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혹 떼러 간 놈이 왜 혹 달고 돌아왔어?"
추향의 매서운 추궁에도 당백호는 담담했다.
"그럼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쳐?"
할 말이 궁해진 추향은 당백호가 데려온 두 여자를 흘기는 거로 화를 풀었다.
장원에 갇힌 남자들을 구한 다음, 우선 약을 써서 몸의 기운을 회복게 했다. 원기는 아니지만, 꽤 원기에 가까운 기운을 대량으로 빨린 사내들은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비실거렸다.
다행히 당백호의 약을 쓰는 솜씨가 범상치 않아 채 보름도 안 되어 다들 거동할 정도가 되었다.
그때부터 당백호와 난화봉은 사내들을 가까운 마을까지 호송하는 일에 몰두했다. 통천선사는 무공을 거의 잃다시피 하여 아직 거동이 불편하고, 추향은 깊이 잠든 예두의 곁을 떠날 수 없어서 걱정스러운 대로 둘에게 맡겼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 무리의 사내를 보내고 홀가분하게 돌아와야 할 당백호가 여자 둘을 달고 복귀했다.
"너희는 어디에 사는 누구고 어찌하여 여기 심산유곡까지 오게 됐느냐?"
"아가씨 앞에서 말조심하세요!"
무사 차림을 한 여자가 발끈했다.
"네 아가씨가 누구건 나보다 나이가 많기 어렵고, 지위가 나보다 높기 어렵고, 무공이 나보다 강하기 어렵다."
"우리 아가씨는 촉씨 가문의 외동딸이에요. 촉과 대리 그리고 토번의 땅에까지 우리 가문의 위명이 알려졌어요."
촉씨蜀氏는 원래 서하국의 촉구蜀丘씨로, 서하국이 멸망한 후 다른 가문들과 함께 성도로 옮겼다. 중원을 배척하는 다른 서하국 가문과 달리 중원의 말과 문자를 배우고 문물도 일찍 접했기에 기존의 토호세력과 벌인 경쟁에서 조금씩 우위를 점했다.
결국 함께 온 기존 서하국의 가문은 물론, 성도에 오랜 세월 뿌리를 박은 가문들까지 흡수하여 그 위세를 만방에 떨쳤다.
거기에 서하국 때 인연으로 토번의 왕과도 사이가 좋아 이름만 안 달았을 뿐 촉과 대리 지역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내가 더 높고 더세."
추향은 총명하다. 그리고 호승심도 강하다. 여태껏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 중에도 자신과 견줄 만한 자는 몇 없었다.
마침 당백호가 데려온 촉씨 가문의 아가씨는 추영을 빼고 처음 이기고 싶은 여자였다.
"우리 아가씨가 더세요!"
"아니야. 내가 더세. 소녀검素女劍이 대단한 무공이라고 하지만, 내가 더세."
화가 잔뜩 치민 무사 복장의 소녀가 허리에서 칼을 뽑았다. 서하국 출신이어서 그런지 칼의 날이 꽤 크게 휘었고, 칼등이 아주 두꺼웠다.
이름만 칼이자 팔심만 받쳐주면 도끼나 다름이 없는데, 도신이 넓어서 도끼보다 다루기가 훨씬 쉽다.
"네가 상대할 만한 분이 아니다. 물러나라."
추향의 목소리가 한여름의 더위도 쫓아낼 정도로 시원하다면, 상대 소녀의 목소리는 밤새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던 자도 정신을 차리게 할 정도로 맑고 고왔다.
여인이 익히는 검법 중 소녀검과 월녀검이 가장 유명하다. 현재 강호에 알려진 월녀검 말고 진짜 월녀검은 이미 실전돼 전설처럼 남았고, 소녀검은 익히기 너무 어려워 전승자가 강호에 모습을 안 드러낸 지 오래다.
늘 두 무공을 못 익힌 게 아쉬웠던 추향은 소녀검을 익힌 소녀를 만나자 호승심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이젠 네가 나서는 것이냐?"
"가늠하기 힘든 상대와는 검을 섞지 말라고 배웠다. 내가 진 거로 하자."
수많은 무공을 섭렵한 추향과 당백호는 물론이고, 늘 철부지로 보이는 난화봉마저 경지가 꽤 높다. 통천선사 역시 무공을 거의 잃었으나 안목은 그대로여서 소녀의 현명한 결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싸워요. 우리 아가씨가 마음이 고와서 양보해주는 것도 모르고 좋아하기는."
유독 무사 복장을 한 시녀만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너 혹시 얘 좋아해?"
추향은 시녀의 도발을 무시하고 소녀에게 질문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소녀가 태연한 신색으로 대답했다.
"소녀검씩이나 익힌 분이 뭐가 두렵다고 쟤 뒤를 졸졸 따라왔을까?"
"어머, 아가씨. 진짜예요? 아가씨는 약혼자가 있는 몸인데 어떻게 외간 사내한테 마음을 줄 수 있어요?"
"그런 거 아니다."
"그럼 왜 저 남자를 따라 여기까지 온 거예요?"
시녀로 짐작되는 여아가 칼끝을 아가씨한테 돌렸다. 둘의 대화가 재밌어서 추향을 포함한 구경꾼들은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거절하면 어찌 되었을까?"
"기껏해야 싸웠겠죠."
"그럼 여태껏 힘들게 흔적을 지운 보람이 하나도 없겠구나."
그때 추향이 끼어들었다.
"뭐야? 전수자가 살아있는 거야?"
소녀검엔 비밀이 하나 있다. 소녀검을 완전히 익히려면 전수한 자와 싸워 목숨을 취해야 한다.
전승자가 전수자를 죽이지 못하면 계속 전승자로만 남아야 한다.
"소녀검에 관해 아는 게 많구나."
시종 태연자약하던 소녀의 얼굴에 처음 표정이 생겼다.
"아는 게 많지. 누군가가 소녀검을 펼치면 똑같이 소녀검을 익힌 자는 그걸 느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너 진짜 소녀검을 익힌 거 맞아?"
"맞다."
소녀검은 계속 이어졌으나 전수자를 죽일 정도로 제대로 익힌 자가 나타나지 않아 아무도 강호에 나가지 못했다. 촉씨 소녀 역시 전수자를 죽이지 않았기에 강호로 나가는 게 허락되지 않았지만, 몰래 시녀 한 명 데리고 가출한 것이었다.
"안 죽여도 완전히 익힐 수 있어?"
"검법을 익힌 자들이 평생 나태하지 않길 바란 탓에 생긴 악습일 뿐이야. 내가 전수자로 인정받으면 전통을 없앨 거야."
전수자는 전승자에게 죽지 않으려고 평생 검을 놓을 수 없고, 전승자는 전수자를 뛰어넘으려고 평생 노력한다.
남자도 익힐 수 있는 월녀검과 달리 여자한테 훨씬 적합한 소녀검이 강호에 당당히 위명을 떨친 이유다.
"그럼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 가던 길을 가야지."
#
안타깝게도 촉씨 소녀는 가던 길을 못 가게 되었다. 둘의 흔적은 들키지 않았으나, 당백호와 난화봉이 사내들을 마을로 데려다주면서 남긴 흔적 때문에 추격자들이 찾아왔다.
"아가씨. 세상 구경도 많이 했을 테니 이만 집에 가시죠."
흰색과 노란색이 골고루 섞인 수염이 확 눈길을 끄는 풍채 좋은 노인이 공손하게 말했다. 단지 가주의 외동딸이어서가 아니라 소녀검을 높은 수준으로 익혔기에 배분 차이가 큼에도 노인이 오히려 존대했다.
"사정은 서신으로 다 말씀드렸는데, 가주께선 여전히 고집을 부리고 계시는가?"
"아가씨만 사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추향은 슬그머니 시녀한테 다가가 속삭였다.
"딱한 사연이 있는 것 같구나. 전후 사정을 알면 도울지도 모르겠는데."
머리가 단순한 시녀는 추향의 되지도 않는 수작에 바로 넘어왔다.
"놀라지 마세요. 우리 아가씨 스무 살 넘었어요."
"난 서른이야."
시녀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리 엄마랑 동갑이야."
손으로 막은 입에서 흐릿하게 흘러나온 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추향이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이모라고 불러."
시녀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못 이었다. 볼만 좀 더 통통하면 또래로 여겨도 될 얼굴을 보며 이모라는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일단 사정부터 얘기하자."
곧 칼부림이 날 것 같은 상황이라 추향은 시녀를 골리는 걸 그만뒀다.
"우리 아가씨는 열 살도 되기 전에 혼처가 정해졌어요. 그런데 갑자기 약혼자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가문에서 혼약을 취소하지 않고 아가씨를 계속 잡아둔 거예요."
"그런데 왜 가출했지?"
"약혼자를 찾아서 왜 데리러 오지 않았는지 따지려고요."
"약혼자가 어디 있길래?"
"몰라요."
추향은 시녀의 해맑은 얼굴을 보노라니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왜 하필 이런 녀석을 달고 나왔지?'
"아가씨가 몰래 나가는 걸 제가 발견했어요. 그런데 전 소리를 질러 사람을 부르는 대신 아가씨를 따라서 나오기로 했어요. 우리 할머니가 아가씨 유모거든요."
유모인 거랑 따라 나온 거랑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지만, 다소 헐렁한 무사복이 그제야 이해됐다. 준비도 없이 나선 시녀가 아가씨의 옷을 입은 것이었다.
"동생, 어려운 사람 안 도와줘?"
수염이 긴 노인과 촉씨 소녀는 대화 방식을 검으로 바꿨다. 그러나 평소에 어려운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오지랖의 대명사 당백호가 가만히 있었다.
"타인의 가정사에 함부로 간섭하는 게 아니라고 누군가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해줘서 말이지."
"이제야 똥오줌 가리는구나."
어차피 추향은 처음부터 도울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이미 사정도 다 들었기에 늘 익히지 못해 아쉽던 소녀검을 견식 하기로 했다.
'완전한 검법이 아니다.'
벽파검법은 아주 대단히 수준 높은 검법이 아니다. 그러나 무룡, 노계혼, 손청우, 추향 등이 자기 방식대로 익히면서 점점 완성도 높은 검법으로 발전했다.
물론, 그렇다고 벽파검법 자체가 갑자기 강호에 길이 남을 대단한 검법이 되는 건 아니다. 그저 누가 익혀도 일정 수준을 보장하는 안정감 있는 무공이 된 것뿐이다.
그런 면에서 소녀검은 안정감이 전혀 없는 검법이다. 초식 대부분이 벽파검의 동귀어진을 노리는 초식처럼 극단적이어서 검법과 상성이 좋은 수련자가 아니면 성취를 기대하기 힘들다.
'그래도 배울 건 많다.'
뿌리를 서역에 두고 서하국에서 실전 위주로 발전시킨 소녀검은 마찬가지로 실전에서 만든 벽파검법에서 참조할 초식이 넘쳤다.
"제발 우리 아가씨 좀 도와주세요."
"왜?"
"도와주면 크게 사례할게요."
"어떻게? 뭐 귀한 물건이라도 들고나왔어?"
"그게 아니고. 우리 아가씨 약혼자가 부자예요."
"나도 부자야."
추향은 근래에 갑자기 재산이 몇 배로 늘었다.
"세상에서 일등 부자예요."
"누군데?"
시녀는 목을 움츠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그래봤자 여기엔 전음도 훔쳐 듣는 사람이 있어서 별 소용이 없지만 말이다.
"제국 황제예요."
- 작가의말
백호를 먼저 보내버려야겠습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