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봉낭첨
"계혼이 만든 형가검荊軻劍이야."
바람이 소슬하니 역수가 차구나. 장사는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으리.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갈 때 남긴 시구다. 계혼이 만든 형가검이 바로 그러했다.
"우리 검법의 변형인 것 같습니다."
형가검은 새롭게 만든 게 아니라 벽파검을 훨씬 공격적으로 바꾼 검법이다. 벽파검법은 연환으로 상대를 궁지에 모는 검법이다. 일격필살의 초식이 있긴 하지만, 벽파검법의 진수는 끊임없는 공격으로 상대를 제압 혹은 죽일 틈을 만드는 데 있다.
계혼은 무거운 거검을 무기로 고른 다음 연환을 버리고 일격필살만 추구했다. 마환기공을 익혀 몸이 튼튼한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선택이다.
"근데 너무 극단적인 것 같네요."
실력은 괜찮지만, 무공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석군이다. 그러나 최근 깊이 빠진 벽파검법에 관해선 정확한 견해를 갖췄다.
"극단적이 아니야. 계혼은 외공을 익혀서 웬만한 타격은 그냥 무시해. 그리고 손도 흑응조라는 무공을 익혀 누구보다 튼튼하지."
돼지의 길게 뻗은 뻐드렁니가 계혼의 검과 강하게 부딪쳤다. 그러나 충돌로 생긴 굉음이 무색하게 계혼의 검을 잡은 손은 추호의 떨림이 없었다.
오히려 돼지 요괴가 골이 울렸는지 커다란 대가리를 연신 털어댔다.
"뀌익!"
돼지 요괴가 범 요괴한테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호소했다. 그러나 범 요괴 역시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술사들이 범 요괴가 방심한 사이 꼬리 하나를 말뚝에 묶어 바닥에 고정해버렸다. 운신의 폭이 좁아진 범 요괴는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동해문 제자들 상대로 초반의 위력을 보이지 못했다.
"아무리 내공까지 합친다고 해도 어떻게 저놈보다 힘이 셀 수 있습니까?"
굳이 체험하지 않아도 돼지 요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돼지 요괴가 달릴 때 팍팍 파이는 땅이나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능력만 봐도 인간의 몸으론 절대 막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계혼은 검을 휘두르는 거로 매번 돼지 요괴의 돌진을 멈춰 세웠다. 차라리 몸으로 충돌해서 계혼이 날아 났는데도 멀쩡한 모습을 보였다면 지금처럼 당혹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힘으로 하는 게 아니야. 저건 기술이다."
"사량발천근이라고 하기엔 정면에서 대결했습니다. 그리고 상대 힘을 다른 방향으로 분산한 기미도 없고요."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이기는 무공은 귀하지만 드물진 않다. 그러나 어떤 무공도 상대와 정면에서 충돌하지 않는다.
큰 힘을 분산하거나 왜곡하여 헛심이 되게 하는 게 그 무공들의 오의다.
"파도가 있어. 언제 가장 강할까?"
석군은 눈을 껌벅이다가 사부를 쳐다봤다. 손청우 역시 이마까지 찌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정답을 말할 필욘 없어. 틀린 답이어도 그에 관해 근거가 있다면 가치가 있는 거야."
추향의 말에 석군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총명한 형과 젊은 나이에 매화검법이라는 대단한 무공을 창안한 사부 때문에 늘 틀리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래야 이 대단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탓에 늘 자기 주견을 뚜렷하게 내비치지 못했다.
"파도가 가장 높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낙석은 무게보다 더한 위력을 보입니다. 파도도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가장 강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손청우가 대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답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낙석과 파도를 연결해 나름대로 고민한 건 꾸준하기만 한 석군에게 있어 큰 변화다.
꾸준함에 약간의 요령만 더해지면 훨씬 높은 경지를 빠르게 밟을 수 있는데, 석군은 여태껏 머리를 쓰는 일에 너무 조심스러웠다.
"답은 맞지만, 이유는 틀렸다."
그때, 노계혼의 외침이 들려왔다.
"사저, 도와줘요."
노계혼과 일대일로 대결하면서 손해만 연신 본 돼지 요괴가 도주할 기미를 보였다. 요괴와 싸운 경험이 풍부한 노계혼은 그 낌새를 알아채고 추향에게 도움을 청했다.
"정신술定身術!"
추향의 외침으로 무슨 법술을 펼치는지 알아챈 계혼도 바로 살초를 준비했다.
"잘 봐라. 노계혼의 최강 초식이다."
노계혼을 중심으로 커다란 파도가 생겼다. 파도는 노계혼의 움직임에 따라 돼지 요괴를 덮쳤다.
"어떻게?"
강한 힘을 넓게 펴는 것보다 약한 힘을 한 점에 모으는 게 훨씬 강하다. 이는 무공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깨우치는 도리다.
그런데 노계혼의 초식은 힘을 넓게 펼쳤는데도 아주 강한 위력을 보였다.
'저걸 한 점에 모은다면?'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파도는 가장 높은 곳에 갔을 때 힘이 가장 강하다. 이는 뒤에서 미는 힘과 앞에서 막는 힘이 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균형이 깨지더라도 한쪽 힘이 계속 버티고 있기에 큰 위력을 내지 못하는 거 아닙니까?"
"맞다."
추향의 말에 석군은 멍청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 파도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저건 계혼이 만든 파도잖아."
손청우는 수만 갈래 벼락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파도가 최고점에 이른 순간에 막는 힘을 돌려서 미는 힘으로 바꾼다면?"
팽팽하게 맞서던 힘이 갑자기 등을 돌려 상대편을 들어준다면? 이는 단순히 힘이 두 배가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방금 그 초식. 계혼은 검으로 파도를 일으킨 게 아니야. 파도의 일부분이 된 거지."
"파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대답은 추향이 아닌 손청우가 했다.
"그간 충돌하면서 기운을 뿌렸고, 그걸 파도로 만들었겠지. 외기를 아주 높은 수준으로 다룬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손청우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중얼거렸다.
"그리고 파도를 만든 게 아니라 파도에 편승했어. 검으로 파도를 만들면 힘의 손실이 있기 마련이야. 차라리 그 힘을 모두 모아 검을 휘두르는 게 낫겠지. 그러나 수십 번 충돌의 힘을 그대로 보존하여 합쳐서 파도로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파도의 힘을 검에 실을 수 있다면."
계혼이 거검을 선택한 이유다. 아무리 잘 만든 보검도 수십 번 충돌의 힘을 모아 만든 파도를 버티기 어렵다. 그리고 검이 작으면 파도의 힘을 빌리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하하, 계혼이 머리 썼네."
누가 봐도 튼튼한 몸과 무거운 검을 믿고 나대는 우둔한 놈의 소행이다. 그런데 그 우둔한 소행이 사실은 가장 강한 초식을 펼치기 위한 밑밥이었다.
모든 충돌을 정확히 판단한 후, 외기 다루듯 충돌의 여파를 움직여 서로 충돌하고 합치게 한다. 그 와중에 파도의 방향도 정확해야 하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파도의 가장 강한 곳에 뛰어 들어가서 그 힘을 검에 실어야 한다. 파도는 계혼의 것이 아니기에 계혼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마환기공과 흑응조를 안 익혔다면 몸이 터지든지 손아귀가 터지든지 했을 무식하면서도 아주 계산적인 전투방식이다.
"대단합니다."
손청우의 중얼거림을 통해 어렴풋이 계혼이 뭘 했는지 이해한 석군은 몸이 덜덜 떨렸다.
'생각 없이 수련만 해선 절대 노도검객처럼 대단한 고수가 될 수 없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석군은 손청우와 노계혼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곤 했다. 분명히 사부인 손청우가 훨씬 대단한 사람이지만, 마음 한구석엔 왠지 노계혼이 늘 있었다.
'난 알았던 거야. 노도검객께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사저, 저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돼지 요괴의 처절한 비명이 울리자 동해문 제자들이 포위를 풀고 한데 뭉쳐서 도주했다. 범 요괴는 꼬리 하나가 말뚝에 묶인 탓에 도주하는 동해문 제자들을 쫓지 못했다.
"요괴나 잡자."
말을 마친 추향이 어느새 손에 가는 검을 들고 범 요괴를 덮쳤다.
"소사부, 꼬리 하나 맡아주십시오. 남은 꼬린 제가 막겠습니다. 사제는 요괴의 앞발을 묶어주게. 공격 방식이 한정돼 있으니 조심하면 다칠 일이 없을 거야."
석군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뒤늦게 움직인 손청우와 노계혼이 먼저 도착해 범 요괴의 꼬리 하나씩 맡았다.
마지막에 도착한 석군은 벽파검법을 펼쳐 요괴의 앞발을 수비했다. 덕분에 꼬리를 맡은 손청우와 노계혼에게 여유가 생겼다.
"뒷다리 묶어."
추향의 지시를 노계혼은 물론 손청우도 바로 이해했다.
'매화검법인가?'
앞발로 하는 공격은 단순해서 석군도 사부의 움직임을 확인할 여유가 생겼다.
'벽파검법 같기도 하고. 태청검법과 옥허검법도 조금 보이고.'
손청우는 정체가 모호한 초식을 펼쳐 꼬리는 물론 뒷다리도 공격했다. 노계혼 역시 길고 무거운 검을 빠르게 휘둘러 남은 뒷다리를 공격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범 요괴는 사지와 남은 꼬리 두 개마저 묶인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찰나를 추향이 노렸다.
"반월참半月斬!"
"사부, 후퇴."
추향의 외침으로 뭘 할지 알아차린 노계혼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석군도 눈치 빠르게 뒤로 훌쩍 물러났다.
추향의 가는 검은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 위력을 보였다. 동해문의 우락부락한 사내들도 털끝 하나 제대로 못 건드리던 범 요괴의 세 꼬리를 한꺼번에 베어버렸다.
"크헝!"
범 요괴가 발광하며 땅을 마구 파헤쳤다. 그 서슬이 하도 퍼레서 마환기공으로 몸이 튼튼해 두려울 게 없던 노계혼마저 접근한 엄두를 못 냈다.
"하!"
땅을 파헤친 요괴가 붉은 막대기를 물고 도망치는 걸 본 석군이 허무함을 못 이겨 탄식했다.
"도망도 치네?"
손청우 역시 처음 요괴와 싸우는 거여서 미처 도주는 예상치 못했다.
"그래도 필요한 건 챙겼습니다."
노계혼이 바닥에서 범 꼬리 세 개를 들고 희희낙락 좋아했다.
"그걸 어디에 씁니까?"
석군의 질문에 대답한 건 추향이었다.
"검을 더 튼튼하고 강하게 해."
계혼은 슬며시 가장 굵고 긴 꼬리를 골라 자기 검 옆에 놓은 다음, 선심 쓰듯 남은 꼬리 두 개를 손청우와 석군에게 내밀었다.
"남은 두 개는 소사부와 석 사제 검에 합치면 좋겠습니다."
- 작가의말
波峰浪尖
파도의 가장 높은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슬슬 주인공이 등장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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