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협객
토지묘에서 선잠을 잔 무룡과 추영은 찌뿌둥한 몸을 끌고 말을 달렸다.
"저기 객점에 가서 뜨끈한 국수 한 사발씩 먹자."
봄이어서 조금씩 따뜻해지곤 있지만, 토지묘가 있는 산 중턱은 반쯤 겨울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추웠다. 게다가 바닥이 고르지 않아 등이 엄청나게 배겼다.
"너 행적이 드러나면 안 된다며?"
"다 방법이 있지."
추영이 짐을 뒤져 모자 하나를 꺼냈다. 하얀 면사를 여러 겹으로 겹쳐 얼굴 윤곽만 어슴푸레 보이고 오관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게 하는 귀부인들이 외출 때 쓰는 모자였다.
"말을 최대한 짧게 해서 말투를 들키지 마."
주문은 무룡이 하기로 했다. 생전 처음 객점에서 주문하는 무룡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 분입니까?"
"네."
"저기 앉으시겠습니까?"
"네."
점소이는 성격이 무난한 손님이 왔다고 기뻐했다. 여자가 얼굴을 가리는 면사포 모자를 써서 조금 걱정했는데, 아주 점잖은 분들이었다.
"뭘 드시겠습니까? 본 객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닭고기를 얹은 국수와 돼지고기볶음이 유명합니다."
"국수."
"술은 뭐로 드시겠습니까?"
"국수."
"네, 술은 싫고 국수 두 그릇. 아저씨, 국수 두 그릇 듬뿍 부탁해요."
"멍청이. 뭘 그리 딱딱하게 말해? 누가 봐도 의심스럽잖아."
"짧게 하라며?"
"쓸데없는 소리를 자제하라는 거였지."
무룡은 대화를 멈추고 천장을 응시했다. 노혼의 복수를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이렇게 시시덕거려도 되는지 갑자기 회의를 느꼈다.
"우리 언제쯤 정착할 수 있어?"
"왜?"
"빨리 수련하고 싶어서."
"너 도둑질 어떻게 생각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하지."
"우리가 부잣집 하나 털면 한 달 안에 정착할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반년 정도 걸릴 것 같아."
"반년으로 알고 있을게."
그때 점소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 두 그릇 들고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음식에 무룡은 객잔 안을 휙 둘러봤다.
들어올 땐 미처 주의하지 못했던 구석 자리에 죽립을 쓴 사내 한 명만 있었다.
"어딜 가든 환경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야. 나처럼 객잔에 첫발을 들이자마자 구조와 인원을 전부 파악했어야지."
추영의 나무람에 무룡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대해 무지한 무룡에게 추영의 이런 이죽거림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가르침이다.
무룡이 고분고분 나오자 추영도 흥미를 잃고 국수에 집중했다.
닭고기를 얹었지만 육수는 기름기가 거의 없이 담백했다. 잘고 길게 쪼갠 배추를 닮은 푸른 잎이 조금 어두운 색의 국수와 조화를 이루었다.
적당히 삶은 면은 너무 무르지 않아 씹는 맛이 있었다. 닭고기는 나이가 든 수탉인지 조금 질겼지만, 맛은 꽤 고소했다.
면과 고명을 다 먹어 치운 다음 따뜻한 육수를 후루룩 마시니 속이 시원하게 풀리며 고르지 않은 바닥에서 자면서 찌뿌둥하던 몸에 활력이 돌았다.
"한 그릇씩 더 먹을까?"
"소이, 국수."
"아저씨. 방금 만든 것과 똑같이 맛있는 국수 두 그릇 더요."
잠시 후 점소이가 닭고기를 새로 삶아야 해서 조금 기다려야 한다고 양해를 구했다.
"네."
왠지 거리를 두는 듯한 무룡의 대응에 점소이도 눈치 빠르게 물러나서 심심한 나머지 주판을 튕기며 혼자 중얼거리는 객점 주인과 대화를 나눴다.
반쯤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국수를 기다리던 때. 객잔 대문의 주발이 흔들리며 건장한 체격의 사내 한 명이 들어왔다.
무룡과 눈길을 마주치고 잠깐 멈칫했던 사내는 그대로 구석 자리로 걸어갔다. 상대가 얼굴에 흰 가면을 쓴 탓에 눈길을 마주친 것도 몰랐던 무룡은 먼저 온 삿갓 사내의 일행인가 보다 생각하며 관심을 끊었다.
무룡이 국수가 언제 나오나 코를 킁킁대며 주방의 냄새에 관심을 기울일 때, 구석 자리에 있던 삿갓 사내가 갑자기 칼을 뽑아 가면 사내를 공격했다.
추영이 조금 남긴 국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탁자 위에 절검문折劍門 세 글자를 적었다.
강호에는 오대비문으로 불리는 다섯 신비한 세력이 있다. 절검문은 그중에서도 은밀하기로 유명한 문파로 강호에 이름만 알려지고 문주가 누구고 구성원이 누구이며 문파가 어디에 있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절검문의 가면 사내는 상대의 기습을 예상한 듯 가슴을 쑥 당겨 칼이 빗나가게 했다. 몸은 움직이지 않고 가슴 부위만 뒤로 빼는 이 방식은 외공 중에서 가장 흔한 포대공布袋功으로 저잣거리의 차력사들도 쉽게 펼친다.
그러나 빛살처럼 빠른 발도술을 이용한 기습을 포대공으로 피하는 건 웬만한 담력과 자신감 아니면 못 할 일이다.
'뽐내기 좋아하는 성격인가?'
절검문 사내는 상대의 공격을 연신 피하다가 갑자기 등에 멘 무기로 공격했다.
자루는 일 척하고 반 정도 되고 끝에 짐승 머리를 닮은 구형체가 달린 유성추 계열의 짧은 둔기였다. 보통 유성추가 짝을 이루는 데 반해 사내의 무기는 하나였다.
"컥!"
모양만 괴이하고 특별한 부분은 없어 보이는 무기건만, 한 번만 휘둘러 삿갓 사내의 어깨를 부쉈다.
어깨가 부서진 삿갓 사내는 황급히 칼을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모르고 한 짓입니다. 제발 목숨만큼은 살려주십시오. 집에 노모와 다섯 자식이 제가 먹여 살리기를 기다립니다."
"절검문의 복수는 용서가 없다."
무룡은 상대 말투가 왠지 귀에 익다고 느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생소한 목소리 때문에 바로 부정했다.
무룡이 아는 사람이 적은 것도 있고, 화산파에 장안 출신이 많아서 장안 말투가 익숙하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개원 십삼년 삼월 오일. 넌 오주의 성루 근처에서 독이 든 만두를 거지한테 건네 독살했다. 죄를 인정하느냐?"
"모르고 그랬습니다. 절검문 사람인 줄 알았으면 절대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괜찮다. 네 목숨으로 갚으면 된다."
가면 무사가 무기를 휘둘러 사내의 남은 어깨마저 부숴버렸다.
"네 노모와 다섯 아이, 너와 같은 살수 아니더냐. 문주께서 삭초제근하라고 하셨으니 지금쯤 황천길에서 네가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어서 상봉하거라."
절검문 사내는 어깨가 부서진 고통으로 바닥을 뒹구는 사내를 발로 차서 창문 밖으로 보내고 본인도 창문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삿갓 사내의 머리를 부숴버렸다.
"협객이네."
"왜?"
추영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피가 튀면 청소하기 힘들잖아. 그리고 객점 안에서 살인이 일어난 것과 밖에서 일어난 것은 큰 차이가 있어. 사문의 복수를 하는 와중에도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협객 아니면 뭐겠어."
무룡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가면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왠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었고, 가면 사내가 자신에게 보란 듯이 우쭐대는 느낌도 받았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내가 아는 중에 저렇게 강한 사람은 없어."
"왠지 널 엄청나게 의식하는 듯한 몸짓이었어. 뭔가 멋지게 보이고 싶어 하는 게 티가 난달까."
"내가 아니고 너겠지."
"그건 모르지. 남색을 하는 자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남색? 그거 뭐야?"
추영은 짜증이 치밀었다. 상대는 자신의 기를 잘도 채워주는데, 자신은 어쩌다 기회가 생겨 골리려 해도 상대가 무식해서 알아듣지 못한다.
마치 형체가 없는 허깨비 상대로 열심히 싸우는 것 같아 제풀에 기가 꺾인다.
"기회가 되면 직접 알아봐."
점소이와 객점 주인 모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했다.
'세상이 흉흉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여길 정도인가?'
마침 국수가 나왔다. 새로 삶은 닭고기는 고소하면서도 만만했고 국수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맛있었다.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둘은 은자로 음식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으로 엽전을 잔뜩 받았다.
"너 엽전 처음 봐?"
"응. 화산에서 엽전 쓸 일이 없거든."
무룡은 엽전을 하나씩 손바닥에 올려놓고 무게를 재며 신기해했다. 그러다 바로 시무룩해지며 엽전을 추영에게 넘겼다.
"왜 그래?"
"죽은 사부 생각이 나서."
"죽은 사람은 죽은 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나를 봐. 추씨 가문의 유일한 불씨지만 얼마나 씩씩하게 사는지."
"차라리 네가 낫지. 난 내 성이 뭔지도 몰라."
"넌 어딘가에 같은 성을 쓰는 친척이 수두룩할지도 몰라. 그러나 우리 가문은 확실하게 나밖에 없어. 그러니 가능성이 남은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거야."
둘은 누가 더 불쌍하고 불행한지 옥신각신 다퉜다. 슬프고 무거운 주제인데 추영과 말다툼을 하다 보니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하자. 이런 걸 이겨서 뭐 하니."
"그러니까 괜히 복수네 뭐네 하면서 썩은 호박 같은 얼굴 하지 말라고. 같이 다니는 내 기분도 좀 생각해."
무룡과 추영은 동쪽으로 말을 달렸다. 질주하는 말의 등에서 무룡은 생각을 정리했다.
자하신공을 높은 경지로 익혀 사부의 복수를 실행할 능력을 갖추기 전엔 너무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사부의 죽음을 잊진 않지만, 늘 떠올리며 아파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를 주기만 한 사부의 은혜를 만분의 일도 못 갚고 떠나보낸 게 분하고 원통하지만, 그래도 즐겁게 웃으며 살기로 했다. 죽은 사부를 붙들고 그 그림자에 숨지 않고 당당히 자립하기로 했다.
"야, 어디 한 곳만 훔치고 바로 은거지로 가자. 넌 망만 보면 돼. 천벌을 받을 도둑질은 내가 혼자 할게."
"악행을 방관하는 것도 죄다.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한, 넌 절대 도둑질을 못 한다."
무룡과 추영 둘 다 사냥이 서투른 탓에 세끼를 챙겨 먹는 것만으로도 몸에 지닌 돈이 빠르게 사라졌다.
"어쩔 수 없구나. 말을 팔고 배를 타자."
근처의 큰 도읍을 찾아 말을 팔고 은자를 챙긴 둘은 새 옷으로 갈아입고 황하를 따라 동으로 가는 배에 탔다. 천하가 어지러워 수적이 창궐한 탓에 배는 관선 뒤를 졸졸 따랐다.
- 작가의말
이번 글은 딱히 시대 배경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두루두루 여러 왕조의 특징을 따다가 섞어 사용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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