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견불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독무곡 곡주 독무룡입니다."
"마교 교주 사마영이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마영의 몸이 사라졌다.
'아까 비급을 훔칠 때보다 훨씬 은밀하고 자연스럽다.'
단 한 번 읽어준 거로 벌써 응비도를 실전에 응용하는 사마영의 모습에 무룡은 기가 살짝 죽었다.
그러나 추영과 추향도 그렇고, 심지어 객관적으로 가족 중에 최약체인 당백호도 무공을 이해하는 능력은 무룡보다 나았다.
그렇기에 기가 살짝 죽긴 했지만, 몸도 마음도 전혀 위축하지 않았다.
'계혼도 그렇고. 덕구도 나보다 훨씬 똑똑하지.'
무룡은 무의식에 새긴 방대한 지식으로 자고 깨면 뭔가 달라지고 나아진다. 그 과정에 딱히 한 게 없기에 자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전혀 안 했다.
"허, 대단한 놈이군."
허공에 사마영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퍼졌다. 몸을 숨긴 채 무룡을 기습했는데, 검이 반드시 거쳐야 할 경로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조언 하나 드릴까요?"
"세이경청하겠네."
"괜히 모습을 숨기느라 힘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 보이니까."
사마영이 은신술을 풀고 무룡의 앞에 섰다.
"내 응비도가 아직 부족한가?"
"기운으로 느낀 게 아닙니다."
응비도를 숙련하면 기운을 완전히 멈출 수 있다. 사마영의 경지나 화후 자체는 강호에서 으뜸이라고 볼 수 있기에, 멈춘 기운을 감지할 사람은 천하에 없다고 여겨도 된다.
사마영이 자신의 응비도가 어설퍼서 기운의 미약한 움직임을 무룡이 알아냈다고 추측한 이유다.
"내 경지가 당신보다 높습니다."
손청우는 경지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매화검법이라는 대단한 무공을 만들고 세 개 심법을 연구하여 하나로 섞기도 했다.
이런 자를 무학의 종사라고 칭송한다.
무룡 역시 여러 심법을 하나로 엮었고, 검법은 이미 초식이 의미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머리로 이해하고 하는 게 아니라 그저 절로 이뤄진 것이다.
훌륭한 육체적 자질과 시의적절하게 만난 기연과 고난, 그리고 천환서고에서 커다란 그릇에 온갖 지식을 담은 덕분이다.
더구나 암혈인 독룡담에 어마어마한 독을 품고 있기에 무룡의 몸과 무의식이 늘 긴장하여 강해지려 하기에 경지만큼은 백 살이 훌쩍 넘은 사마영도 무룡에게 미치지 못한다.
아쉬운 점은, 자신이 이룬 경지를 누구한테 설명할 수 없다는 거다.
강호에서 이런 사람을 무재라고 한다. 검극 역시 대단치 않은 검법으로 천하제일로 거론되는 고수가 되었지만, 검극의 제자는 모두 평범한 무인이다.
"그리 보이지 않는구나."
말을 마친 사마영이 정면에서 무룡을 덮쳤다.
감지할 수 없는 상대에겐 모습을 숨겨 언제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지 모르게 하는 게 훨씬 위력적이다.
그러나 무룡처럼 정확히 감지하는 자 상대로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훨씬 낫다.
"피하면 그만입니다."
무룡이 표홀한 신법으로 사마영의 공격을 피했다.
눈으로 보이는 사마영과 감각으로 느껴지는 사마영이 살짝 어긋났다. 둘 중 어느 걸 믿어야 할지 망설여지자 무룡은 검으로 막는 대신 그냥 경공으로 공격권을 벗어났다.
"네 경지가 나보다 높다면 방금 어느 게 진짠지 구분했을 거다."
"아닙니다. 제가 천멸장에 맞아 목숨이 위태했던 적이 있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겁니다."
무룡의 말에 사마영은 얼굴을 찌푸렸다.
상대는 천멸장에 약하다. 그러나 천멸장을 계속 펼치다간 오히려 적응한 상대한테 반격당할 수 있다.
그리고 상대가 천멸장의 약점을 알고 일부러 함정을 판 게 아니라는 확신도 없고.
"심계가 뛰어나구나."
사마영이 무룡을 향해 아주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사람 둘이 있고, 둘 가운데 고기 한 덩이 있습니다. 성인이 지나다가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으며 기뻐했습니다."
무룡 역시 사마영의 속도에 맞춰 뒤로 느리게 물러났다.
"제자가 왜 기뻐하냐고 묻자, 성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둘이 서로 고기를 양보하려고 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으냐.'"
"욕심 많은 부자가 지나다가 두 사내 사이에 고기 한 덩이 있는 걸 보고 가마를 멈추라고 분부했지. 머슴이 갈 길이 급하지 않냐고 묻자 부자는 이렇게 대답했다.'둘이 고기를 두고 다투는 좋은 구경을 이대로 지나칠 수 없지.'"
"아시는군요."
사마영은 심계가 뛰어나다는 평가로 무룡을 흔들려 했다. 외모로 나이를 정확히 판단하긴 어렵지만, 무룡의 나이가 사마영보다 많을 순 없다.
그래서 심계를 칭찬하며 무룡이 심계를 쓰게 만든 다음, 수를 읽어 역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무룡은 오랜 우언을 언급하며 사마영이 심계를 쓰고 있음을 지적했다.
"모르겠어."
사마영이 전진하는 걸음에 미묘한 박자의 변화를 줬다. 그리고 속으로 깜짝 놀랐다.
'날 완전히 읽고 있다.'
무룡의 뒷걸음질도 사마영의 변화에 상응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진짜 나보다 경지가 높은가? 어떻게?'
단전이 뽑히면서 몇 년은 무공을 모르는 범부처럼 살았다. 다행히 와행도를 익혀 무공을 회복했지만, 아까 무룡에게 했던 말 그대로 절반의 위력밖에 안 된다.
그러나 경지 자체는 몇 개나 뛰어올랐다. 내공 없이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알고도 지나치던 걸 깨달으며 얻은 성과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내 경지가 확실히 더 높습니다. 그걸 인정해야 싸움이 성립됩니다."
'심계인가? 아니면 진심인가?'
사마영이 두 번째로 곤혹스러운 건, 무룡의 말이 진심인지 자신을 흔들려는 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상대가 말한 게 진실인지 아닌지 그냥 들으면 알 수 있는데, 무룡의 말은 진심으로 들리면서도 내용이 믿기지 않았다.
'난 이미 흔들렸다.'
무룡의 말이 진짜든 아니든 허세라고 확신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진심인지 의심한 순간부터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사마영은 말려들었다.
'불리한 위치에서 하는 싸움은 오랜만이군.'
덕분에 사마영의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너무 빨리 정점을 찍고 모든 게 무료하던 차에 검극이라는 재롱둥이가 나타나서 심심치 않게 해줬다.
그러나 한계가 명확히 보여 큰 기대가 없었는데, 뜬금없이 독무룡이라는 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투지를 다시 일으켰다.
"와행도는 기운을 느리게 움직이는 방식이고, 응비도는 기운을 완전히 멈추는 방식이다."
마음을 다잡자 사마영의 기세가 부드럽게 변했다.
"와행도를 익히고 응비도에 관해 들은 후, 늘 완緩(느림)이 어떻게 쾌快보다 강하고 멈춤이 어떻게 움직임보다 더 힘을 낼까 궁금했다."
사마영은 목소리를 일부러 굵고 탁하게 내려던 노력도 포기했다.
"그리고 방금 가설 하나 떠올렸다. 순환하는 움직임은 극쾌에 이르렀을 때 느리게 느껴지고, 그 극을 넘을 때 멈춘 거로 느껴진다."
무룡의 발걸음이 어지러워졌다.
"난 이제 일기관통보다 너 높은 경지인 일기만영一氣滿盈으로 천멸장을 펼쳐 네 심장을 공격할 거다."
'와행도는 두 번째고 응비도는 네 번째다. 그리고 칠신도록은 일곱 번째부터 거꾸로 익히는 무공이다.'
무룡과 사마영이 허신도부터 익히지 않은 건 이미 몸에 기운을 품었기 때문이다. 내공심법이 없어서 몸에 기운을 품을 수 없던 옛날엔 외부 기운을 움직이는 허신도와 호세도로 입문한 다음, 경탄도로 그 기운을 몸에 들였다.
다음 응비도로 기운을 뭉쳐 몸에 머물게 하고, 맹룡도로 몸 안에서 순환케 한다.
순환이 꼬리를 물면 기운을 품은 셈이다. 그러나 기운이 늘 빠르게 움직이는 건 몸에 부담을 많이 준다. 그래서 나온 게 와행도다.
기운이 안 움직이면 몸 밖으로 도망가기에 와행도로 기운을 느리게 움직인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느리지만 기운을 조금씩 품을 수 있다.
'일기만영은 응비도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맹룡도로 받아주면 된다.'
무룡은 칠신도록을 알고, 사마영은 와행도와 응비도만 안다. 그 차이가 둘의 생각을 엇갈리게 했다.
사마영은 무룡에게 얘기했던 대로 일기만영으로 몸에 기운을 가득 채워 멈춘 것과 같은 상태로 만든 다음 천멸장을 펼쳐 무룡의 심장을 노렸다.
무룡은 걸음을 멈추고 양팔을 벌려 사마영의 천멸장을 그대로 맞았다.
"뭐냐?"
원하는 대로 됐지만, 사마영은 기분이 너무 안 좋았다.
"마환기공으로 당신의 기운을 분산했습니다."
마환기공에 맹룡도를 얹어서 해낸 일이다. 비록 타인의 기운이지만, 맹룡도는 응비도로 뭉친 기운을 별 어려움 없이 무룡의 몸에서 순환하게 했다.
타인의 기운이어서 몸에 끼치는 해는 자하신공과 결합한 마환기공이 해결했고.
"천멸장은 마환기공보다 상위 무공이다. 천멸장의 성취가 마환기공보다 낮다고 해도 타격이 있을 텐데."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독무곡 곡주 독무룡입니다. 마교 소교주 사마귀歸와는 의형제고, 추영이 제 집사람입니다."
"추영이 살았어?"
무룡은 오른손을 움직여 멸화장의 초식을 펼쳤다. 멸화장은 천멸장을 수련하는 중에 나온 장법으로, 단전의 내공을 일시적으로 흩어버리는 특이한 무공이다.
무룡은 비록 멸화장을 익히지 못했지만, 추향과 당백호가 펼치는 걸 자주 봐서 초식만큼은 정확했다.
"사마월이 살려줬어?"
무슨 사연이 있는지, 사마영은 자신의 쌍둥이 형제가 추영을 죽일 거로 생각했다.
"혈교가 살수를 보내 현재 아이와 함께 세세겁화봉에 기거합니다."
"아이도 있어?"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습니다."
사마영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야 살 것 같구나."
사마영이 탄식했다.
"왜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느냐?"
"마교 교주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결례했습니다."
"심계가 대단하구나."
무룡이 말하지 않았지만, 사마영은 어렵지 않게 무룡의 속셈을 알아챘다.
친분에만 기대기엔 무룡은 사마영을 너무 모른다. 그래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준 다음 소교주와 추영을 언급했다. 무룡의 실력을 보았기에 사마영은 굳이 무룡이 꾀를 부려 자신을 속인다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고, 무룡 역시 사마영이 거짓으로 자신을 믿는 척하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추영과 사마귀를 언급했으면 두 사람 사이에 이런 신뢰감이 생기지 않았을 거다.
"길이 완전히 열리려면 며칠 있어야 하니, 그새 와행도를 알려주마."
와행도의 구결이 사마영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타고 무룡의 귀에 꽂혔다.
- 작가의말
佛眼見佛 -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인다.
현재 이 글의 셰계관엔 소림이 없고 불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멧돼지 눈엔 멧돼지만 보인다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각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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