하다. 비록 무력은 조금 부족하나 당백호나 추영처럼 구심점이 될 만한 인간도 모조리 죽여야 마물과 요괴들에게 제대로 된 저항을 못 하고 전멸한다.
그때. 천수천안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오호. 하늘이 날 굽어살피시는구나."
남명해의 제단이 파괴됐다. 천수천안이 직접 해도 시일이 무척 걸리는 일인데, 순식간에 완전히 파괴되었다.
"설마."
천수천안은 법술로 검을 소환했다. 청평검을 분지르며 받은 저주로 검의 배척을 받는 천수천안이기에 검이 소환에 응하지 않아야 옳다.
그런데 조잡하기는 하나 확실한 검의 형태를 한 싸구려 무기가 천수천안 앞에 나타났다.
"역시 대단한 놈이야. 바로 여길 안 오고 괜히 제단 쪽을 기웃거렸다간 내가 먼저 죽을 뻔했어."
무룡이 청평검의 잔여 기운을 모두 모아 제단을 파괴한 바람에 청평검의 저주가 효과를 잃었다. 만약 그 검이 천수천안을 향해 휘둘러졌다면 제단 대신 천수천안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잠깐. 난 지금 너무 흥분했다. 이러다가 또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천수천안은 자신이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렸음을 떠올리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기쁨에 겨워 너털웃음을 웃었다.
"아니. 이 이상으로 상황이 완벽할 수 없잖아. 어떻게 방심하면 또 뒤집히겠어."
말을 마친 천수천안이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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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다."
"성녀가 돌아왔다."
추향의 등장에 절망에 빠졌던 마교 교도들의 사기가 조금이나마 진작됐다.
"상황은?"
"북쪽에서 수백만 규모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은데, 명황성에서 나온 괴물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거니까 혼란을 수습해라. 그리고 내 어머니와 동생은?"
"놈이 세세겁화봉을 독무곡에 던졌습니다. 두 분은 교주 그리고 소교주와 함께 독무곡으로 가서 인명을 구출하고 있습니다."
"몰려오는 자들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니까 여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전해라."
다행히 북에서 최소 삼백만이 되는 군세가 내려오고 있음을 알기에 준비하던 중이어서 수습은 꽤 빨랐다.
독무곡에서 산에 깔린 자들을 구출하고 죽은 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는 사이, 중원 각지에서 온갖 요괴와 마수들이 몰려왔다.
대신, 마교 편에는 수백만 마리나 되는 청동랑이 있었다. 예두의 부름에 세상에 널리 퍼진 청동랑이 하나도 빠짐없이 온 것이다.
"예두 착하지. 애들 시켜 저놈들을 처리해."
숫자는 청동랑이 수백만 마리로 절대적 우위지만, 개체의 실력은 요괴와 마수들이 훨씬 강했다. 간혹 목숨을 잃고 쓰러지는 마수나 요괴가 있었지만, 청동랑이 파괴되는 속도가 수백 배 빨랐다.
다행이라면 요괴와 마수들이 협력하지 않아 실력의 차이만큼 피해가 크지 않았다.
위력은 부족하나 지칠 줄 모르는 청동랑은 요괴와 마수 상대로 꼬박 이틀을 버텼다. 그 결과 청동랑은 전멸했고 요괴와 마수는 죽은 놈은 드물어도 크고 작은 부상으로 하나같이 약해졌다.
"우오오~"
털을 빳빳이 세운 예두가 자신의 격을 드러내며 요괴와 마수들에게 굴복을 요구했다. 마중구문이라면 체계적인 성장을 유도해 훨씬 많은 요괴와 마수를 굴복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추향의 손에서 자란 예두는 겨우 한 번 성장했고, 제단에서 잠깐이나마 기운을 뺏기기까지 했다.
그래서 수백만 청동랑을 희생해 요괴와 마수를 약하게 만들었으나 채 삼 할도 자기편으로 끌어오지 못했다.
일부가 예두의 편이 되면서 마수와 요괴들이 또 싸웠다. 이성이 없거나 약한 마수와 달리 요괴들은 불리하면 물러나기도 하는데, 예두의 편에 선 요괴들은 예두의 명에 따라야 하고 넘어오지 않은 요괴들은 천수천안이 마지막으로 남긴 명에 따라야 했다.
그렇기에 양쪽 모두 물러서지 않고 한쪽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사흘 밤낮 싸웠다.
"벽과 파야. 이 아빠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보아라."
노계혼이 커다란 검을 들고 우쭐거리며 등장했다. 노계혼과 매화가 낳은 쌍둥이 아들은 각각 노벽과 노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매화한테 잡혀 살며 매사 양보하는 계혼이지만, 두 아이 이름만큼은 끝내 자기 고집대로 벽파검법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잘난 척은."
그런 노계혼의 뒤를 덕구가 따랐다. 둘은 그간 뼈를 깎는 수련으로 합격기를 만들었다. 노계혼이 검으로 만든 파도에 덕구의 독을 섞어 위력은 그대로여도 살상력은 수십 배로 강해졌다.
칼날에 눈이 안 달리듯이 독도 적아를 구분하지 못하기에 여전히 수백 마리나 남은 요괴와 마수에게 접근하는 건 오직 둘이었다.
곧 노계혼이 사람 키보다 큰 거검을 낭창낭창한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볍게 휘저었고, 덕구의 양손에서 형형색색의 독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손 좀 보태겠다."
요괴와 마수는 물론 청동괴마저 마교로 향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화산파 장문 손청우는 홀로 검을 챙겨 마교로 달렸다. 그러나 경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요괴와 마수와 다르게 휴식이 필요했기에 이제야 도착했다.
"소사부, 독이 있습니다."
"힘 좀 세졌다고 사부를 얕보는 것이냐?"
손청우의 검에서 차가운 기운이 나와 노계혼이 만든 파도에 합류했다. 마치 한 사람이 펼친 것처럼 완벽하게 융합하는 모습에 계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도 벽파검법을 익혔음을 잊지 말아라."
매화검법의 차가운 기운이 합류하며 노계혼의 파도가 더욱 묵직하게 변했다.
대부분 요괴는 독에 약해지는 바람에 파도의 위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러나 여전히 강한 요괴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예두가 직접 나섰다. 알에서 나오기 전부터 음양과 오행의 기운을 능숙하게 다뤘던 요괴는 명황성의 결계가 사라지고부터 수많은 지식을 배웠다.
비록 남은 요괴들을 자기 밑으로 거둘 정도는 못 되지만,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요괴도 예두의 발톱 아래 하나둘 스러졌다.
그러나 채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새로운 악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해에서 살던 인간 수백만이 추영 일행의 흔적을 쫓아 마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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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수만 대의 수레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움직였다. 선두에 선 수레에서 예두의 몸통을 베고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보며 추향은 짜증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툴툴거려. 이만한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정말 다행스럽게도 북명해에 살던 인간은 마중구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인 게 아니었다. 북명해가 북쪽에 고정되며 곧 어마어마한 한파가 닥칠 것임을 알고 따뜻한 곳으로 피신을 온 것이다.
불행한 건 이들에겐 수백만 명이 살 땅이 필요했다는 것이고, 추영 일행을 쫓아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이 마교였다.
몇 번의 협상을 거쳐 마교는 자신들의 땅을 북명해에서 온 인간들에게 양보하고 이전하기로 했다.
"다행? 결국 힘이 모자라 뺏긴 거잖아."
천수천안에게 모시던 신이 소멸하지 않았다면 마교는 끝까지 버텼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소멸을 느낀 교도들의 사기는 쉽게 회복하지 않았고, 싸우면 서로 손해라는 판단에 추영은 오랜 기간 살던 땅을 버리고 이주를 선택했다.
대신 꽤 많은 양의 재물을 받아내서 자존심이 몹시 상하는 걸 빼면 마교한텐 잔뜩 남는 장사였다.
"혈교의 땅이 훨씬 살기 좋다잖아."
마교는 혈교가 있던 땅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모시던 신을 잃은 건 혈교 역시 마찬가지다. 단, 이들은 마교처럼 신이 소멸한 게 아니라 힘을 잃은 것이기에 신의 부활을 기대할 만하다.
"부친은 무사하시겠지?"
"그 신을 죽이고 산을 막 던졌다는 놈이 안 나타나는 걸 보면 무사하다고 봐야지."
"독도 사라지고 몸에 담은 힘도 얼마 없다면서. 그런데 부친은 어떻게 그놈을 묶어 둔 거지?"
"나도 몰라. 근데 너도 아빠 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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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교는 새로운 신을 모시지 않았다. 아내가 죽었다고 바로 새장가를 가는 인간이 드물듯, 마교 역시 소멸한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바로 모시는 건 어려웠다.
마교는 혈교의 영역에 자리를 잡으면서 혈교 교도들을 흡수했다. 그리고 오독교 역시 오래 살던 곳을 버리고 마교에 합류했다.
교주인 난화봉이 사마귀와 혼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일이다.
"이번엔 우리가 간다."
마교와 혈교와 오독교. 이름만 들어도 이자들을 섞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새로운 단체가 안정을 찾도록 애쓰다 보니 추영은 물론 추향과 당백호도 무룡을 찾는 행렬에 단 한 번도 합류하지 못했다.
"그래도 교도들에겐 알리지 않는 게 좋겠다."
사마귀는 이미 두 번이나 북명해로 갔지만, 세상과 완전히 융합한 북명해에서 남명해로 갈 길을 찾지 못했다. 수천 명 현녀문 제자들이 넉넉히 살던 부유도를 입으로 삼킬 정도로 큰 흰고래인데, 아무리 바다를 샅샅이 누벼도 종적 하나 없었다.
"이젠 오라버니가 교주니까 알아서 하세요."
사마귀가 몸을 움츠렸다. 추영이 사마귀에게 존대하는 경우는 딱 둘이다. 낯선 사람이 있어 사마귀의 체면을 세워줘야 할 때, 그리고 기분 나쁠 때.
"알았어. 여긴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
무룡을 찾는 원정대가 일곱 번째로 꾸려졌다. 추영 등이 합류한 관계로 구성은 오히려 단출해졌다.
추영의 박학다식과 추향의 다재다능. 거기에 당백호의 번뜩이는 기지까지 있어 어려움은 있을망정 크게 곤란한 일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침을 뱉으면 땅에 닿기도 전에 언다는 북명해의 영역에 들어섰다.
"예두야. 까마귀가 말한 그거 해봐."
영결 계약 때문에 예두와 추향은 오래 떨어져 살 수 없다. 둘이 강해지면 조금씩 나아질 일이긴 하지만, 아직 추향은 물론이고 예두도 갈 길이 멀었다.
그래서 까마귀가 말한 부유도가 흰고래를 부르던 그 울음은 처음 시도하는 것이다.
어느새 송아지 크기로 자란 예두가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필요 이상으로 벌린 입은 마치 먹이를 삼키는 구렁이의 주둥이 같았다.
전혀 연관이 없는 듯한 세 가지 소리가 완벽한 화음이 되어 북명해에 널리 퍼졌다.
"온다."
거대한 존재감의 접근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추향이었다. 그리고 추영과 당백호도 곧 느꼈다.
"많이 아픈가 보구나."
모습을 드러낸 흰고래는 검은 점이 가득했다. 북명해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흰고래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남명해로 가는 결계 입구를 맡았기에 거기로부터 기운을 보충받아 죽을 염려는 없었다.
추영과 당백호는 노를 힘껏 저어 고래가 쩍 벌린 입으로 배를 빠르게 몰았다.
고래 입에 들어가며 컴컴해졌던 세상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남명해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추향도 급한 마음에 노를 젓는 행렬에 합류했다.
"저기, 저 방이에요."
일행은 혹시나 모를 위험에 대비해 예두를 앞장세운 채 제단이 있던 방으로 달려갔다.
"부군!"
무룡이 분명한 뒷모습을 보고 달려가려는 추영을 추향이 겨우 잡았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섣불리 다가가지 마."
그때 무룡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셋의 모습을 확인했는지 두 눈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거기서 대화해. 여기 일 아직 안 끝났다."
"아빠 위험한 건 아니지?"
추영은 물론 감정 표출에 인색한 당백호마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히려 맨날 아빠를 입에 달고 살던 추향이 제일 침착했다.
"놈이 죽으면서 똥을 가득 쌌다. 그걸 안 치우면 큰 재난이 닥친다."
천수천안은 죽으면서 자신의 독을 모두 뿜어냈다. 그 독이 남명해를 벗어나 북명해에 흘러들면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물론 해초마저 다 죽는다.
그렇게 되면 바다에 의지해 살던 사람들이 굶게 되고, 굶주리는 자들은 남을 약탈하게 된다.
"게다가 바다가 죽으면 땅도 조금씩 죽고, 결국엔 인간이 살 만한 땅이 줄어든다. 중원만 해도 일억이 되는데 얼마나 죽을지 모르겠구나."
말을 하면서도 무룡은 끊임없이 독룡유로 지네독을 흡수해 자신의 독룡담에 담았다.
"다 담을 수 있어?"
추영과 당백호와 달리 추향은 무룡이 뭘 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그럼. 내가 누구냐. 불사검왕에 무언독왕 아니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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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을 찾았고 무사하다는 희소식을 전할 임무는 당백호가 맡았다. 혼인하여 애도 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셋 중에 가장 약한 게 죄였다.
추영은 방 밖에서 무룡과 대화하며 즐겁게 보냈고, 추향은 아빠한테 응석을 부리는 외에도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남명해의 건물을 탐색하기도 하며 알차게 지냈다.
그렇게 꽤 긴 시간이 흘러 무룡이 천수천안의 독을 전부 회수했다.
"그런데 말이야."
추향은 여태껏 이 질문을 떠올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다.
"천수천안은 어떻게 죽인 거야?"
무룡은 오랜 기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괜히 음식을 섭취했다가 독을 담는 일에 지장이 생길까 봐 겁나서였다.
그래서 안색이 초췌한 걸 넘어 거의 아사 일보 직전으로 보였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힘이 넘쳤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으로 죽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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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천안은 제단이 무너진 걸 느끼자마자 바로 남명해로 돌아왔다. 마교부터 남명해까지 통로를 열어 도착한 거여서 채 차 한 잔 끓일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진법은 이미 해체되었고 추향과 예두도 사라졌다.
커다란 방엔 무룡만 있었다.
"끝까지 귀찮게 하는구나."
천수천안의 생각은 단순했다. 어차피 제단이 사라졌기에 다시 제사를 올려도 시간이 된다. 설사 이 방법으로 인간을 멸망할 수 없다고 쳐도, 제사를 진행한 것만으로 천수천안의 격이 오르고 힘이 세진다.
천수천안의 힘으로 인간을 다 죽인다는 보장도 없기에 만일을 위한 대비책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 무룡이 추향과 예두를 빼돌렸다.
"너희 인간에게 있어 그저 숨을 몇 번 더 쉬는 정도 차이밖에 없다."
말을 하며 천수천안은 무룡을 죽일 법술을 준비했다. 그간 시간이 흘러 무룡의 격이 더 떨어졌기에 확실한 공격을 적중시키면 반드시 죽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새로운 지배종이 생기면 천계로 가는 문이 다시 열린다는 생각은 누가 꺼낸 거지?"
"갓난쟁이가 젖 먹는 방법을 알듯이, 술사가 되면 자연스럽게 안다."
"갓난쟁이는 손가락을 물려도 젖인 줄 알고 빨지. 젖이 고픈 너희가 지금까지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
"단 한 명. 단 한 명도 아니라고 말한 적 없다."
"왜일까? 진리를 파헤쳐서 세상의 법칙을 찾아내는 거로 강해지는 게 술사 아니었나? 무수한 반론으로도 무너뜨리지 못할 때야 비로소 믿음을 세우는 게 너희 술사들 아니었어? 왜 이것만큼은 그리 쉽게 믿는 건데?"
그때부터 무룡과 천수천안의 싸움이 시작됐다. 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고 상대방의 틀린 부분을 꼬집었다.
시간이 흐르며 둘의 논리에는 빈틈이 점점 사라졌다.
그리고 무룡이 승리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 문제가 아니라, 누가 더 믿음이 확고하냐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래 산 것이 천수천안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서로 자신의 주장을 확실히 증명할 수 없는 상황에 더 오래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지만, 천수천안은 고전하는 자신에게 실망하여 마음이 계속 흔들렸다.
차라리 상대가 무룡이 아니라 훨씬 대단한 존재였으면 천수천안이 더 버티거나 심지어 이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작 백 년도 못 산 인간 상대로 고전하며 마음이 지속하여 흔들린 탓에 어이없게도 패배했다.
패배한 천수천안은 소멸을 느끼고 자신이 품은 독을 모조리 풀었다. 그러면서 언젠간 이 독으로 인간이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와서 환생하거나 부활하기를 꿈꿨다.
안타깝게도 천수천안은 독룡유를 깨우친 무룡이 남아서 십여 년에 걸쳐 모든 독을 수습할 줄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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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싸움에 져서 죽었다고? 그게 말이 돼?"
무룡의 이야기를 들은 추향이 길길이 뛰었다. 박진감 넘치는 수준 높은 대결을 기대했는데, 고작 말싸움만 하다가 끝났다고 하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를 정의하고 구분하는 건 뭘까?"
무룡의 질문에 추향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불사혈괴들처럼 신체의 대부분을 포기하고 삶을 연명하는 자들도 있고, 마중구문의 그림자처럼 육신을 아예 버리고 생존하는 자들도 있다. 절검문주는 누군가에게 기생해야 살 수 있고, 혈교의 정혈단 역시 온전하지 않다."
무룡은 기지개를 쭉 켰다. 오랜만에 먹은 물고기도 맛있고 마신 물 역시 꿀처럼 달았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곁에 있으니 세상 더 바랄 게 없었다.
"사는 방식이 다양한 자들의 공통점은 의지와 마음이다. 둘이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청동괴처럼 의지만 부여받은 것들도 결국 생존하려고 하는 걸 보면 둘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겠지. 청동괴가 살육보다 생존을 우위에 놓은 건 주입받은 의지를 마음이 이겨서가 아닐까?"
추향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확실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왠지 맞는 말인 것 같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난 단순히 천수천안과 말싸움을 한 게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독을 놈의 마음에 풀었지."
무룡은 모든 존재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마음과 의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떤 자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고 목숨을 기꺼이 던진다. 그런 자들에게 있어 의지가 이어지는 게 숨을 쉬는 것보다 더 확실한 삶인 것이다.
"심독心毒. 내가 품었던 자하괴독도 심독으로 알고 있다. 아무리 대단한 독이어도 어떻게 천계의 멸망을 논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천계에 사는 존재들의 마음을 흔들어 목적을 이룰 수 있겠다 싶구나."
추향은 여전히 아빠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딱히 어디가 틀렸다고 지적하기도 어렵기에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빠. 그럼 독은 뭐야?"
무룡은 깊이 고민하며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예전에 뭘 잘 모를 때 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살리면 약이고 죽이면 독이다. 쓰임새에 따라 독과 약이 구분된다."
무룡은 허공을 바라보며 그때를 회상했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기 짝이 없구나. 내가 천수천안을 죽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생명을 구했느냐. 살리고 죽이는 걸 고작 생명 한둘을 놓고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독과 약도 그렇게 단순하게 구분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생각하는 독은 도대체 뭐냐고?"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거부한다. 그 거부를 뚫고 생명의 순환을 이뤄내는 게 독 아닐까?"
무룡은 자신 없는 말투로 사랑하는 딸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 완결 -
- 작가의말
나누는 것보단 하나로 처리하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한꺼번에 올립니다.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은 먹지 못하는 음식과 마찬가지로 가치가 없겠죠.물론, 많이 읽는다고 가치가 더 붙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굳이 선작이나 조회수에 연연하지 않으나 그래도 여러분이 계셔서 완결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소위 내글구려병이라고 하죠. 자신이 쓴 글이 자꾸 마음에 안 드는 것 말입니다. 저도 해당 증상이 온 지 어언 일 년이 훌쩍 넘었습니다.마음에 안 드는 글 때문에 힘들 때가 많지만, 저는 그래도 꾸준히 쓰자는 입장입니다. 뭐라도 계속 써야 실력이 조금이라도 늘지 않겠습니까.하여튼, 이 글은 제게 쉽지 않았습니다. 첫술에 배를 불리려고 완벽한 세계관을 목표로 했기에 이야기를 짜는 게 힘들었습니다. 부족한 재주로 이야기도 진행하고 세계관도 펼치려니 스트레스가 여간한 게 아니더군요.그래서 차라리 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당분간은 현대물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길게 쓰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가 장편에 대한 로망이 늘 있어서 글을 시작할 때 최대한 길게 쓰자고 다짐하는데, 이제부턴 임팩트를 생각하면서 길게 쓰는 데 집착하지 않으렵니다.그리고 재미를 위해 개연성에 덜 집착할 생각입니다. 어떤 사건이 벌어질 때 이게 맞는 건지 고민하고,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어떻게든 말이 되게 하려고 흐름을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년 하반기 사이트 접속이 어려울 때 드라마를 다수 접하며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보는 사람을 흡입하는 게 훌륭한 연출임을 깨달았고, 굳이 아귀가 딱딱 들어맞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느꼈습니다.중언부언하느라 작별 인사가 길었습니다. 잠깐 쉬고 축구로 돌아오겠습니다. 감독 말고 선수 이야기이고, 재미 위주로 글을 풀어가겠습니다.그럼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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