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검법
여동빈은 수염 세 가닥을 드리운 점잖은 인상이었다. 특이하게 하얀 도포를 입었고 머리에는 상주들이 쓰는 고깔모자처럼 높은 도관을 얹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데 언종술言從術이 안 먹히지?"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자가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언종술. 상대한테 불리한 제안만 아니라면 거부하는 일이 정말 드문 법술이다.
무룡이 여의주를 추영과 아이를 구할 유일한 동아줄로 여기고 있음을 모르는 여동빈에겐 언종술이 거의 안 먹힌 게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나마 마지막에 언종술의 영향을 받아 무룡이 순순히 입을 벌린 탓에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진 않았다.
"도와주십시오."
무룡이 입을 열어 도움을 청하자 여동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 그래도 대춧빛으로 혈기가 넘치는 건강한 얼굴이었는데 이젠 숫제 타는 숯덩이처럼 열기까지 뿜어냈다.
"염치가 있어야지. 하계의 억조창생을 위험에 빠뜨려놓고 도와달라는 말이 나오느냐?"
"약속대로 내 아내와 아이를 구했다면 저도 당신 말에 따랐을 겁니다."
"네가 무슨 수로 여의주를 돌린단 말이냐? 내 검으로 여의주를 부숴야만 원래 상태로 돌릴 수 있다. 내가 진짜로 약속을 이행했다면 여의주를 돌리는 일은 오롯이 네 몫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은 여의주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게 된다."
추영과 아이를 여동빈이 구하면 약속에 따라 여의주를 원래 상태로 돌리는 건 무룡의 몫이 된다. 약속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다른 존재가 여의주를 건드리는 자체가 어렵다.
천환서고에서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아 무룡은 예전이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했을 말을 쉽게 알아들었다.
"그럼 여의주를 내놓는 걸 대가로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네가 여의주를 내게 넘겨야 하는데, 난 그 물건을 만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입장의 차이로 무룡과 여동빈은 손을 절대 잡을 수 없는 사이였다.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너는 여의주의 독으로 곧 죽겠지. 그리고 자하동에 갇혔던 독이 세상에 퍼질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인간을 비롯한 숨을 쉬는 존재만 죽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세상 자체가 혼돈으로 돌아가거나 사라지겠지."
"저를 죽여 세상을 보존하십시오. 대신 제 아내와 아이를 구해주십시오."
무룡의 말에 여동빈이 실소했다.
"네가 죽는 즉시 독이 세상에 퍼진다. 난 네 목숨을 최대한 연장해 선계의 신선 중 아무나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무룡을 덮쳤다.
'난 왜 늘 이 꼴이지?'
뭔가 희망이 생길 때마다 일이 어긋났다. 뭔가 해결될 것 같을 때마다 일이 틀어졌다. 뭔가 확신이 생길 때마다 일이 달라졌다.
"내가 여의주를 없애보겠습니다."
그러나 무룡은 절망하지 못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절망할 자격조차 없었다.
"어떻게?"
여동빈은 비웃는 대신 정색한 얼굴로 질문했다. 하룻강아지의 짖음을 부질없다고 비웃기엔 사안이 너무 중대하다.
"어떻게든요."
"뭘 하고 싶은지 얘기해 보아라."
"자하신공으로 여의주의 기운을 양기로 바꾸겠습니다."
급한 마음에 무룡은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만약 실패한다면 제 정성과 노력을 생각해서라도 아내와 아이를 보호해 주십시오."
어차피 마음을 읽는 상대이기에 굳이 꾸미거나 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직접적으로 밝혔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린 하계의 일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지 못한다."
무룡 대신 여의주만 노린 이유다. 무룡을 죽이는 건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만, 하계의 존재를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그럼 제가 여의주를 이길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이룡을 해치울 확실한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좋다. 약속하지."
무룡은 바닥에 편하게 앉은 다음 자하신공을 운기했다. 자하신공의 운기가 시작되자 마환기공과 벽파공이 알아서 움직였다. 둘의 도움으로 자하신공은 무룡이 이룬 성취나 깨달음을 훨씬 뛰어넘은 경지를 보였다.
"네 하단전은 어디로 간 것이냐?"
여동빈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아까 상스러운 욕을 뱉을 때도 평이한 말투를 유지했는데, 처음으로 억양이 변화를 보였다.
'사고로 사라졌습니다.'
더 빠른 운기를 위해 혀끝을 입천장의 혈도에 붙인 탓에 무룡은 입을 열 수 없었다. 백화쟁염과 벽해청공의 높은 경지를 이룬 데 반해 임독 양맥을 타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단전이 없던 사람 같은데?"
'아닙니다. 타격으로 단전이 파괴되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여동빈이 다시 평이한 말투를 회복했다.
"방금 선계의 벗들과 상의했는데, 널 제대로 돕기로 했다. 부디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말을 마친 여동빈은 허공에 손을 저어 붉은 상자 하나 잡았다. 여동빈은 마치 독사의 머리를 잡은 듯 조심스럽게 움직여 상자를 무룡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태양조太陽鳥의 내단이다. 순양공을 익힌 네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화산파의 자하신공으로 알려진 건 사실 여동빈의 순양공이였다. 그리고 무룡이 익힌 십 단계는 겨우 순양공의 입문에 불과하다.
음기가 일 할을 차지하는 자하신공 구 단계는 순양공에 입문도 못 한 하찮은 경지였다.
화산파로 비유하자면, 정식 심법을 익히지도 못하고 토납법으로 단전을 다듬고 미약한 내공을 쌓는 단계인 셈이다.
'감사합니다.'
"입을 벌려라."
무룡은 혀끝이 입천장과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입을 벌렸다. 동시에 여동빈이 상자를 열었다.
은은한 참나무 향이 나는 상자에서 빨간 구슬이 톡 튀어 무룡의 입으로 들어갔다. 무룡의 입으로 들어간 태양조의 내단은 뜨거운 용암으로 변해 자하신공 십 단계의 운기 행로를 따라 순환했다.
임독 양맥이 순식간에 타통되었다. 기경팔맥에 속하는 임맥과 독맥은 고된 수련과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야 안정적인 흐름이 생긴다. 그러나 용에 필적하는 태양조의 내단 덕분에 깨달음도 고된 수련도 없이 이뤄졌다.
"이제부터 내가 알려주는 주문을 똑같이 외워 끊임없이 반복해야 한다."
여동빈은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새의 지저귐 같기도 한 주문을 무룡에게 알려줬다.
'뭡니까?'
"용의 울음과 봉황의 지저귐이다. 그리고 입을 열어 말해도 된다. 임독 양맥이 타통되어 운기에 지장이 없다."
"무슨 주문입니까?"
"봉인 주문이다. 여의주를 네 단전에 봉인한다. 단전이 자리를 잡았던 곳이기에 여의주의 둥지로 적합하다. 단전이 깨끗이 사라져서 충돌도 전혀 없으니 여의주를 잠재우기에 딱 좋구나."
"봉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봉인에 성공하면 네 목숨도 부지할 수 있고 세상도 평안하겠지. 성공할 가능성이 채 일 푼도 안 되지만 말이다."
무룡은 바로 눈을 감고 여동빈이 알려준 기이한 주문을 따라 했다. 그런 무룡을 지켜보며 여동빈은 손가락을 접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점을 쳤다.
점괘술은 천기를 엿보는 일이어서 반동이 크다. 웬만큼 중대한 일이 아니면 아무리 도행이 높고 기운이 순수한 신선이어도 점괘술을 펼치는 걸 꺼린다.
'잘된 건가?'
여동빈은 편법을 썼다. 무룡이 여의주를 봉인하는 데 성공하는지를 점치는 대신 자신이 약속의 대가를 지급하는지 점쳤다.
점괘의 결과는 여동빈이 공원파空元破를 무룡에게 가르친다고 나왔다. 여동빈이 검신의 칭호를 얻게 만든 오의 중 하나로, 경지는 아니나 파괴력은 최고인 검법이다.
문제는 여의주 봉인에 성공한 대가로 공원파가 너무 약소하다는 것이다. 대가가 약하기에 봉인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확신하기 어렵다.
무룡과 한 약속이 이룡을 없애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기에 공원파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고, 아니면 봉인이 불안한 탓에 공원파가 대가로 적절했을 수도 있다.
'괜히 머리 굴리다가 낭패를 봤구나.'
그러나 여의주 봉인에 관해 점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어서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계의 신선과 온갖 요괴를 통틀어 수위를 다투던 동방삭만 해도 점괘술을 펼친 반동으로 삼천갑자 동안 봉인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어쨌든 봉인이 실패하지 않는다는 뜻이니 다행이군. 그런데 아까 여의주가 갑자기 경로를 바꾼 건 무슨 영문이지?'
자하구는 여동빈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의 검이 여의주를 부수지 못한 이유에 관해 여동빈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여의주를 무룡의 입에서 꺼내려 할 때 방해받은 것도 무룡이 한 짓으로 오해했고, 여의주도 무룡이 자의로 삼켰다고 여겼다.
"무슨 짓이냐?"
무룡이 갑자기 자하신공을 일 단계 운기로 바꿨다.
"이대로는 실패합니다. 절 믿어주십시오."
무룡은 주문을 멈추고 자하신공을 일 단계부터 다시 운기했다. 급히 이뤄 위태로운 경지가 무너지면 내상은 물론이고 주화입마를 입을 것이다.
여의주를 상대할 유일한 무기인 자하신공을 잃으면 끝이라는 생각에 무룡은 주문을 멈추고 자하신공을 일 단계부터 다시 쌓아 올리기로 했다.
일 단계의 운기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느껴질 때 이 단계 운기를 추가했다. 이 단계 운기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히 될 때 삼 단계 운기를 추가했다.
그렇게 겹겹이 쌓아서 십 단계 운기까지 추가하자 무룡의 몸이 하얀빛으로 휩싸였다.
'오성만 뛰어났으면 제자로 삼아도 좋았겠는데.'
가진 그릇은 참 큰 아이인데 머리가 너무 부족하다. 부족한 머리로 큰 그릇을 다 채우려면 수련 시간이 만 년을 단위로 해야 한다.
기나긴 수련 기간에 다른 신선의 질투나 요괴의 장난으로 목숨을 잃거나 수련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십 할이다. 그렇다고 여동빈이 자신의 수련마저 포기하고 무룡을 지킬 수도 없고, 그런다고 쳐도 여동빈보다 강한 신선과 요괴가 많기에 소용이 없다.
'끈기도 있고 마음도 단단하고 그릇도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큰데.'
생각할수록 아쉬움이 컸다. 그러나 제자로 섣불리 받기도 주저된다. 제자로 받으면 둘 사이에 인연의 끈이 생긴다. 무룡이 수련에 실패해 선계로 진입하지 못하면 인연으로 이어진 여동빈마저 피해를 본다.
약하면 죽거나 먹히는 선계에서 불확실한 인연을 만드는 건 패망의 지름길이다. 아쉬움이 크긴 하지만, 여동빈은 무룡을 제자로 받고 싶은 미련을 확실히 떨쳐냈다.
'만약을 대비해 은혜를 베풀자.'
자하신공의 운기가 안정되자 무룡은 다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 반복됨에 따라 여의주는 무룡의 단전이 있던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깊은 잠에 빠졌다.
여동빈의 걱정이 무색하게 여의주는 무룡의 몸안에서 시종 얌전하게 있었고 자하신공의 운기도 방해하지 않고 주문에도 저항하지 않았다.
물론, 아무리 신선이라고 해도 무룡의 속에서 벌어진 일을 여동빈이 알 리 만무했다.
"잘했다. 약속대로 대가를 치르겠다."
여동빈은 무룡에게 공원파를 가르쳤다. 근원을 파괴하는 것으로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하는 무공으로 특정한 초식이 없다.
"이건 첨망尖芒이다. 마음에 드는 무기와 결합하면 위력을 증폭할 수 있다."
여동빈은 꽤 아끼던 법보 하나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편지다. 절검문을 찾아가 보여주면 제자로 받고 네게 알맞은 무공을 가르치고 공원파의 수련도 도울 것이다."
- 작가의말
공원파를 대성하면 검극이나 마교 교주도 단칼에 죽입니다. 단, 우선 공원파를 대성해야 하고 다음엔 상대를 명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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