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선과
"사형,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뭘 이런 걸 다."
입으로는 사양하나 손은 지체 없이 마중 나온다.
무룡은 상대의 시선이 온통 황금으로 빚은 패물에 가 있는 사이 대담하게 가루를 뿌렸다. 무룡의 손가락 사이에서 흘러나간 가루는 푸른 찻물이 찰랑대는 찻잔 안에 정확히 떨어졌다.
"그런데 이 차는 어디서 구한 겁니까? 향이 정말 좋습니다."
말을 마친 무룡이 찻잔을 들고 뜨거운 찻물을 훌훌 불며 천천히 음미했다. 대제자 역시 웃는 얼굴로 자기 앞 찻잔을 들었다.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사형의 오해를 샀네요. 이후 자주 이런 자리를 마련해 사형에게 제 마음을 표현하겠습니다."
대제자가 고개를 꺾으며 찻잔으로 웃는 얼굴을 가린다. 역시 황금의 위력은 대단하다.
"내가 오늘은 좀 피곤하구나. 그만 가 보아라."
"문단속 잘하십시오. 황금은 도둑을 부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무룡이 채 나가기도 전에 대제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처음 독을 쓰는 거여서 양 조절을 제대로 못 한 탓에 예상보다 빨리 독이 발작했다.
다행히 미리 대비했다. 무룡은 피를 토한 채 숨을 헐떡이는 대제자를 침대에 눕힌 다음 창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떠나기 전에 침대 밑에 숨긴 칠홍지주가 잘 있는지 슬쩍 확인까지 하고 거미줄로 빗장을 붙여 고정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무룡이 떠나고 약 두 시진이 흐르면 거미줄이 탄력을 잃는다. 그렇게 되면 빗장이 떨어지며 문이 안에서 잠길 것이다.
밖에서 내공으로 빗장을 지를 정도의 고수는 독무곡에 가류밖에 없다. 타인에 무관심한 가류는 무룡이 단전이 없는 걸 모르지만, 내공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완벽한 밀실 살인이 되고 무룡은 용의 선상에서 빠진다. 만약 혐의를 받으면 아깝지만 대제자가 침대 밑에 숨긴 약초와 독초를 포기하고 칠홍지주를 보여주면 된다.
만일을 대비해 칠홍지주가 싫어하는 가루를 몸에 잔뜩 뿌리고 잠들었다.
"놈!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가류가 갑자기 나타나 다짜고짜로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에 다리 하나를 잃은 무룡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사형, 괜찮습니까?"
고개를 드니 아직 동녘이 시커먼 것이 새벽도 오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다.
'맞아. 독초 캐러 나왔지.'
험한 벼랑에서 자라는 독초를 캐려고 경공은 물론 체력이 뛰어나고 집중력도 좋은 제자들만 엄선해서 나왔다.
무룡은 어제 필요한 독초를 세 개나 캐서 가류의 칭찬을 받았다.
"제길. 꿈에 사부 채찍에 맞았는데 진짜 맞을 때보다 더 아프더라."
무룡의 비명에 깬 제자들이 킥킥거렸다. 웬만한 고수도 열 대 버티기 힘든 채찍질을 백 대까지 버티고 기절한 무룡이고, 기절에서 깬 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게 걸어 다닌 무룡이다.
그런데 고작 꿈에서 채찍을 맞았다고 땀을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안 웃을 수 없었다.
다른 제자들은 다시 자리에 눕고 무룡은 밖으로 나와 땀을 식혔다.
노혼이 늘 무룡의 심약함을 걱정했듯이, 무룡은 누군가를 해치는 데 천성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악인은 당연히 벌해야 하고 용서 못 할 놈은 죽여 마땅하다고 여기지만, 본인이 직접 할 의지는 없다.
그래선지 대제자를 독으로 죽인 일이 계속 마음에 남아 시시때때로 무룡을 괴롭혔다.
'멍청한 새끼. 추영이 지금 어떤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무룡은 노혼과 추영을 떠올리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착한 사람 하나 살리기 위해 악인 백 명을 죽여야 한다면 난 그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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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께선 약초 장만하러 나가셨습니다."
"그럼 대제자라도."
"사형도 사부를 따라 나갔습니다."
"책임지고 대화할 만한 사람이 누군가?"
후문영의 질문에 흘궁이 허리를 굽혀 대답했다.
"접니다. 창고를 관리하고 사부와 대제자가 없을 때 곡주 대행을 맡습니다."
독무곡뿐이 아니라 마교에서도 창고를 관리하는 직책은 꽤 높은 축에 든다.
"혹시 무룡이라고 아는가?"
"흔한 이름 아닙니까? 독무곡에서 무로 시작하는 이름은 아주 흔합니다."
어디 막 굴러다니던 인생들이라 가짜 이름을 대기 일쑤고, 그래서 이름이 무로 시작하는 제자가 진짜 많다.
"키가 이만하고 단전이 상했을 걸세. 삼 년 전쯤인가 단전을 치료하라고 여기 보냈는데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는가?"
"죽었습니다."
"아니. 방금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소?"
남궁가의 무인이 따졌다.
"단전이 상한 환자는 독무곡의 역사에 한 명밖에 없습니다. 사부께서 어떻게든 단전을 살리겠다고 무리하여 약을 쓰다가 죽었습니다."
후문영은 비록 교주와 자세한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교주의 속셈을 제대로 헤아렸다.
용혈이 공식적으로 사라진 중원에 누구도 몰랐던 용혈은 벽력탄 같은 존재다.
물밑은 몰라도 수면 위는 잔잔한 중원인데 용혈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들끓을 것이다. 뭘 해야 하는지 확실해지면 힘을 갖추거나 야심이 큰 자들이 바로 움직일 것이고, 그 흐름에 쓸려 중원 전체가 요동치게 된다.
용혈로 중원이 어지러워지면 마교가 반사 이익을 얻는다. 수십 년 전부터 고안한 무기를 완성해 괴물을 물리치면 예전의 성세를 회복할지도 모른다.
마교가 용혈을 품으면 중원 무림과 관과 군이 힘을 합쳐 달려올 것이기에 오히려 내치는 게 상책이다.
"사부께서 위험한 치료법을 제안했고 환자가 동의했습니다. 환자의 시체를 제가 직접 치웠기에 확실히 압니다."
흘궁은 후문영의 말을 듣고 바로 무룡 얘기라는 걸 알았다. 키만 보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있는데 단전이 상한 사람은 무룡밖에 없다.
그간 무룡이 자주 마교의 동정을 살피라고 했기에 뭔가 있음을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장로 중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후문영이 생뚱맞게 남궁가의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꼬치꼬치 캐묻자 거짓말을 술술 꾸며냈다.
"어디에 묻었는가?"
"치웠다고 했지 묻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약과 독을 함께 써서 지금쯤은 뼈도 온전치 않을 겁니다. 환자의 의지가 확고했기에 사부 탓도 아닙니다. 그 환자가 어떤 분인지 모르지만, 독무곡 탓을 하려면 미리 신분을 알려주지 않은 마교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독무곡은 마교 소속이 아니지만 마교에 아주 중요한 곳이다. 가류는 사람이 괴팍해도 자기 제자만 패고 독무곡 소속이 아닌 사람한테는 채찍 한 번 휘두른 적 없다.
오히려 상처를 치료해주고 병도 봐주기에 일반 교도들한텐 신망이 두터운 편이다.
그런 곳의 삼인자인 창고지기의 말은 꽤 무게가 있다.
"다른 사람한테 탐문해도 되겠소? 그대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우리가 찾는 분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소. 다른 사람은 어쩌면 우리가 진짜 찾으려는 사람을 알지도 모르오."
그러나 남궁가의 고수들한텐 아니었다.
"야, 너 여기 와봐."
흘궁은 지나가는 사람을 불렀다.
"여기 마교에서 온 장로님과 중원의 남궁세가에서 온 분들이 무룡이라는 작자를 찾는다고 하신다. 아는 게 있으면 얘기해라."
"독무곡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아까 무룡이라는 이름이 흔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 이름이 있었는데 다 죽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 없습니다."
"키가 이만하고 덩치도 큰 사람이오. 단전 위치에 큰 흉터가 있을 거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습니다. 독무곡 사람이라면 창고지기인 흘궁 사형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내가 주검을 직접 치웠다는 데도 믿지 않으니 뭐 어쩌겠나."
그 뒤로도 지나다니는 사람 몇 명을 잡고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나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사람이나 죽었다고 하는 사람뿐이었다.
"여긴 사흘이 멀다고 주검이 실려 나가는 곳입니다. 환자의 주검이 아니라 독무곡 사람의 주검 말입니다. 일 년 사이에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수백 명이고 죽어서 사라지거나 도망치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남궁가 고수들은 역시 마교라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저는 여기서 십 년 이상 버텼습니다. 제가 전혀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없는 겁니다."
"곡주는 언제 돌아오시나?"
"사부한테 직접 물으시려고요? 후 장로는 독무곡과 척을 지려는 겁니까?"
"내가 그럴 리 있는가? 내가 곡주와 얼마나 친한지 자네도 알지 않은가?"
"사부께선 그때 환자의 애원을 못 이겨 불확실한 치료법을 사용한 걸 치욕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후 장로께서 캐물으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자괴감이 너무 심한 반동으로 가류는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다.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지. 괴물을 죽일 무기에 가류의 지식이 꼭 필요하니까.'
"정의연에서 오신 협객들은 만족하시오? 어쩌면 당신들이 찾는 사람은 마교에 온 적도 없을지 모르오. 그리고 우리가 데리고 있으면 안 될 신분인 걸 그대들도 잘 알지 않소? 그래서 이렇게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찾아온 것 아니오?"
'과연. 사형은 범상한 분이 아니셨어.'
독무곡 사람들은 가류보다 무룡을 더 따른다. 약초 사업으로 재정을 풍성하게 한 덕은 독무곡 전체가 보았다. 그리고 약초와 독초 재배를 시작하며 일꾼들에게 삯도 올려줬다.
하물며 재료 수집이 막바지에 이른 가류가 자주 독무곡을 비우는 것도 왠지 무룡의 덕인 것 같았다.
웬만한 일은 무룡이 벌을 자처한 덕에 주검이 되어 실려 나가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비록 무룡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지만, 말만 들어도 이들이 찾는 자가 현재 대제자임을 알았다. 대답은 모두 달랐지만, 무룡의 존재를 숨기려는 마음은 모두가 똑같았다.
어떤 의도였든 무룡이 그간 선행을 베풀며 쌓은 인덕이 큰 위기 하나를 벗어나게 해줬다.
그렇게 이번 일이 끝나나 싶었는데, 한 달 뒤에 정의연이 마교에 용혈이 있다며 침공해 왔다.
"부상자를 치료할 의원을 독무곡에 요청해."
교주가 파견한 전령이 독무곡을 찾았다.
- 작가의말
무식한 놈들이 억지를 부리면 말이 안 통하죠. 이렇게 무룡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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