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룡현세
서문문검을 따라 구중진의 가장 안에 있는 절검문에 도착한 무룡은 청옥에 손을 얹었다.
연한 푸른색의 옥은 색과 달리 따뜻했다. 예전에 청옥은 무룡에게 절검문의 삼신기 중 하나인 용아를 주라고 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간 무룡이 아무 발전도 없었다면 그대로 용아를 보여주는 게 맞고, 아니면 용아의 형태라도 바꿔주는 게 맞다.
무룡이 무룡임을 모르는 서문문검 역시 처음 있는 일에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랐다. 절검문을 쭉 번성케 한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청옥이다. 청옥이 기능을 잃으면 절검문은 더는 검을 익히는 무인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지 못한다.
그때 화무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룡 맞아?"
서문문검은 화무룡의 질문에 깜짝 놀라 무룡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키나 덩치는 비슷하나 얼굴은 완전히 다르고 풍기는 기운 역시 딴판이었다.
얼굴이야 바꾸는 방법이 많다고 하지만, 기운을 숨기려면 최소 서문문검보다 경지가 하나는 높아야 하고 기운을 속이려면 최소 둘 높아야 한다.
그때 무룡의 얼굴이 꿈틀거리며 변화를 시작했다.
"용아?"
독사의 이빨 모습이 되었던 용아가 무룡의 얼굴에서 분리되었다. 무룡의 얼굴을 다르게 보여준 건 다름 아닌 절검문의 삼신기 중 하나인 용아였다.
그에 더불어 화무룡의 몸에서 견신이 둥실 떠서 청옥 가까이 갔다. 그리고 북천검이 반납한 호익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
"절검!"
그뿐이 아니라 절검문의 오의인 절검참마를 쓰며 날이 절반 녹아 사라진 검들도 갑자기 나타났다. 이번에 서문문검이 잡았던 검까지 해서 총 아홉 자루였다.
청옥의 푸른빛이 점점 짙어졌다. 서문문검은 연이어 일어난 이변에 당황했던 마음을 진정하고 차분하게 무룡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날 일은 다 내 업이다. 복수하려는 거라면 절검문이 아닌 나한테 해다오. 저항하지 않고 네 검을 달게 받겠다."
무룡이 고개를 저었다. 복수가 아니라는 건지 서문문검이 아닌 절검문에 복수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서문문검의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문주, 제압하는 게 어떻소?"
북천검이 나서려 했다. 아까 무룡에게 너무 쉽게 우위를 내준 게 내내 속에 걸렸는데 다시 검을 섞을 기회가 생겼다.
"몸에 아주 큰 기운을 품었습니다. 그 기운을 통제한다고 해도 문제고, 못 해도 문젭니다. 그냥 가만히 지켜보는 게 좋겠습니다."
청옥이 뿜는 빛이 점점 강해지더니 이들이 있는 공간을 깊은 바다보다 더 짙은 색으로 잠식해버렸다.
"문주, 견신이 사라졌습니다."
화무룡의 말에 서문문검은 뒤늦게 검을 뽑았다. 그러나 여전히 무룡을 향해 휘두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고한 무룡을 죽이려 했던 게 마음에 걸려 손이 나가지 않는 것도 있고, 괜히 무룡을 건드리면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든 것도 있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서문문검의 눈에 갑자기 세 개의 신기와 아홉 검이 보였다.
아홉 검이 쭉 이어져 몸통이 되고 견신이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용아는 견신의 이마에 붙어 뿔이 되고 호익은 날개가 되어 세 번째 검과 네 번째 검이 이어지는 부분에 달라붙었다.
청옥의 빛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하더니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작은 검을 토해냈다.
세 신기와 아홉 검으로 이뤄진 어설픈 모습의 짐승이 검을 삼키더니 외양이 변했다.
"검룡劍龍이다!"
서문문검이 참지 못하고 새된 소리를 질렀다. 절검문주든 서문세가의 가주든 체통이 상하는 일은 분명하다. 그러나 격동을 금치 못해 소리를 안 지르고 배길 수 없었다.
거머리가 용이 될 수 있고, 미꾸라지가 용이 될 수 있고, 지렁이가 용이 될 수 있고, 잉어가 용이 될 수 있고, 뱀이 용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도 용이 될 수 있다. 벽력문의 개파조사인 전신이 인간의 몸으로 용이 되어 승천했다. 그리고 범이 용이 된 일도 있고 새가 용이 된 일도 있다.
그러나 검이 용이 된 건 처음이다.
개를 닮은 머리에 하얀 뿔 하나, 몸통은 금속으로 된 비늘로 아름답고 등에 부채를 닮은 한 쌍의 날개가 있다.
꼬리는 아홉 개 가늘고 긴 검날로 이뤄져서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대신 다리가 없었다.
용의 모습이 생동해짐에 따라 청옥의 빛이 점점 옅어졌다. 북천검과 화무룡도 검룡의 존재를 확인했다.
"문주, 이게 무슨 일이오?"
북천검은 평생 검만 잡은 외골수다. 그런 북천검의 앞에 더없이 완벽한 검인 검룡이 나타났다.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 안 할 평정심을 키웠다고 여겼는데, 손발이 덜덜 떨리며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괴이한 일이지만, 이해가 어렵지도 않습니다. 저 청년이 청옥에 손을 올려놓은 다음 벌어진 일입니다."
화무룡은 놀란 나머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북천검이 대신 질문했다.
"저 청년이 삼신기에 아홉 절검까지 품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뜻이오?"
"저도 모릅니다. 청옥이 그리 판단한 것이겠지요."
그때 무룡이 허공에 손을 저었다. 금속 비늘끼리 쩔꺽쩔꺽 부딪히며 허공을 날던 검룡이 무룡에게 다가갔다.
모두 무룡의 손에 닿은 검룡이 어떤 모습의 무기가 될지 궁금해했다. 그런데 검룡은 무룡의 손에 잡히는 대신 명치를 파고들었다.
셋이 놀랄 새도 없이 검룡은 무룡의 몸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검룡을 단전에 품은 무룡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다.
은원구소恩怨勾銷.
은혜도 원한도 한꺼번에 사라졌다.
네 글자를 남긴 무룡이 구중진에서 사라졌다. 들어오는 방법은 모르지만, 나가는 방법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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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교 교주 난화봉은 심심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어 과년했는데도 시집을 못 갔다. 오독교의 교주는 능력이 되는 여성이면 누구나 할 수 있기에 딱히 대를 잇지 못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느 정도 되면 주변에서 잔소리하기 마련이다.
잔소리가 싫어서 교주전에 숨어 있었더니 너무 심심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자니 은근히 혼인을 재촉하는 눈빛과 들으라고 하는 건지 그냥 하는 건지 모를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이 걱정되었다.
"교주, 독성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어디?"
"인사를 했는데 그냥 무시하고 갔답니다."
난화봉은 바로 교주전 밖으로 나간 다음 내공을 실어 외쳤다.
"독성이 돌아왔다. 먼저 찾는 사람에게 하수오 한 뿌리 준다."
오독교 사람들이 바로 경공을 펼쳐 사방으로 흩어졌다. 난화봉은 고민도 안 하고 한 방향으로 달렸다.
다른 곳은 누구나 돌아다닐 수 있지만, 적안오공이 있던 곳은 난화봉을 비롯해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된다.
오독은 나무와 풀 그리고 짐승 사체가 썩으며 생긴 독이 뭉쳐서 생긴 거다. 불로 태우면 당분간 사라지지만, 땅에 두껍게 쌓인 나무와 풀 그리고 짐승 잔해를 모두 치우지 않으면 또 생긴다.
오독교가 다른 일을 다 제치고 적안오공의 영역을 정상으로 돌리는 데 몰두할 수 없기에 여전히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남았다.
오독이 예전보다 약해진 것도 있고 난화봉이 그간 큰 성취를 이룬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예전의 절반 이하로 줄어든 오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오지의 중심에서 무룡과 만났다.
"독성, 오랜만이야."
고개를 돌려 난화봉을 바라보던 무룡이 손가락을 뻗어 땅을 가리켰다.
"아, 거기 있던 나무? 그거 내 건데."
뿌리가 뽑혔는데도 멀쩡했다. 게다가 가지 하나 없이 곧게 자란 것도 신기하고. 뭔지 모르지만, 특별한 나무라는 생각에 난화봉이 교주전에 갖다 심었다.
난화봉의 말에 무룡은 바로 몸을 돌려 교주전으로 달렸다. 난화봉은 무룡의 소매를 잡은 채 숨을 헐떡이며 겨우 따라갔다.
예전과 달리 무룡의 경공은 난화봉이 전력을 다해도 뒤꽁무니만 쳐다봐야 할 정도로 대단하게 변했다.
"그거 내 거야.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니지?"
무룡이 소매에서 돌을 깎아서 만든 작은 상자를 꺼내 난화봉에게 건넸다.
상자를 들고 코를 킁킁거리던 난화봉이 환호했다.
"홍안섬여? 정말 귀한 놈을 얻어왔구나."
교주전에 도착한 난화봉은 강아지풀처럼 생긴 물건으로 살살 간질이기도 하고 입을 맞추기도 하면서 완전히 홍안섬여한테 정신을 뺏겼다. 그래서 무룡이 뭘 하는지에 관심도 없었다.
무룡은 뿌리에 자하구를 달고 있던 나무를 찾아냈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나무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무룡은 나무 밑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기만 했다.
홍안섬여를 싫증 날 때까지 실컷 갖고 논 난화봉이 드디어 무룡에게 주의를 돌렸다.
"독성, 뭐해?"
무룡은 눈길조차 안 주고 나무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무에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고? 거름도 듬뿍 주고 물도 매일 줬는데 아무 소용 없었어."
벽력문의 넷째와 마찬가지로 난화봉 역시 무룡의 생각을 용케 읽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나무에 꽃이 폈다. 어떠한 조짐도 없이, 정말 느닷없는 짓이었다.
깜짝 놀란 난화봉은 무룡과 나무와 멀리 떨어졌다. 바깥사람들보다 죽음의 위험이 수십에서 수백 배 큰 오독교 사람들은 특이한 걸 보면 다가가기보다 물러서는 게 습관이 됐다.
그렇지 않은 자 중 지금까지 숨 쉬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보통 꽃망울이 자라다가 펴서 꽃이 된다. 그런데 나무에서 핀 꽃은 활짝 다 핀 다음 성장했다. 처음엔 들꽃처럼 작은 크기였던 것이 어느새 무룡 머리통보다 더 커졌다.
그러고도 성장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꽃은 지름이 무룡의 팔 하나만큼 커진 후에야 성장을 멈췄다. 그리고 꽃잎을 하나둘 떨구더니 열매를 맺었다.
꽃의 크기와 비교해 열매는 정말 초라했다. 살구보다도 작고 색도 보라색이어서 선뜻 손을 대기 망설여졌다.
무룡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열매를 따서 통째로 삼켰다. 그러더니 아무 말도 없이 교주전을 떠났다.
난화봉이 경공을 펼쳐 쫓으려 했으나 아까보다 훨씬 빨라진 무룡을 채 일 리도 못 쫓고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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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은 소가주의 눈 밖에 난 탓에 한직 중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남궁인의 주 업무는 양주의 분가에서 비둘기를 키우는 일이다. 중요한 서신을 전달하는 비둘기이기에 아무한테나 맡길 수 없지만, 남궁인의 무력이나 그간 세운 공을 생각하면 좌천이나 다름없다.
덕분에 피로 이어진 가족을 빼면 남궁인과 가까이하려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런 남궁인에게 손님 둘이 찾아왔다. 겉모습은 중년이나 엄청나게 늙어 보이는 사내와 눈에 총기가 흘러넘치는 소녀였다.
"남궁세가를 구하고 싶으면 소주로 가라고?"
중년 사내가 귀찮음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저었다. 갑자기 부리가 빨간 까마귀가 나타나서 남궁인이 돌보는 비둘기를 모두 내쫓았다.
일부 양주에서 태어난 비둘기는 둥지 근처를 계속 맴돌았지만, 항주나 소주에서 키워 데려온 비둘기들은 날아서 사라졌다.
"도망친 비둘기를 잡으러 간다고 쳐. 가족도 볼 겸 그냥 소주로 가."
화가 치민 남궁인이 검을 뽑았다. 그런데 나이도 어려 보이는 소녀가 손을 휘두르자 힘이 쑥 빠져 검을 뽑다 말았다.
"멸화장이다. 당분간 내공을 못 쓸 거야. 그러니 말을 타고 소주로 가. 안 그럼 남궁가가 멸문한다."
소녀의 차가운 목소리에 남궁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히 하인에게 말을 준비시킨 동시에 편지에 자초지종을 간단히 적어 양주 분가를 책임진 장로한테 전하게 한 다음 소주로 말을 달렸다.
- 작가의말
무룡은 계획이 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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