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정기
"하, 하, 하!"
자하신공의 공력을 잔뜩 실은 웃음소리에 마교 장로들이 얼굴을 굳혔다.
이들은 원래 묵교墨敎라고 칭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까지 마교라고 불렀다. 세상과 인간을 해석하고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고민하던 철학 단체에서 신을 믿고 그에 맹종하는 종교 단체로 바뀌었다.
"노 사숙이다."
"노 사조다."
노혼이 모습을 드러내자 화산 제자들이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노혼이 나타나고 한참 지나도 추가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없자 다시 실망으로 바뀌었다.
"장문과 장로들은 어디로 간 것이냐?"
"화진악은 심복들을 데리고 도망쳤고, 장로들은 싸우다 죽거나 숨거나 도망쳤습니다. 싸우다 죽은 분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으니 다 도망쳤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구나."
"제자 손청우입니다."
피가 잔뜩 묻은 병장기를 들고 건들거리는 마교 무사들에게 잡히고도 목소리가 전혀 떨리지 않았다.
"너희가 살아서 화산의 향화香火(제사 지낼 사람을 이르는 말)를 이어가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구나."
노혼은 마교 장로들을 향해 포권했다.
"화산 벽파검 노혼이오. 마교 장로들의 위명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는데 이렇게 좋지 못한 첫 만남이 되어 유감이오."
"혹시 그대는 화진악의 행방을 아는가?"
"난 약 삼 년 전에 화진악의 흉계에 걸려 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한 지 채 한 시진도 안 됐소. 만약 마교가 원하는 게 화진악의 목숨이라면 내가 책임지고 일 년 안에 모가지를 들고 세세겁화봉洗世劫火峰으로 찾아가겠소."
"우린 화진악의 입이 필요하오."
"화진악만 아는 것이오? 내가 전대 장문인의 총애를 받아 들은 게 많으니 나한테 물어보시오."
사실 만사에 무관심한 노혼은 무공 빼고 아는 게 많지 않다. 그러나 상대가 뭘 원하는지 알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갈 수 있기에 아는 척을 했다.
"우린 두 가지가 궁금한데 그대는 기껏해야 하나만 대답할 수 있소. 보아하니 화진악과 사이도 안 좋은 듯한데 차라리 제자들을 잘 구슬려 행방을 불게 하는 게 좋을 거요."
"너희 중 화진악의 행방을 아는 자가 있느냐?"
"화산의 명예를 걸고 맹세코 없습니다."
"화산 제자는 화산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고하지 않소. 계속 애꿎은 목숨을 취할 거라면 난 도망치겠소."
협박치고는 우스운 말이어서 마교 무사들이 피식거렸다.
"내가 감옥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소. 매일 수련만 했지. 화진악이 왜 날 가뒀는지 말을 안 해줘서 뭔가 영문이 있겠지 하고 지금까지 참아왔소. 그런데 오늘 아침에 글쎄 밥을 안 가져다주는 게 아니겠소."
노혼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어린 제자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화가 나서 감옥 벽을 부수고 나왔소. 그런데 화진악은 도망쳤고 마교 장로가 아직 칼 잡는 법도 제대로 못 익힌 어린 제자의 목숨으로 강호의 후배를 겁박하는 모습을 보았소. 내가 도망치는 즉시 그대들의 위업을 강호에 널리 알리겠소."
노혼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무룡이 한 번 펼친 적 있던 노도박안. 그러나 결과는 천양지차였다. 노혼과 서른 걸음 떨어진 정기관 연무장의 벽이 끓는 물을 부은 진흙처럼 허물어졌다.
"내가 몇 년만 정진하면 삼화취정의 경지를 엿볼 것 같소. 그때가 되면 세세겁화봉 근처를 돌며 마교의 무사나 교도를 보는 족족 죽일 것이오. 벽파검 노혼의 파도에 쓸려간 주검이 천은 못 돼도 팔백은 넘소. 거기에 천 정도 보태는 거 나한테 큰 부담이 아니오."
살생을 자주 하면 마음에 살이 낀다. 이는 대부분 무인에겐 좋은 일이 아니다. 마음의 살을 이용해 무공을 수련하는 자도 있긴 하지만, 명문으로 불리고 정파로 분류되는 화산에 그런 무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삼화취정에 이르면 마음이 천년바위처럼 굳건하여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다.
"본교는 강자가 큰 힘을 갖고 큰 책임을 지는 곳이오. 그리고 모든 교도는 교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소. 그딴 협박이 먹힐 것 같소?"
노혼이 눈을 감았다 떴다. 조금 전까지 호연지기가 가득하던 정의로운 눈이 정기를 잃고 삭막하게 변했다. 협의행이라는 명분으로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 하던 그때의 노혼이 깨어났다.
"당신들 얼굴을 다 기억했소. 사람을 시켜 조사해서 당신들 가족은 어떻게든 죽여주지. 마교 장로와 그 가족을 죽이겠다면 정보를 줄 곳이 강호에 열은 넘을 텐데."
강호에 마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종자로 묘사되지만, 이들도 피와 살로 이뤄지고 아프면 신음하고 슬프면 눈물을 흘리는 똑같은 사람이다.
사는 환경이 거칠어 성격이 독하고 관용을 잘 모르지만, 그건 북부나 남부의 가난한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임산부의 배를 가를 정도로 독한 놈이 기르던 개가 죽었다고 펑펑 울던 모습을 기억하는 노혼이기에 이 협박이 반드시 먹힐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무인이라면 입이 아닌 칼로 말하는 법."
특이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안 보이는 늙수그레한 장로가 입을 열었다.
"마교 대 화산으로 대결을 제안하오. 각각 세 명씩 내서 한쪽이 다 질 때까지 겨루는 것이오. 마교가 이기면 화산은 잔소리 말고 화진악의 행방을 우리에게 알리고, 화산이 이기면 우린 곱게 물러날 뿐만 아니라 오늘 죽은 목숨들에 대해 충분한 재물로 배상하겠소."
주도권이 마교로 넘어갔다.
마교가 해결책을 제시한 바람에 노혼이 도주하여 피의 복수를 벌이겠다는 협박은 명분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노혼이 마교의 제안을 거절하고 도망치면 화산 제자들의 죽음은 당연한 게 되어버린다.
"나와 같이 싸울 제자는 나서라."
"사숙을 돕겠습니다."
손청우가 전혀 주저하지 않고 나섰다.
"나도, 나도 싸울게요."
팔이 잡힌 채 무릎 꿇고 있던 제자가 악을 썼다. 덩치로 보나 얼굴로 보나 열 살이 넘었는지 의심 가는 어린 제자였다.
"사질, 화산의 운명이 걸린 싸움이다."
손청우의 말에 아이는 몸부림치며 외쳤다.
"어차피 제 차례가 오면 화산은 끝입니다. 목숨을 부지해 명맥을 이으면 그게 화산입니까? 장문과 장로들이 도망친 순간부터 화산은 죽었습니다. 제 피로 화산의 숨을 이어갈 수 있다면 기꺼이 백 번도 흘리겠습니다."
마교 무사들이 잡고 있던 팔을 풀었다. 아이는 흥 콧방귀를 뀌며 큰 보폭으로 걸어서 노혼 곁으로 갔다.
"화산이 지면 전 자결하겠습니다."
손청우와 같은 배분의 제자 하나가 나와서 노혼 뒤에 섰다.
"저도 살 마음이 없습니다."
연무장에는 약 칠십 명 제자가 있었는데 노혼의 뒤에 삼십 명 정도가 섰다.
"사숙, 제가 선봉을 서겠습니다."
손청우가 단단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다. 내 선에서 끝내겠다."
손청우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낮게 속삭였다.
"제가 먼저 동귀어진으로 한 명 데려가겠습니다. 사숙께서 남은 둘을 확실히 이겨 화산을 구하십시오."
"내가 어떻게든 둘은 잡을 테니 혹시 실패하면 그때 네가 희생하거라."
"제 사부는 도망쳤습니다. 혹시 오늘 사숙과 제가 살아남는다면 제자로 받아주십시오."
"이제부터 넌 내 둘째 제자다."
손청우는 바로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노혼은 연무장 바닥의 흙을 집어 손청우의 머리 위에 뿌리는 거로 술잔을 주고받고 향을 올리는 절차를 대신했다.
마교 쪽은 첫 대전자로 혁 장로가 나왔다. 오늘 죽은 제자 대부분의 목을 벤 귀두도의 주인이다. 혁 장로를 향한 화산 제자들의 눈에서 불이 뚝뚝 떨어졌다.
"중원제일검도 아니고 화산제일검 따위가 큰소리는."
혁 장로가 귀두도를 휙휙 휘두르며 도발했다. 목을 수십 개 벴는데도 날이 전혀 상하지 않았고 도신에 피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귀두도 자체가 원체 만들기 힘든 무기인데 혁 장로의 것은 그중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로 좋은 무기가 분명했다.
"오늘 대결은 항복이 없는 거로 합시다."
"좋소!"
노혼의 말에 혁 장로가 제멋대로 외쳤다. 목소리가 음침한 늙은 장로가 얼굴을 살짝 찡그려 불만을 표했다.
크게 외친 혁 장로는 귀두도를 휘두르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혁 장로의 기세가 정점에 이른 순간, 노혼이 움직였다. 무룡의 장검보다 짧고 얇은 검을 휘둘러 귀두도와 강하게 부딪쳤다.
혁 장로는 귀두도가 상대의 검보다 훨씬 무겁고 자신의 체격이 상대보다 배는 큰 걸 믿고 노혼의 공격을 피하거나 흘리지 않았다.
검과 귀두도가 부딪치는 깡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두 번째 충돌이 일었다. 노혼의 벽파검법은 어떻게든 공격을 이어가지만, 상대가 힘으로 맞설 때 가장 편하다.
노혼의 빠른 공격에 혁 장로 역시 귀두도를 영활하게 움직였다. 크고 무거운 칼이어서 느릴 거라는 편견을 완전히 깨부수는 무기 운용이었다.
그러나 혁 장로가 의기양양할 새도 없이 노혼이 속도를 둘로 올렸다. 무룡이라면 먼저 셋으로 올려 속도에 적응한 후에야 둘로 올리겠지만, 노혼은 아주 자연스럽게 속도를 두 단계 높여버렸다.
고요한 가운데 시원한 쓱 소리가 울렸다. 숨통을 베인 혁 장로는 귀두도로 땅을 짚고 남은 손으로 목을 감쌌다.
그러나 일대일 대결이고 하나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을 미리 천명했기에 마교의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이 초식에 죽은 사람은 당신이 두 번째요."
아직 혁 장로의 숨통이 끊어지지 않았지만, 노혼은 상대를 주검으로 여겼다.
"첫 번째는 수적이었는데 절름발이에 팔 하나 없었지."
노혼의 조롱에 격동한 혁 장로가 안간힘을 써서 귀두도를 휘둘렀다. 그러다 베인 숨통으로 피가 가득 흘러 들어가는 바람에 컥컥대다가 그대로 숨이 멈췄다.
- 작가의말
중기관총 들었다고 권총 쓰는 사람 무시하다가 헤드샷 당한 혁모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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