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마대전
후문영은 추영이 낳은 아이가 용혈일 가능성이 있다고 교주에게 보고했다.
"외통수구나."
교주가 한탄했다.
"그런데 아이는 어떻게 그놈들 눈에 띄었다지?"
"어떤 발정 난 놈이 성녀를 모시는 시녀 뒤를 따라간 것 같습니다. 괜히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려고 순찰과 보초를 다 치운 게 패착이었습니다."
마교는 천하에 관심이 없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 모두 마교에 불리하다.
우선 천시를 따지면 불과 몇 년 전에 괴물과 싸우며 수십만 명의 교도를 잃었다. 이는 단지 수백만 명 중 일 할이 조금 넘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죽으며 마교는 예정보다 빠른 세대교체가 강제로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 커다란 진통을 겪고 있다.
그리고 대략 십 년 뒤에 괴물과 또 한 번 사투를 벌여야 한다. 괴물을 완전히 치워서 세력권의 안정을 확보하지 않으면 천하가 아니라 교의 안위부터 걱정해야 한다.
지리 역시 불리했다.
묵자의 사상을 추앙하는 무리가 주축이 되고 유가와 법가의 핍박에도 용케 살아남은 유파들이 합류해 만든 묵교다.
그러나 서역의 종교와 결합하여 점차 변화하다가 이젠 자신들도 마교라고 부르며 완전한 종교 단체가 되었다.
종교 색채가 짙기에 세세겁화봉을 떠날 수 없다.
물자의 유동과 소비를 강제하기 위해 가장 한가한 시기를 골라 순례일로 정했다. 수백만 교도는 진짜 사정이 딱한 자를 제외하면 순례일을 좌우하여 세세겁화봉에 와서 예배를 올려야 한다.
침공에 성공해 중원을 차지한다고 치더라도 수도를 장안으로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교도들부터 반기를 들 것이다.
세세겁화봉을 수도로 한다면 중원을 통치할 힘이 사라진다.
천시와 지리 모두 마교에게 웃어주지 않는데, 인화마저 안 좋다.
십만에 가까운 충직한 무사와 교주의 말 한마디에 목숨도 던지는 수백만 교도. 얼핏 보면 이보다 인화가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하필 중원에 정의연이라는 거대한 연합체가 형성되었다. 마교가 용혈을 품고 천하를 도모하려 한다면 가장 큰 방해물이 될 것이다.
인화란 아군만 강하면 되는 게 아니다. 강한 아군과 멍청하거나 약한 적이 맞물려야 비로소 인화는 완성된다.
그런 면에서 정의연의 갑작스러운 결성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마교의 중원 침공 욕구를 아예 씨도 안 남을 정도로 말려버렸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마교는 품은 용혈을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다.
"성녀의 자식을 넘기면 교도들이 가만있지 않겠지?"
비밀이란 자신을 빼고 아는 사람이 없는 일을 말한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처리해도 성녀와 관련한 일은 비밀을 유지하기 몹시 어렵다.
성녀의 자식을 정의연에 넘긴다면 전쟁을 피할 수 있지만, 대신 마교는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 더 큰 곤욕을 치러야 한다.
생명을 제물로 바쳐 백 년 동안 마교의 안위를 지켜온 가문에 대한 교도들의 존경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출직인 교주보다 성혈 가문으로 불리는 추씨의 덕망이 훨씬 높다.
불과 몇 년 전에 백만에 달하는 무사와 교도가 자발적으로 성혈 가문의 마지막 불씨를 지킨다며 괴물이 뿜은 독 안개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성녀의 자식을 유가를 신봉하는 중원의 무리에 넘긴다고 하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없다.
"문영아. 어떨 것 같으냐?"
극도로 생략된 질문이지만, 후문영은 바로 대답했다.
"저들은 원정의 피로가 있습니다. 지형도 우리가 훨씬 익숙합니다. 그리고 중원의 무인보다 우리가 대규모 전투 경험이 많습니다."
"이기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어떤 피해가 예상되느냐?"
"괴물과 싸울 준비에 차질이 빚어질 것 같습니다."
한편.
시녀로부터 무룡의 죽음을 전해 들은 추영이 이를 갈았다.
'멍청한 자식. 낭군이라고 오냐오냐해줬더니 감히 죽어?'
속으로 욕을 잔뜩 퍼부은 추영이 수발을 드는 시녀들에게 호통쳤다.
"왜 밥은 아직도 안 와!"
"곧 올리겠습니다."
시녀가 올린 밥을 후딱 해치운 추영이 한 상 더 차리라고 시켰다.
'멍청이가 죽은 바람에 아이를 지킬 사람은 나밖에 안 남았다. 정신 차리자.'
종일 면면불식으로 쌓은 내공을 암혈暗穴로 숨긴 추영은 피곤하다며 시녀들을 내쫓고 침대에 누웠다.
눈에서 뜨거운 물이 나와 베개를 적셨다.
'나쁜 자식. 멍청한 자식. 날 지켜준다며. 날 구해준다며.'
한참 눈물을 흘린 추영은 벌떡 일어나 아기한테 갔다. 그리고 세심한 손놀림으로 아기의 단전을 추궁과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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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류는 벌써 보름째 채찍을 들지 않았다. 원하던 약재를 모두 모아 기분이 좋은 것도 있고, 약을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화를 낼 정신도 없었다.
약을 만드는 건 가류와 무룡 둘이서 했다. 손이 정교하고 기억력도 뛰어나며 시키는 일에 실수한 적 없는 무룡 외엔 신임할 만한 제자가 없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무룡이 하는 일도 그냥 허드렛일이다. 약초가 잘 우러나게 막대기로 저어주는 일, 말린 독초를 가루 내는 일, 가공이 끝난 재료를 밀봉한 후 글자를 적어 보관하는 일.
그럼에도 흥분으로 중얼거리는 가류 덕분에 배우는 게 많았다.
가류가 친절하게 손을 맞잡고 하나하나 가르치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을 지킨답시고 의술의 기본이 되는 것들은 다 알려줬다.
책과 얼마 안 되는 경험으로 지엽적인 부분에서 헤매던 무룡은 가류가 틀을 잡아준 덕에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책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정의연과 마교의 전쟁, 즉 정마대전이 터졌다.
가류가 성질이 괴팍하다고는 하지만, 마교 교주가 직접 내린 명령을 거부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매불망 그리던 약의 조제를 미루고 전쟁터로 나가서 부상자를 치료해야 하는 가류의 마음은 정말 이루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짜증이 났다.
"제자에게 꾀가 하나 있습니다."
손속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은 채찍질에 무룡의 옷은 넝마가 아우 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다. 다행히 그간 독을 다양하게 섭취하며 마환기공의 성취가 높아진 덕에 꿋꿋이 잘 버텨냈다.
"말해라."
"사부께서 제게 전쟁터에서 유용한 의술을 가르치시면 제가 사부 대신 환자를 보겠습니다."
"교주의 명이다."
"그렇다면 사부께서 약의 조제 방법을 저한테 알려주십시오. 어려운 건 사부께서 짬을 내 직접 하시고, 저는 쉽게 구하는 약초만 다루면 되지 않겠습니까?"
가류는 귀가 번쩍 뜨였다.
구하기 쉬운 약초를 무룡이 잘못 처리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하면 된다. 시도해도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다.
"당분간 날 따라다녀라. 가르칠 게 많다."
그렇게 무룡은 가류를 따라 전장으로 나가 부상자를 치료하는 동시에 침술은 물론 약과 독을 쓰는 방법도 배웠다.
어렵거나 중요한 건 가류가 직접 할 생각이기에 자신이 자리를 비울 때 중요한 환자가 나타나더라도 대처할 수 있게 무룡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마환기공은 수비만 된다. 내 공격 수단은 독이다.'
무공을 익힐 때도 구결을 듣고 받은 첫인상이 중요하다. 그 인상으로 같은 무공을 수련해도 각자 다른 경향을 보인다.
무룡의 첫 살인은 독으로 했다. 그 기억으로 무룡은 암기 대신 독을 선택했다. 암기보다 훨씬 다루기 힘들고 구하기도 어려운 독이지만, 자꾸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추영을 빨리 구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고 독을 자신의 무기로 사용한다는 명확한 목적의식도 있다. 덕분에 무룡은 타고난 자질을 훨씬 뛰어넘은 습득 재능을 보여줬다.
"참 빨리 배우는구나."
칭찬에 인색한 가류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사부께서 시키는 대로 하니까 술술 풀려서 어안이 벙벙합니다."
가류는 어려서부터 큰 아픔을 품고 자랐다.
가류의 부모는 그래도 양심이 없지 않아 기형으로 태어난 자식을 몇 년 품고 키우고서야 독무곡에 버렸다.
가류라는 이름도 그때 독무곡에 있던 자들이 지어준 것이다.
가류는 어려서부터 곡주와 사형들의 실험 대상이 되었다. 새로 발견한 독이나 효과가 검증되지 않은 약은 우선 가류의 입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 심후한 내공을 얻었으나 신체의 제한으로 무공을 익힐 수 없었다. 가류가 굳이 다루기도 힘든 긴 채찍을 무기로 선택한 것은 정교한 몸놀림이 어려워 손목에 주로 의지하는 채찍이 오히려 편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글자도 많이 익혔다. 가장 먼저 버려지는 사람이 안 되려고 필사적으로 배우고 익히다 보니 어느새 곡주가 되었다.
곡주가 된 다음에도 혹을 없애고 선천적으로 저는 다리를 고치려고 노력하다 보니 신묘한 의술이 소문나면서 마교가 동맹을 제안할 정도까지 됐다.
그렇게 앞만 보고 수십 년 달리며 칭찬을 들어본 기억이 드물었다.
의술이 고명하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자는 많았다. 그러나 무룡처럼 진심으로 느껴진 사람은 둘뿐이다.
마교 교주와 후문영. 이 둘은 가류의 외모를 전혀 신경 안 쓰고 재능만 봤다. 가류가 둘의 부탁을 잘 거절 못 하는 이유였다.
"오늘부터 내 약제실에 출입해도 된다."
가류의 약제실에는 서재의 것보다 훨씬 귀한 책이 많다. 물론, 틀린 내용이 적힌 책도 있어 분별력이 부족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틀린 내용마저 참고할 가치가 커서 귀하게 모셔둘 정도로 대단한 서책들이 가득하다.
무룡은 가류가 건네는 약제실 열쇠를 받아 소매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열심히 배워서 사부께 작은 도움이라도 되겠습니다."
가류와 작별한 무룡은 독무곡으로 말을 달렸다. 경공을 펼칠 수 있다면 험한 산을 타는 게 낫지만, 내공을 못 움직이는 무룡에겐 좀 돌아가더라도 길을 따라 말을 달리는 게 훨씬 빨랐다.
'아버지, 미안합니다.'
무룡은 가류를 대할 때 늘 자신을 속인다. 눈앞의 사람이 가류가 아닌 노혼이라고 자신을 속여 진심으로 대하려고 애썼다.
덕분에 사람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가류마저 무룡을 친근하게 생각할 정도다.
'정말 미안합니다.'
비록 노혼도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가류와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곧고 바른 사람이다. 무룡은 가류를 노혼으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목적대로 가류의 신임을 얻어 점점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만, 마음의 거리는 오히려 처음보다 훨씬 멀어졌다.
- 작가의말
황실을 전복하고 천하를 통일하려 하거나 중원 무림을 증오하며 끊임없이 피의 전쟁을 일으키는 마교가 아닙니다. 그저 먹고 살고 더 번영하기 위해 갖춰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정이 거친 종교 단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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