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정만균
시간이 흐르며 무룡은 이룡에 대한 두려움을 잊었다.
머리로 인식하는 공포가 아니라 본능에 새겨진 두려움이어서 현실을 외면하거나 자신을 최면하는 등 방법으론 절대 떨쳐낼 수 없는 종류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입으로 아무리 괜찮다고 외쳐도 팔다리가 떨리는 걸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천방기사나 여동빈도 감탄했을 정도로 그릇이 큰 무룡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직 누구도 끝을 짐작하지 못한 무룡의 그릇은 이룡이라는 절세의 괴태怪胎까지 품어버렸다.
두려움이 사라진 덕분에 사고하는 데 치우침이나 모자람이 없었고, 덕분에 정확히 약속한 시각에 맞춰 이룡을 약속한 지점에 유인했다.
"발은 음양을 밟고 방향은 오행으로 하여라."
화뇌의 전음을 받은 무룡은 왼발로 음을 밟고 오른발로 양을 밟으며 오행의 상생에 따라 방향을 전환했다.
어떤 때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가끔은 뒤로 물러나는 듯도 했지만, 용케도 벽력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벽력진을 벗어나 반대편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생했구나."
만사가 귀찮아 칭찬은 물론 질책에도 인색한 화뇌가 드물게 찬사의 말을 던졌다.
"여섯 개가 남았습니다."
"하나는 벽력문이 책임지지. 오뇌군五雷君은 나서라."
화뇌, 수뇌, 목뇌, 금뇌, 토뇌. 벼락을 오행의 기운으로 해석하여 다섯 가지 다른 성질로 부릴 수 있다. 그리고 다섯을 합치면 백 배 이상의 위력을 낼 수 있다.
화뇌처럼 세 개 성질의 벼락을 다루는 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 가지만 다룬다.
"사부께선 안 나섭니까?"
"귀찮구나."
화뇌의 자리는 화뇌의 셋째 아들이 대신 나섰다.
그때 무룡의 뒤를 쫓던 이룡이 벽력진에 진입했다. 유일한 생로인 음양과 오행을 따르지 않는 이룡에게 벽력진은 수천 갈래 벼락을 선물했다.
"괴물이군."
이룡의 몸을 때린 벼락은 안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비늘을 따라 겉으로만 흘렀다. 벽력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강의 진법은 살아 숨 쉬는 모든 걸 말살할 수 있다고 자부했는데, 오늘로 자만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보조진을 가동한다."
이룡이 완전히 벽력진에 들어가길 기다려서 보조진인 오행진을 가동했다. 정확한 명칭은 오행신뢰진으로 무룡도 벽력문에서 일섬을 수련할 때 배운 적이 있다.
"벼락은 만물에 깃들었다. 네 몸에도 벼락이 있으니 게으름을 피우지 말고 끊임없이 갈구하여라."
벽력문에서 가장 게으른 문주의 말이어서 별로 와닿지는 않았다.
오행신뇌진이 가동되자 오뇌군의 몸에서 벼락이 솟았다.
둥근 구술을 잡은 수뇌군의 몸에선 수십 갈래의 적당히 굵은 벼락이 생겨 허공으로 뻗었다. 푸른 대나무를 양손으로 꼭 잡은 목뇌군의 몸에선 곧은 벼락 세 갈래가 땅으로 뻗었다.
상고의 문자가 적힌 비석을 손에 든 토뇌군의 몸에선 토막토막 끊어진 짧은 벼락들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무룡은 비석에 적힌 글자를 보고 의미를 알아냈다.
비석엔 봉마멸사封魔滅邪 네 글자가 적혔는데 품은 뜻은 수천 자가 되었다.
왼손에 징을 들고 오른손엔 송곳을 잡은 금뇌군의 몸에서 아주 굵은 벼락 한 줄기가 생겨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나 수뇌군이나 토뇌군의 것처럼 무작정 뻗어 나가지 않고 일정 거리에서 둥글게 뭉쳤다.
아버지 대신 화뇌의 자리를 차지한 화뇌군은 손에 꽃잎이 여덟 개인 연꽃을 닮은 하얀 꽃을 들었다. 화후가 부족한지 몸이 아닌 백련에서 벼락이 생겨 토뇌군과 마찬가지로 허공에 흩뿌렸다.
다른 점이라면 토뇌군의 것은 벼락 토막인데 화뇌군의 것은 불씨를 닮은 모양이었다.
"호법. 시작하세."
벽력문의 사대호법이 동서남북의 방위를 잡았다.
소양과 노양, 소음과 노음의 방위를 잡고 사상진을 펼친 네 호법은 오행신뢰진의 다섯 벼락을 통제했다. 제멋대로 사방으로 퍼지던 벼락들이 사상진의 통제에 따라 규칙적인 흐름을 보였다.
벽력진이 내리는 수많은 벼락도 무시하고 전진만 고집하던 이룡도 뭔가 위기를 느꼈는지 몸을 돌돌 만 다음 대가리를 푹 박아 넣었다.
물론, 짙은 독 안개 때문에 무룡 등의 눈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독 안개의 움직임이 멈춘 거로 이룡이 이동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추측으로 알아챘다.
"귀찮은데."
화뇌가 벽력문의 보물인 뇌공포雷公袍를 입으며 툴툴거렸다. 말과는 달리 뇌공포를 입은 화뇌는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소매를 둘둘 말아 양손을 감추기까지 했다.
"벽력진은 음양을 기반으로 한다."
화뇌는 소매로 감싼 손으로 벽뇌자모침霹雷子母針을 잡으며 말했다.
"보조진으로 오행진을 쳤고 통제진으로 사상진을 쳤다. 그리고 위에 하늘이 있고 발밑엔 땅이 있구나. 이제 사람만 있으면 삼재진도 있다."
모침은 흔하게 보는 검과 길이가 비슷하고 자침은 무룡의 눈에도 겨우 보일 정도로 자수침보다 훨씬 작았다.
"음양에 삼재에 사상에 오행이 겹치면 태극이 된다. 태극뇌라면 능히 놈의 심장 하나는 없앨 수 있다."
말을 마친 화뇌가 성큼성큼 벽력진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벽력진에 들어가기 전에 고개를 돌려 무룡에게 질문했다.
"혹시 내가 죽으면 벽력문의 진산호법鎭山護法이 돼 주겠느냐?"
진산호법은 문파의 모든 무력을 사용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다.
"사부께선 무사하실 겁니다. 혹시 불민한 일이 있다면 벽력문을 위해 제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그래. 귀찮다고 모른 체하면 귀신이 되어 네게 들러붙을 거다."
말을 마친 화뇌가 벽력진에 들어갔다.
"됐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 무룡의 귀에 벽력문 제자들의 환호가 들렸다.
거대한 기운이 갑자기 나타나며 독 안개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무룡의 눈에 이룡의 모습이 보였다.
똬리를 틀어 길이는 정확히 알기 힘들었고 특이점으론 꼬리가 세 개였다. 비늘 하나가 무룡의 몸통 크기로 보이는데, 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모호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대가리를 똬리를 튼 몸통 가운데에 푹 박았는데, 대가리가 하도 커서 삐죽삐죽 솟은 여섯 개 뿔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이룡의 몸통 위에 화뇌가 신중한 얼굴로 벽뇌자모침의 모침을 비늘 틈으로 꽂고 있었다.
"사부는 무사하겠지?"
"그럼. 천뇌天雷를 소환하는 데 실패하면 죽겠지만, 성공했으니 죽는 건 저 괴물이야."
무룡이 일섬을 익히는 걸 가장 열성적으로 도운 화뇌의 넷째 아들이 대답했다.
모침을 꽂은 화뇌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주문을 열심히 외웠다. 다행히 이룡은 아직 무슨 이변이 발생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를 못 챈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화뇌의 입에서 나온 주문이 바람을 타고 허공에 퍼졌다. 그에 소환된 천뇌가 반응했다.
난데없이 먹구름이 나타나더니 비도 우박도 아닌 것이 쏟아졌다. 그리고 먹구름 사이로 굵은 벼락이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주문이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삿된 것을 멸하라. 천뇌!"
주문을 끝낸 화뇌가 손에 잡은 자침을 허공에 던졌다. 먹구름에 몸을 숨기고 때만 기다리던 천뇌가 움직였다.
입을 흉악하게 벌린 뇌룡이 벽뇌자침을 삼켰다. 자침을 삼킨 뇌룡이 꿈틀거리더니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몸을 세차게 털었다.
강한 털기에 뇌룡의 꼬리를 꽉 잡고 있던 먹구름이 흩어졌다.
자유를 얻은 뇌룡이 입을 더 크게 벌리며 환호했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강한 우레가 산을 흔들고 땅을 울렸다.
포효를 끝낸 뇌룡은 곧바로 화뇌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무룡이 놀라움에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자침을 삼킨 뇌룡이 모침 안으로 사라졌다.
모침을 통해 이룡의 몸에 들어간 뇌룡은 가까운 곳에 있는 심장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모든 삿된 것을 벌하는 천뇌의 공격에 이룡의 심장 하나가 한 줌도 안 되는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동시에 이룡이 똬리를 튼 몸을 쫙 펴며 난동을 부렸다.
화뇌는 황급히 비늘 틈에 꽂은 모침을 뽑아 흔들었다. 이룡의 몸속에 있던 자침이 그에 반응하여 밖으로 나왔다.
자침을 수습한 화뇌는 꽁지를 빳빳이 세우고 부지런히 달렸다.
이룡의 난동도 난동이지만, 벽력진을 비롯한 진법이 파괴되며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 다 챙겨!"
말을 마친 화뇌가 전에 없는 부지런함을 보이며 벽력문 제자들을 지휘했다.
"모두 숨은 쉽니다."
네 호법 중 둘이, 오뇌군 중 넷이 기절했다. 아직 진법이 완전히 허물어지지도 않았는데 강호 어디에 내놔도 떵떵거릴 고수들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었다.
"괜찮겠냐?"
"저 튼튼합니다."
화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벽력문 제자들과 함께 도망쳤다.
어느새 현장에는 이룡과 무룡 그리고 곧 허물어질 진법만 남았다.
'다섯 개 남았구나.'
무룡이 공원파로 없앤 심장은 한 달 안에 회복되지 않는다. 그리고 천뢰로 없앤 심장도 다시 생기려면 최소 보름은 예상된다.
이제 보름 사이에 남은 다섯 심장만 없애면 이룡은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이룡이 사라지면 추영과 아이는 물론, 대대손손 괴물의 제물이 되어 꽃도 못 피우고 죽을 염려는 사라진다.
'공원파를 다시 펼칠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그때 벽력진이 무너졌다. 그리고 화뇌가 말한 태극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냥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야속하게도 무룡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벽력진이 허공에 태극 문양을 그리며 사라지는 짧은 기간에 어마어마한 힘을 방사했지만, 이룡도 무룡도 멀쩡했다.
힘이 사방으로 흩어진 것도 있고, 자체적으로 충돌하며 사라진 힘이 대부분이 이유도 컸다. 물론, 그 여파만으로 가까운 산이 두 개 무너지고 이룡이 있던 땅 주변이 움푹 꺼졌다.
그러나 세상에 못 뚫는 걸 찾는 게 어렵다는 벽뇌모침도 비늘 틈을 찾아 찔러야 할 정도로 단단한 외피가 이룡을 보호했다.
무룡은 벽력진과 거리가 꽤 먼 것도 있고, 벽파검법이 경지에 이르면서 파도처럼 강하면서 제멋대로인 기운을 상대하는 데 이골이 튼 덕분에 몸을 수초처럼 흐느적거리며 자신을 덮치는 힘을 모조리 비껴냈다.
먹먹해진 귀가 회복할 즈음, 반동으로 주변 기운이 이룡이 있는 곳을 향해 몰려들었다. 무룡은 등을 떠미는 힘을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룡에게 접근했다.
이제 놈을 도발해 마교와 정의연이 싸우는 곳으로 유인할 차례다.
기운이 잠잠해지자 대가리를 쳐든 이룡이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마주하는 이룡의 눈은 시뻘겠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심장이 터지는 고통에 충혈된 건지 알 바가 없었다. 그러나 무룡은 고통으로 눈의 실핏줄이 터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너도 피와 살로 이뤄진 건 어쩔 수 없겠지.'
무룡은 재수 없는 웃음을 날리고 바로 몸을 돌려 도망쳤다. 이룡은 비늘 사이로 독 안개를 뿜어내며 아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무룡을 추격했다.
- 작가의말
뇌정만균雷霆萬鈞에서 균은 서른 근입니다. 삼십만 근이라는 수치로 어마어마하게 큰 힘을 비유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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