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타산
천멸장에 맞은 무룡은 먼저 시각을 잃었다.
"너 사마월司馬月이지?"
검극이 한 질문에 교주가 대답하는 걸 듣기도 전에 청각을 잃었고, 이어서 후각이 사라졌다. 가장 마지막에 촉감까지 사라지며 모든 감각을 상실했다.
'순진했구나.'
후회가 막심했다.
마교 교주는 아마 검극을 처단하고도 괴물을 없앨 여력이 있었다. 처음에 고산진호의 초식을 펼칠 때 반 각이나 준비한 것도 당연히 꾸며낸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검극을 기습할 생각으로 한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심계가 깊은 인간답게 일말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 행동일 것이다.
검극 역시 교주의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교와 괴물에 얽힌 사연을 아는 자라면 괴물을 완전히 없앨 기회에 마교 교주가 딴생각을 하리라곤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서문문검이었어.'
서문문검이 전음으로 마교 교주를 함께 처리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고, 마교 교주의 기습에 대비하라고 얘기해줬는지도 모른다.
'여동빈은 날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괴물을 없애는 일엔 무룡과 서문문검은 같은 편이다. 그러나 서문문검은 괴물뿐이 아니라 두고두고 후환이 될 여의주를 없앨 목적도 있었고, 현재 여의주를 품은 사람은 무룡이다.
'왜 거기까지 생각이 못 미쳤지?'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 없었고 괴물을 없애 추영과 아이를 구할 생각으로만 절박했다. 편향된 목적으로 시야가 좁아지며 잘못된 판단으로 자신의 목숨을 위태롭게 했다.
무룡의 추측은 대체로 정확했다.
교주는 일부러 초식을 어렵게 펼치며 가능성을 만들었고, 괴물의 심장이 반밖에 안 남자 검극을 처단한 생각을 떠올렸다.
서로 제대로 된 공격에 성공할 수 없어서 결판이 안 난 것이지, 상대를 해치울 수단이 없는 건 아니다. 이처럼 좋은 기회가 또 오지 않을 것이기에 고산진호를 준비하는 척하며 천멸장을 펼쳤다.
검극은 서문문검의 전음을 받고 교주를 경계했다. 설마 이 중요한 순간에 자신을 기습할 리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컸지만, 그래도 서문문검의 조언을 아예 무시하진 않았다.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단단하지 못해 기습이 들어왔을 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화접목으로 무룡과 위치를 바꿨고, 공격도 급하게 펼치느라 교주의 목숨을 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문문검에 대한 예상은 맞는 부분도 있고 틀린 부분도 있었다.
서문문검은 확실히 무룡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무룡과 괴물은 동시에 죽어야 한다. 무룡이 먼저 죽으면 괴물이 여의주를 얻는다. 괴물이 먼저 죽으면 무룡이 여의주의 짝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여동빈의 무리가 절대 반기지 않는 일이다.
혹여 무룡이 아닌 다른 존재가 여의주의 짝이 되더라도 문제다. 그땐 무룡을 죽여도 여의주가 사라지지 않는다.
절검문은 여의주의 행방을 다시 찾아야 하고, 새로 생긴 여의주의 짝이 누군지도 알아내야 한다.
그래서 무룡의 판단과 달리 서문문검은 무룡의 입에 속명단續命丹을 넣어주며 목숨을 붙여두려고 애썼다.
"절검문주!"
가슴에 꽂힌 검을 뽑고 도망치는 마교 교주를 쫓으며 검극이 크게 외쳤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서문문검은 교주가 아닌 무룡을 살리는 데만 관심을 집중했다.
이를 살짝 악문 검극은 교주의 피가 여전히 흐르는 검을 들고 정신을 집중했다. 반드시 성공할 자신은 없지만, 교주를 죽이려면 심검밖에 없다.
파르르 떨리던 검 끝이 안정되자 검이 비행을 시작했다. 빠르게 난 검은 바로 교주를 따라잡고 그림자를 키웠다.
그때. 시커먼 갑옷을 입은 덩치가 커다란 자가 교주와 검 사이에 끼어들었다. 천룡갑天龍鉀을 입은 마교 대장로였다.
검극의 심검은 천룡갑을 입은 대장로의 몸을 터뜨렸다. 그러나 천룡갑은 무사했고, 천룡갑을 박찬 교주는 어느새 자취를 감춰버렸다.
"암영칠분暗影七分!"
갑자기 일곱 개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나 무룡을 공격했다. 만약 무룡이 감각을 회복했다면 한눈에 곰 사내를 알아봤을 테지만, 서문문검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 기습한 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검화분분劍花紛紛."
급한 나머지 서문문검도 초식 이름을 외쳤다. 날이 절반 사라진 검이 반투명한 꽃송이를 가득 피워 일곱 개 그림자를 공격했다.
일곱 그림자는 손에 비수 하나씩 들었다. 그러나 비수를 잡은 모양이 모두 달랐다.
그림자가 아홉 개가 되어 암영구분이 되면 천하에 못 죽일 자가 없다고 전해지는 자객들의 최강 초식이었다. 다행히 곰 사내가 비수 일곱 개를 다루는 경지밖에 못 이뤘기에 무룡은 서문문검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했다.
"절검문주. 여의주는 이미 깨졌소."
기습에 실패한 곰 사내가 대화를 시도했다.
"검극, 여력이 있어?"
서문문검의 말에 검극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자와 저기 소교주를 잠시 맡아."
곧 검을 타고 온 검극이 곰 사내와 마주 선 채 검으로 소교주를 가리켰다. 곰 사내는 물론 소교주도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검극이 주는 압박에 힘겹게 저항했다.
둘 중 하나라도 목숨을 버릴 각오로 움직이면 남은 한 사람이 서문문검을 방해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초면이고 소교주는 무룡을 지키려 하고 곰 사내는 무룡을 죽이려 하기에 목적도 다르다.
그래서 서문문검이 무룡을 메고 괴물 가까이 다가갈 때까지 둘 다 움직이지 못했다.
"선배, 이만 나오십시오."
무룡을 괴물의 입에 던진 서문문검이 말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실을 화려하게 수 놓은 검은 도포를 입은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북천검?"
모습을 드러낸 자는 북천검北川劍으로 불리는 은거 검객이었다. 그리고 검극은 모르지만, 최근 호익을 반납하고 다시 검을 받은 절검문의 대호법이기도 하다.
"천하의 검극이 내 명호를 알다니, 영광이오."
배분도 나이도 북천검이 확실히 높았지만, 검극에게 하대하지 못했다. 검극이 후배들에겐 상냥해도 선배들에겐 막 대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무슨 꿍꿍이지? 날 갖고 논 건가?"
"아니다."
서문문검이 딱 잘라 대답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청년은 괴물이 원하는 여의주를 품었다. 괴물은 여의주를 먹으려고 이 청년을 쫓았고, 이 청년을 먹었다면 독룡이 되어 세상을 먹어 치웠을 거다."
"지금 네가 먹이고 있잖아."
"괴물만 죽이고 여의주가 남으면 새 괴물이 생긴다. 괴물과 이 청년이 동시에 죽어야 세상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너도 여력이 없다. 그리고 저자는 괴물에게 여의주를 먹여 세상이 혼란에 빠졌으면 하는 세력에 속했다. 저들은 어리석게도 세상이 혼란한 틈에 다른 세상으로 도망갈 수 있다고 믿고 있지."
"결론만 말해."
검극은 마음이 상해 길게 들어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 청년과 괴물을 동시에 해치운다. 그런데 지금 괴물에게 타격을 입힐 사람이 북천검 선배밖에 없다."
서문문검은 괴물이 죽을 때 무룡도 동시에 해치우려고 북천검을 청했다. 물론, 무룡의 마환기공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내린 패착이었다.
원래대로 진행되어 모두가 합심하여 괴물을 해치웠다면 북천검은 무룡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보살핀 게야.'
마교 교주의 천멸장에도 목숨을 부지한 무룡을 확인한 서문문검은 자신이 가는 길에 하늘의 뜻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면 원래 실패했을 계획을 더 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바꿔줬을 리 없다.
천멸장을 맞은 무룡은 북천검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해졌다.
그때 듣기만 하던 곰 사내가 움직였다. 검극이 반사적으로 반응하여 검으로 곰 사내의 목을 잘랐다.
동시에 소교주가 움직였다.
열화살烈火殺로 서문문검을 공격하는 동시에 허리에서 연검을 뽑아 괴물의 입안에 들어간 무룡의 팔을 감으려 했다.
어차피 괴물은 죽을 목숨이기에 곰 사내는 자기 목숨을 바쳐 무룡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다. 여의주라도 살려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에 이를 악물고 목숨을 버렸다.
소교주는 내막을 전혀 모르지만, 의형제를 구할 유일한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세상이 어쩌고 하는 일은 일단 무룡을 구한 다음에 확인해도 된다고 여겼다.
서문문검의 검이 허공에 한 폭의 아름다운 비단을 그렸다. 소교주가 펼친 열화살의 기운이 비단에 막혔다.
동시에 검극이 곰 사내의 몸에 있던 일곱 개 비수를 검으로 쳐서 날렸다. 비수의 방해를 받은 연검이 무룡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그새 괴물이 긴 혀로 무룡을 감아 목구멍으로 넘겼다.
"검기도인劍氣導引."
장법으로 소교주를 때려 뒤로 물린 서문문검이 검을 휘둘러 무룡을 움직였다. 모든 감각을 잃은 무룡은 서문문검이 휘두르는 검기에 휘말려 괴물의 심장에 접근했다.
두꺼운 살과 단단한 비늘을 사이에 두고 검으로 괴물 몸속의 무룡을 가볍게 움직이는 서문문검의 모습에 검극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발로 구궁을 밟고 검으로 팔괘의 진 방위를 공격하면 둘을 동시에 찌를 수 있습니다."
북천검이 고개를 끄덕인 후 발을 복잡하게 놀리며 구궁을 밟았다. 동시에 양의검을 펼쳐 팔괘의 진에 해당하는 방위를 강하게 찔렀다.
북천검은 북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줄곧 기거한 자로 강호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북천이 원래 궁벽한 곳이기도 하고, 북천검이 수련에만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검극 정도가 되면 이런 은거 고수의 소문이 절로 귀에 들어오지만, 강호의 대부분 사람에겐 무명소졸이다.
"강호는 진짜 와호장룡이군."
그런 북천검에게 감탄하며 모습을 드러낸 청년이 있었다. 다름 아닌 벽력문 문주 화뇌의 넷째 아들로, 무룡과 친분이 깊다.
"조심!"
서문문검의 외침은 조금 늦었다.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던진 벽력주가 벼락을 뿜어내며 북천검의 검을 강하게 타격했다.
방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북천검은 폭풍에 휘말린 버들가지처럼 마구 흔들리는 검을 제때 제어하지 못했다.
북천검이 쏜 양의검의 두 갈래 검기가 괴물의 심장을 타격했다. 그러나 정통으로 맞히지 못한 탓에 무룡은 무사했다.
일곱 심장을 모두 잃은 이룡의 몸이 급작스럽게 움츠러들었다.
"문주는 나와 같은 생각인 거로 아는데?"
"귀찮아서 알겠다고 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문주와 제자 생각이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 네 철없는 행동으로 천하의 억조창생이 소멸할지도 모른다."
"절검문주께선 모든 일에 하늘의 뜻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늘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여기는군요. 후배가 버릇없이 한 마디 충언을 올리겠습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어려서부터 검총아로 불리면서 특별한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바람에 서문문검은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대놓고 지적받자 칼로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다들 이만 돌아가십시오. 무룡 형제는 벽력문이 접수합니다."
- 작가의말
절검문은 괴물뿐이 아닌 무룡도 죽이는 게 목표입니다. 교주는 괴물과 검극, 검극은 괴물, 무룡도 괴물.
이러한 입장 차이가 사태를 이 지경으로 몰았습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