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연합
남궁세가 항주 본가가 멸문한 사실은 강호에 빠르게 퍼졌다.
마교 손에서 용혈을 구해 황제 자리에 앉히고 황태자비를 폐위하며 천하를 마음껏 주무르던 남궁세가가 사라졌다.
그리고 정의연 대맹주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세가 연합이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대맹주 자리가 화무룡에게 넘어가고, 정의연의 주도권은 문파 연합이 잡게 생겼으니 안 움직일 도리가 없었다.
반면, 문파 연합은 수뇌부가 급히 모여서 남궁세가를 악랄한 수법으로 멸문한 무언독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했다.
세가 연합보다 선수를 쳐서 무언독왕을 죽여 확실한 명분을 얻자는 쪽도 있고, 차라리 대맹주 자리를 내주더라도 힘을 보전하여 약해진 세가 연합을 압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정의연 대맹주는 공식적으로 황제 폐하의 스승입니다. 우리끼리의 힘 싸움만 생각하면 강 건너 불구경이 맞는 말인데, 천하의 대권까지 생각하면 어떻게든 대맹주 자리를 손에 넣어야 합니다."
남궁세가를 주춧돌 하나 안 남기고 지워버린 무언독왕의 무위를 생각하면 목을 자르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혹시 독에만 조예가 깊고 무공은 평범할 수도 있다는 요행을 바라는 생각으로 세가 연합보다 먼저 움직이자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다.
"남궁세가의 본가가 있던 자리에서 어떤 독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제갈후는 무공만 익혀 머리도 무공으로 가득한 문파 연합 수뇌부를 보며 속으로 한탄했다.
제갈세가는 남궁세가와 악연이 있어 처음에 정의연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의연 가담이 강호의 대세가 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갔고, 선택 여지도 없어 문파 연합에 붙었다.
다행히 십 년이 넘은 기간 헌신하며 발언권을 야금야금 얻어내서 이젠 수뇌부 회의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여기 내공의 수발이 자유롭지 않은 분은 없습니다. 그러나 쓰고 남은 내공을 하나도 안 흘리고 회수할 자신이 있는 분 계십니까?"
이건 실종한 마교 교주나 검극도 장담하지 못 하는 일이다.
초식을 펼칠 때 단전의 내공을 손이나 발까지 움직여 위력을 강화한다. 그 과정에 내공이 지나는 혈도마다 일부 내공이 남게 되고, 일부 내공은 덧없이 몸 밖으로 나간다.
초식을 다 펼친 다음 남은 내공과 혈도에 잔류한 내공을 단전에 회수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고체는 확실히 아니고, 대부분은 액체보다는 기체에 가깝다고 여기는 기는 사용할 때마다 낭비가 심하다.
내공이 아무리 많아도 계속 낭비하면 언젠간 고갈한다. 목숨을 건 사투에서 내공이 고갈되면 손발을 묶은 거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공의 회수 그리고 싸우면서 내공을 회복하는 방법 등이 아주 귀하게 취급된다.
"그자의 경지가 검극보다 높다는 뜻이오?"
"독은 기보다 다루기 쉽습니다. 기보다 위험해서 잘 다루려 하지 않을 뿐이지요. 그렇기에 꼭 검극보다 높다고 할 순 없습니다. 그러나 그냥 강한 독을 뿌려 남궁세가를 지운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유추할 수 있지요."
독은 고체에 가깝다. 그래서 물이나 뭉친 바람처럼 느껴지는 내공보다는 말을 잘 듣는다. 그렇더라고 남궁세가의 장원을 말끔히 지운 독을 흔적도 안 남기고 회수할 정도 실력이라면 무공도 절대 낮은 수준이 아니다.
검극은 몰라도 최소 여기 앉은 수뇌부들보다는 높은 경지다.
제갈후가 직접적인 언급을 자제했으나, 숨긴 의도를 모를 멍청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소."
"진상규명조사단을 조직해야 합니다. 고작 한 명의 힘으로 남궁세가를 없애는 게 가능하냐는 의문을 던지고, 남궁가의 멸문에는 거대한 배후가 있으리라 추측하며, 무언독왕에게 현혹하지 말고 진정한 흉수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세가 연합과 무언독왕이 붙은 다음에요."
제갈후의 말을 듣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손뼉을 치며 묘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 연합이 무언독왕을 죽이면 그렇게 약한 자가 남궁세가를 멸문했을 리 없다면서 세가 연합의 공적을 깎아내릴 수 있다.
세가 연합이 혹시라도 진다면 어마어마하게 강한 것으로 증명된 무언독왕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명분을 얻는다.
"좋소.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거로 믿고 이대로 진행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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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
무룡은 계속 떠오르는 채 열 개도 안 되는 단어 때문에 머리가 아파 더는 달릴 수 없었다. 그래서 기운을 갈무리하고 그냥 걸었다.
'추영은 여자 이름 같고, 아이는 날 말하는 게 아닐 테고.'
'여의주는 뭐지? 정혈단은 뭐고 환생환은 또 뭐지?'
'난 지금 복수하러 가는 길인가?'
복수 두 글자를 떠올리면 남궁가·마교·신비세력·자하신공·노혼 등이 마구 떠올랐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단어처럼 명확하지 않고, 복수라는 단어를 염두에서 지우면 함께 사라졌다.
그런 무룡의 걸음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악랄한 수단으로 남궁세가의 무고한 수백 명 목숨을 취한 악적에게 알린다."
'누군지 참 나쁜 놈이네.'
"네 죄를 알면 순순히 오라를 지고 자백해라. 그러면 아무 고통도 없이 단칼에 보내주겠다."
무룡은 상대 말을 잠깐 고민하다가 무시하기로 했다. 상대 말을 똑같이 속으로 곱씹어 봤는데 떠오르는 게 없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 오만방자한 놈."
회색 인영이 무룡을 덮쳤다. 경공만 보면 강호에서 열은 몰라도 백에는 거뜬하게 들 수준이다.
"외공이다."
상대를 적으로 생각지 않은 무룡은 반응이 조금 느렸다. 그래서 경공이 출중한 상대에게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목을 노렸으나 어깨를 찔렀고, 그것도 살갗조차 뚫지 못했다. 화들짝 놀란 기습자는 경공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그러나 무룡이 더 빨랐다. 상대를 적으로 간주하자마자 바로 검을 뽑으며 일섬을 펼쳤다.
원래부터 짧은 거리에서 무룡의 일섬보다 빠른 경공은 없다. 마환기공을 극성으로 익히고 내공이 몇 갑자나 되는 무룡이 아니면 그만한 속도를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대는 뒷걸음치는 중이고 무룡이 경공에 능하다는 정보도 모르기에 방심까지 했다.
"사형!"
무룡의 검이 번쩍인 동시에 기습한 사내의 머리가 몸통과 분리했다. 그리고 비슷한 옷을 입은 사내 몇이 바로 병장기를 뽑으며 무룡에게 덤볐다.
무룡의 몸이 흐릿해졌다. 사형의 죽음에 비분강개하여 달려들던 사내들이 주춤했다. 이미 기운은 최고조에 달해 밖으로 쏟아야 하는데 목표를 잃었다.
무룡이 손을 쓰기도 전에 내공의 반동으로 하나같이 내상을 입어 입으로 피를 뿜으며 비칠거렸다. 그런 상대를 무룡은 무자비하게 검으로 벴다.
"어디 검법입니까?"
"모르겠어. 단, 강호에서 열 명 안에 들 정도로 높은 수준이라는 건 알겠다."
"진짜 배후가 따로 있는 걸까요?"
세가 연합이라고 멍청이는 아니다. 기호지세 격이여서 선택의 여지가 없을 뿐,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이번 사안을 고민했다.
상대가 높은 수준의 검법을 보이자 실질적으로 남궁세가를 멸문한 세력이 따로 있다고 판단했다. 저 정도 수준의 검법을 익힌 자가 독공도 높은 수준으로 익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것까지 알려면 저자를 생포해야 하는데, 가능할 것 같지 않구나."
최근엔 화무룡에게 자리를 내주고 남궁가의 소가주한테도 조금 밀렸지만, 예전엔 다음 대 중원 최고수를 노릴 만하다는 평가를 받던 위오영이다.
무공 자질만 뛰어난 게 아니라 머리도 비상하여 결단이 빨랐다.
"모용가의 암영대를 부탁합니다."
모용세가는 선비족으로 북방에 국가를 여러 번 세웠다. 당연히 독이나 잠입을 통한 암살에 익숙하다.
제국의 신하가 되며 일개 가문으로 전락한 후, 모용세가는 암영대를 몰래 키웠다. 여전히 방대한 가문을 먹여 살리기엔 보유한 전답이 부족한 면이 있었다.
강호에서 살인 의뢰를 받으며 번 돈으로 세가도 먹여 살릴 겸, 제국이 무너질 때를 대비하여 요긴하게 쓸 생각으로 살수들을 키웠다.
군대를 키울 순 없었으니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버려야 한다.'
모용 가주가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가주 곁에 있던 총관이 단소를 꺼내 지령을 내렸다.
강호에 살수 집단이나 무리가 여럿 있지만, 암영대처럼 체계적인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같은 세가 연합에서도 은근히 자신들을 꺼리는 걸 아는 모용 가주는 이 기회에 암영대를 버리기로 했다.
암영대를 버린 대가로 세가 연합 및 정의연에서 더 큰 발언권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세가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구슬려 군대를 양성할 작정이다.
단소 소리가 널리 퍼지자 평범한 무사 복장을 한 자들이 갑자기 복면을 쓰고 무룡을 향해 달렸다.
그 숫자가 이백이 넘어 세가 연합의 사람들은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익숙하다.'
무룡은 복면을 한 자들의 공격이 왠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누군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독으로 죽인다.'
어쩌면 상대도 자신이 익숙할 수 있다. 그러니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방법들 대신 독으로 죽이기로 했다.
독룡유가 무룡의 의지에 반응해 독룡담에서 독을 끌어냈다. 마환기공과 순양공은 독이 지나치는 혈도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남궁세가 대장원의 모든 걸 녹인 독이 녹록할 리 없다. 무룡의 몸은 독에 급격히 괴사했다.
다행히 괴사한 무룡의 몸은 아주 빠르게 회복했다. 육 년 정도 기간 천방기사는 매일 무룡에게 환골탈태역근세수비약에서 독을 빼고 만든 신생단이라는 이름의 약을 먹였다.
약 기운이 여전히 몸에 남아 망가진 무룡의 몸을 바로바로 복구했다.
그러나 약 기운이 언젠간 사라질 것이기에 독을 계속 쓰는 건 위험하다.
무룡은 손에서 독을 수백 개 알갱이로 뭉친 다음 소상혈을 비롯한 손가락 끝의 혈도들로 발사했다.
내공이 아닌 독이고, 무룡이 기운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서 자기 목숨은 생각도 안 하고 무룡을 덮치던 암영대 살수들은 독을 피하지 못했다.
"저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가벼운 검도 빠르면 강한 힘이 실린다. 그러나 무언독왕은 기습에 어깨를 내주고도 멀쩡했다.
게다가 일검에 여섯 명의 목을 베는 대단한 검술. 이백 명이 넘은 암영대 살수를 일수에 녹여 없애는 대단한 독공.
이 정도면 남궁세가 본가를 깔끔하게 지울 최소한의 조건은 만족한다.
"어쩌다 세상에 저런 자가 생겼을까?"
"이대로 물러나려는 건 아니겠지?"
모용 가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죽은 자들을 끝으로 암영대는 채 스무 명도 안 남았다. 이대로 물러나면 가장 큰 무기인 암영대를 잃은 모용세가만 손해다.
암영대가 희생한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결과가 좋지 않기에 큰 명분이 되지 않는다.
최소한 무언독왕의 팔다리 하나는 뜯어내야 암영대의 희생이 비로소 값지게 된다.
"이대로 물러나면 문파 연합에 밀립니다. 다행히 괴산이노傀山二老께서 돕겠다고 했으니 기대하십시오."
괴산이노라는 말에 모용 가주의 얼굴이 살짝 떨렸다.
'아직도 안 죽었구나. 마교 교주랑 비슷한 연배일 텐데.'
- 작가의말
의도치 않아도 강호 정세를 흔드는 건 주인공의 숙명인가 봅니다. 용혈이란 이유 하나로 정마대전을 일으킨 무룡이 또 큰 사고를 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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