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귀조
"삼촌, 은성진 받아."
간략하게 펼친 은성진은 추향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나 법술 재능이 뛰어난 청람 덕분에 추향은 은성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호칭만 삼촌이지 사실은 머슴이네요."
노계혼이 악담을 퍼부었다. 만날 때마다 낭아봉을 닮은 몽둥이에 아프게 맞은 기억으로 청람에게 좋은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넌 머슴보다 못한 노비다."
"삯 받는 머슴이라서 참 좋겠습니다."
"그럼. 무공 구걸하는 거지보단 낫지."
둘의 사이가 벌어진 건 청람이 한 수 가르쳐 달라는 노계혼의 부탁을 가차 없이 거절하면서부터가 시작이다.
"너처럼 머리가 둔한 놈은 우리 벽력문의 무공을 이해할 수 없다."
마환기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자 노계혼은 무룡의 신법을 탐냈다. 그러나 무룡은 벽력문의 무공이라며 계혼에게 가르치길 거부했고, 가르칠 자격이 되는 청람은 노계혼의 우둔함을 핑계로 거부했다.
그러다 찰거머리보다 더 끈질긴 노계혼의 애원에 조건을 걸었다. 자신이 몽둥이로 때릴 테니 신음을 참으면 일섬을 가르친다고 했다.
당시 마환기공의 빠른 성장으로 자신감이 지붕을 뚫고 하늘로 치솟던 계혼인지라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 누군가는 사돈에 팔촌까지 하루에 잃은 사람처럼 서글픈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노계혼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람은 노계혼을 볼 때마다 몽둥이를 꺼내 흠씬 두들겨 팼다.
노계혼이 항의해도 이미 약속이 된 부분이라며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악에 받친 노계혼이 마환기공을 열심히 수련해서 경지를 올릴 때마다 청람도 매질에 힘을 가했고, 청람의 그림자만 봐도 도망치는 습관이 생겼다.
"추 소저는 어디로 간 겁니까?"
"알 훔치러."
"저 큰 알을 어떻게 훔칩니까?"
"다 방법이 있어."
#
"어떻게 된 거야?"
추향과 접촉했던 사내가 연신 호통쳤다. 그러나 이미 수십 번을 반복한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삼두랑이 도주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알 때문입니다."
"다가가도 돼?"
"알에서 멀리 떨어지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다가가도 안전합니다."
사내는 호위들과 함께 삼두랑과 알이 있는 곳으로 접근했다. 거기엔 십여 명 술사와 수백 명 무인이 삼두랑을 상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다행히 이번에는 시원한 대답이 올라왔다.
"삼두랑이 알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마 새끼가 알에서 나오기 전엔 도주하지 않을 겁니다."
독심술사讀心術師. 이들은 요괴나 괴수의 생각을 읽는 술사다. 다행히 변덕이 심한 인간의 생각은 잘 읽지 못해서 배척받지 않았다.
"새끼는 언제 나오지?"
"길어도 한 시진 이상은 안 걸립니다."
사내는 뒷짐을 지고 하늘을 쳐다봤다. 명황성의 하늘은 밖에서 보는 하늘과 달리 색이 선명했다.
"지원을 부르는 건 어렵다는 말이군. 대책은?"
술사들의 우두머리가 나섰다. 술사는 무리를 짓지 않고 독래독왕하는 자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실력보단 대화를 잘하는 자를 우두머리로 뽑았다.
"봉인진을 펼쳐 알을 격리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해결책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사내는 문제가 뭔지를 묻기보단 해결책이 있는지 먼저 물었다.
"비싼 재료가 많이 듭니다. 구궁진 만드는 데 든 재료 절반 정도로 예상합니다."
"예전에 있는지도 모를 놈을 가둔다고 쳤던 그 진법인가?"
"맞습니다."
추향 등을 세상과 격리해 천방기사도 못 찾게 했던 그 진법을 펼친 게 바로 이들이었다. 그러나 술사의 재주라기보단 비싼 재료를 써서 펼친 진법과 결합한 법술이었다.
"재료가 되는가?"
"시도할 가치는 있습니다."
재료가 간당간당하단 뜻이다. 사내는 크게 심호흡을 세 번 한 다음 바로 결정했다.
"진행한다."
우두머리가 삼두랑을 견제하던 술사 몇을 불러 진법을 배치했다. 사내는 잔칫상을 받은 것처럼 좋아하는 술사들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 실패할 위기에 놓였는데도 어려운 진법을 펼친다는 데 기쁨을 느끼는 술사들의 정신 상태가 너무 한심했다.
'머리가 이상해야 술사가 되는 건가? 아니면 술사가 되면 다들 이상해지는 건가?'
황금이나 백은은 물론, 형형색색의 귀한 보석이 투입됐다. 게다가 인간이 말과 글을 모를 때부터 전해졌다는 뭔 쓸모인지도 모를 옛 물건들도 다 쏟아부었다.
"무인들에게 삼두랑의 피를 내라고 지시해라."
삼두랑은 강한 요괴가 맞지만, 도주나 은신의 재주와 비교해 싸움 실력은 다소 손색이 있다. 덕분에 술사와 무인들은 도주하지 않는 삼두랑을 여유 있게 상대했다.
"왜 진법이 이렇게 오래 걸려?"
지난번보다 훨씬 걸리는 시간에 사내는 살짝 짜증을 냈다. 혹시라도 진법이 완성되기 전에 새끼가 알에서 나오면 계획은 완전한 실패다.
새끼가 다 크기 전까지 삼두랑은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도 결합하지 않는다. 알을 없애면 그나마 다음을 노릴 수 있지만, 새끼가 태어나면 다음조차 없다.
"알을 갖고 여기서 나가야지 않겠습니까?"
"응?"
"계획이 삼두랑의 새끼를 얻는 거잖습니까."
사내는 계획이 틀어졌다고 생각해 수습을 잘 끝내고 다음을 노리려 했다. 삼두랑의 피를 내라고 한 것도 혈교에 의뢰해 약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데 술사들은 수습이 아니라 계획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었다.
"가능한가?"
"알은 세상과 격리됩니다. 그러면 삼두랑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알이 사라졌으니 놈은 당연히 도주할 거고, 그다음 알을 갖고 밖으로 나가면 그만입니다."
술사 우두머리는 왜 이렇게 간단한 사실을 질문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다.
'사고의 차이다.'
사내는 계획이 어긋나자 실패라고 생각했다. 과정 하나하나를 실수 없이 잘 해내는 데 너무 몰두한 탓이다. 그러나 술사들은 결과만 생각하고 대책을 마련했다.
'더 높이 오르려면 저들처럼 사고해야 한다.'
과정도 중요하지만, 결국 위에서 원하는 건 결과다. 과정이 좋으면 실패해도 큰 문책을 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아무리 엉망이어도 칭찬을 듣는다.
자리를 보존하려면 문책을 당하지 않는 게 맞는다. 그러나 더 높이 오르려면 칭찬을 들어야 한다. 그것도 자주.
"성공하면 술사들에게 주는 지원을 두 배로 늘리겠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대화하는 사이 진법이 완성됐다.
"제갈 선생, 진법을 발동하시오."
우두머리의 말에 제갈의 성을 쓰는 술사가 우모선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오오, 음양귀조陰陽鬼鳥다."
술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법술을 익히지 않은 사람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큰 진법은 발동에 몇 달씩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 그리고 지금처럼 등급이 높은 진법 역시 발동에 시일이 걸린다.
진법 규모가 작아도 며칠 걸리는 게 상식인데, 우모선으로 발동한 진법은 차 한 잔 끓이는 것보다 더 빠르게 끝났다.
진법에 성공하자 삼두랑은 금세 사라졌다.
인간이라면 왜 조금 전까지 있던 알이 갑자기 사라졌나 고민하겠지만, 요괴인 삼두랑은 달랐다. 알이 없다는 것과 적이 강하다는 두 가지 이유를 조합하여 바로 도주를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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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알과 함께 진법에 갇힌 추향이 키득거렸다.
안 그래도 알을 훔치면 삼두랑이 따라붙을 게 걱정이었는데, 멍청한 놈들이 알아서 진법을 펼쳐줬다.
"삼촌 괜히 불렀어. 계혼만 불쌍하지."
삼두랑을 걱정해서 청람을 불렀는데 결과만 보면 벽력목이 너무 아깝다.
"아가야, 아가야. 어서 나오려무나."
추향은 기운이 듬뿍 담긴 손으로 껍질을 살살 만졌다. 알에서 나올 새끼와 계약을 맺기 위해선 미리 친밀감을 쌓아야 한다.
"청동괴의 금金, 혈교의 수水, 삼두랑의 화火, 토土, 목木. 덕분에 오행의 기운을 모두 갖췄구나."
머리가 셋인 삼두랑은 세 가지 기운을 다룬다. 거기에 청동괴의 두 가지 기운이 합쳐지자 오행이 모두 갖춰졌다.
"네가 명황성의 존재로 태어나 성체로 자라면 여기 결계가 사라져. 그럼 수많은 생명이 도탄에 빠질 거야. 그러니까 나랑 계약을 맺고 세상에 나가자. 너는 자유를 얻어서 좋고, 세상도 안전하고. 어때? 참 좋지?"
추향은 볼을 알에 마구 비비며 아기 달래는 말투로 설득했다.
"자유! 그래, 넌 자유를 좋아하는구나. 계약을 맺어도 널 구속하지 않을 거야. 우리 아빠랑 엄마도 날 구속하지 않아. 동생이 조금 잔소리가 많은데, 그것도 다 애정이 있으니까 하는 거야."
그때 쩌적 소리와 함께 껍질에 금이 갔다. 추향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잘하고 있어. 넌 잘하는 거야.'
새끼가 아직은 약한 사지로 껍질을 계속 두드렸다. 추향은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하지만, 이건 새끼의 싸움이다.
칙 소리와 함께 알에서 김이 솟았다. 새끼가 불의 기운으로 껍질을 달군 다음 물의 기운으로 식히며 생긴 것이다.
'벌써 기운을 다룬다고? 나쁜 놈들 손에 들어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놈들이 삼두랑의 새끼로 뭘 하려는지 모르지만, 절대 좋은 일은 아니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기운을 다루는 법이 점점 능숙해지며 새끼는 온갖 재주를 부렸다. 땅의 기운으로 껍질을 울린 다음 금속의 기운을 강하게 뭉쳐 한 점을 공략하기도 하고, 바위도 비집고 들어가는 뿌리의 특성을 이용해 껍질의 결속력을 약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알은 점점 약해졌고, 끝내 실금이 큰 틈으로 변하며 반으로 쩍 갈라졌다.
'머리 하나, 꼬리 하나, 다리 넷. 최상급이다.'
요괴는 생긴 게 기괴할수록 더 강하다. 그러나 진짜 강한 요괴는 평범한 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알 밖에 나온 새끼는 불의 기운을 불러 젖은 털을 순식간에 말렸다. 그러곤 곧 금속의 기운을 뭉쳐 이빨을 만든 후 껍질을 으적으적 씹어 삼켰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추향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덕구, 덕구 어때? 이쁜 이름 아니야?"
추향은 아빠 엄마와 동생 빼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인 덕구의 이름을 늑대 요괴 새끼에게 붙여주기로 했다.
- 작가의말
가재는 게 편. 늑대는 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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