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산장
천검산장이 절검문의 본진이다.
이 사실은 강호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위치가 되는 사람이라면 소문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마교 교주도 헷갈릴 정도로 서문문검과 절검문주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천검산장과 절검문도 같으면서 다르다.
천검산장은 구중진九重陣으로 보호받는데, 절검문은 구중진의 가장 안에 자리했다. 진법으로 아홉 공간이 겹친 거라고 하는데, 무룡은 당시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구중진으로 들어가는 법을 모르는 무룡은 천검산장의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얼굴은 분 바른 듯 곱고 눈썹은 붓으로 그린 듯 진하고 입술은 인주를 바른 듯 선명하게 붉다. 화무룡과 백년가약을 맺은 강호 제일의 재녀로 유명한 서문춘영이 검을 들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누구냐?"
무룡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벽파검법도 아니고 절검문에서 배운 질풍약영도 아닌 간단한 휘두름이었다.
그러나 검을 마주한 서문춘영은 원래 하얗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려 원앙검을 번갈아 휘둘렀다. 원앙검은 검과 칼과 닮은 한 쌍의 무기인데,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다.
짧은 건 검을 더 닮았고 긴 건 칼을 더 닮았는데, 원앙검법에 가장 적합한 형태의 무기다. 그래서 다소 애매한 모양에도 원앙검으로 불렸다.
"강적이다."
은은하게 저린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서문춘영이 외쳤다. 얼굴과 다재다능한 거로 강호에 유명하지만, 무공도 낮은 수준은 아닌데 무룡의 보기엔 정말 간단한 일 검에 여지없이 패퇴했다.
기척도 없이 네 사내가 나타났다. 똑같이 연한 푸른색의 장포를 입었고 생김새도 비슷했고 무기 역시 똑같은 길이와 모양의 검이었다.
"오행검진."
서문춘영이 오행의 중심이 되는 토를 맡고 남은 넷이 각자 방위를 잡았다. 상생으로 수비를 돕고 상극으로 불의의 일격을 가하는 서문세가 특유의 오행진인데, 무룡에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진법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지만, 겨우 다섯으로 이뤄진 진법에서 틈을 찾는 건 그리 난해한 일이 아니었다.
"무슨 검법이지?"
잔잔하게 스며든다. 너무 잔잔하여 어떻게 막을지 막막하다. 강하게 휘몰아오면 힘으로 상대할 텐데, 잔잔하니 대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스며들어서 갑자기 광포하게 변한다. 바람이 없으면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룡의 검법엔 해당하지 않았다.
무룡과 검을 두 번째로 부딪힌 서문춘영은 원앙검을 바닥에 떨군 채 양손을 부르르 떨었다. 분한 것도 있지만, 너무 강한 힘에 손아귀 힘이 완전히 풀려버린 것이다.
단련이 어려워서 타고나야 하는 손아귀 힘이어서 여자인 서문춘영이 크게 불리했다.
네 사내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사상진으로 바꿨다. 공격을 당하는 한 명과 곁에 사람이 수비하고 남은 둘은 공격하는 단순한 진법이다.
그러나 넷이 합친 것보다 열 배 정도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기도 하다.
"속았다."
무룡은 성동격서의 수를 펼쳤다. 앞에 선 사내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뒤의 사내를 핍박했다. 앞으로 스며들던 잔잔한 냇물이 갑자기 뒤에서 파도를 일으키자 서문세가의 사내들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무룡의 공격에 검이 부러진 사내가 물러나고 삼재진으로 바뀌었다. 사람이 적어졌는데 오히려 변화가 훨씬 복잡해졌다.
천이 지휘하고 지가 보조하고 인이 나서서 공방을 벌인다. 문제는 천지인의 역할이 수시로 바뀌어 가운데 갇힌 사람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이다.
무룡 역시 아까완 달리 가만히 서서 기회만 노렸다.
"저거 화산파 태청검법!"
무룡이 화무룡의 가장 자신 있는 초식인 농매삼문을 펼쳤다.
물론, 화무룡의 것보다 화려함이 부족했다. 그리고 화무룡처럼 농매삼문을 세 번 연속 펼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천지인의 역할이 자주 바뀌어 진법의 약점인 인을 노리기 어려운 상황을 쉽게 타파했다.
"너 도대체 누구냐?"
무룡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북천검이 나타났다. 북천검을 본 무룡이 미간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하마터면 자신을 황천길로 보낼 뻔했던 자임을 기운으로 알아본 것이다.
"내가 그대의 검을 받아보겠소."
북천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직한 찌르기가 들어왔다. 이는 절대 벽파검법의 수법이 아니다. 벽파검법은 일격필살보단 끊임없이 몰아쳐서 틈을 만들어 찌르는 걸 기본으로 한다.
질풍약영 역시 어딜 공격할지 모를 표홀한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다. 절대 지금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정직한 찌르기를 펼치지 않는다.
북천검은 양의검법으로 무룡의 검을 받았다. 북천검의 양의검은 수비와 수비, 수비와 공격, 공격과 수비, 공격과 공격을 펼치는 검법이다.
상대가 변화하면 양의검의 남은 하나로 대처하고, 상대가 또 변화하면 양의검의 하나를 다시 끄집어낸다.
상대는 하나를 계속 변화하는데 양의검은 둘이 번갈아 변화하기에 여유가 있다.
즉, 양의검은 변화가 느린 듯 보이나 사실상 변화를 기반으로 하는 검법이다.
"고수다."
북천검이 저도 모르고 입을 열어 말했다.
검법의 기세가 강하고 변화가 느려서 대부분 사람은 양의검을 강검 계열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변이나 환으로 기만하여 이득을 취할 생각을 하지 무룡처럼 처음부터 강하게 나오지 않는다.
무룡의 정직한 찌르기는 세찬 파도에도 끄떡없는 바위처럼 양의검의 거듭된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파도가 계속 몰아치면 바위는 조금씩 마모되어 사라진다. 그러나 파도가 바위를 닳게 하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근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내공도 무룡에게 못 미치는 북천검은 무룡의 찌르기를 흔들지 못하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북천검이 당황하자 서문춘영도 생각을 바꿔 안으로 신호를 보냈다. 이젠 천검산장이 아닌 절검문이 나서야 한다.
서문춘영의 신호를 받은 서문문검은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 상대를 탐색하면서 차분하게 대응하면 선배가 질 수 없는 싸움입니다. 너무 양의검만 고집하지 마시고 상대에 맞춰 변화하는 유연함을 갖추십시오."
호익을 반납하고 절검문의 대호법이 된 북천검은 강호에서 자신보다 검을 잘 다루는 자가 검극하고 서문문검을 제외하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 새 검법을 배우는 것도 그리 탐탁지 않고, 새로운 걸 접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큰 부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검법은 그저 비급을 읽으며 참고하는 정도로 하고 양의검을 더 높은 경지로 이끌려 했다.
그런데 바로 양의검을 고집하는 그 마음 때문에 시야가 좁아졌다. 거기에 유연성도 부족하여 새파랗게 젊은 무룡에게 찌르기 하나로 당하자 바로 당황하여 어쩔 바를 몰라했다.
"문주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겠소."
서문문검은 안타까움이 절로 일었다. 검에 관한 재능은 자신이 더 뛰어나지만, 무공에 관한 재능은 북천검이 한 수 위다.
강호에 실전된 지 수백 년 되는 양의검을 익히고 호익을 반납한 것만 봐도 쉽게 아는 일이다.
그러나 양의검을 익히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바람에 새로운 무공을 익힐 최적의 시기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만약 양의검처럼 괴이한 검법 말고 정통 검법을 익혔다면 어린 나이에 대성하였을 거고, 눈길을 돌려 수많은 무공을 접하다 보면 새로운 검법을 창안해 대종사로 찬양받았을지도 모른다.
'이자는 북천검보다 그릇이 더 크다. 그리고 검법에 구애받지 않고 상황과 상대에 따라 검을 쓴다.'
마음의 짐을 덜어버린 서문문검은 정신 수양에 아주 높은 성취를 이뤘다. 자신을 의심하고 북천검을 질투하던 마음은 버린 지 오래고,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오히려 도우려는 마음부터 생겼다.
"부족한 몸이지만, 감히 그대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살피고자 하오."
말을 마친 서문문검이 검을 뻗었다. 무룡의 것보다도 훨씬 간단한 찌르기였고, 움직임도 훨씬 자유로웠다.
그에 맞서 무룡의 검이 화려한 궤적을 그렸다. 그러나 한참 움직이다 말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안목이 대단하오. 그런데 검을 다루는 솜씨가 안목을 못 따라가는구려."
무룡은 정확한 대응책을 알았으나 그걸 검으로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단전이 없어서 맹룡도와 호세도로 기운을 움직이기에 검법에 필요한 양만큼의 기운을 제때 정확히 조달하지 못한 탓이다.
서문문검은 베기와 내려치기 훑기 등을 펼치며 무룡의 반응을 살폈다. 마찬가지로 끝까지 대응하지 못했지만, 무룡의 대처가 점점 능숙해졌다.
"하하. 실례했소. 감히 내가 살필 그릇이 아니었군. 혹시 절검문의 일원이 되고 싶으시오?"
무룡이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부친. 행적이 불분명한 자입니다. 아까 화랑의 태청검법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화랑은 화무룡을 일컫는 말이다. 태청검법 전수자가 화무룡이 유일하기에 서문춘영이 의심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화산에서 태청검법 비급을 찾아내 장문인과 장문제자도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세상에는 검법을 한두 번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천재도 있는 법이다."
말을 마친 서문문검이 돌아서서 무룡에게 등을 보이며 걸었다. 무룡은 검을 검집에 넣은 다음 서문문검이 밟은 방위를 똑같이 따라 하며 뒤를 따랐다.
북천검 역시 무룡의 뒤를 따라 구중진으로 들어갔다.
코를 찡그리고 고민하던 서문춘영이 경공을 펼쳐 자신과 화무룡이 사는 별채로 빠르게 달렸다.
"화랑, 방금 태청검법을 펼치는 자를 만났습니다."
"화산의 제자요?"
비록 화산과 연을 끊었으나 뿌리는 그렇게 쉽게 잊히는 게 아니다. 화진악과 부자 관계를 청산할 정도로 심지가 굳은 화무룡이지만, 화산에 대한 애정은 어쩔 수 없었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화무룡을 보며 서문춘영은 기가 차서 혀를 찼다.
"늘 똑똑한 사람이 왜 화산만 거론되면 바보가 될까요? 태청검법을 높은 수준으로 익힌 자가 꼭 화산 제자라는 법은 없잖아요."
"어떤 자요?"
서문춘영은 자신이 본 사람의 모습을 자세히 구술했다.
"키나 덩치를 보면 무룡인데, 얼굴은 또 완전히 아니고."
무룡이라는 말에 서문춘영이 화들짝 놀랐다.
"그 여의주를 삼켰다는 사람?"
"그것까진 모르겠는데, 강호행 자격을 두고 벌인 비검대회에서 날 궁지로 몰았던 사제요. 단전을 잃고 의원이 되었는데 태청검법을 익힌 걸 보면 완전히 회복했나 보오."
서문춘영은 절검문 제자가 아니지만, 화무룡보다 아는 게 조금 더 많다.
'큰일이다. 그자가 보복하려고 찾아온 게 틀림없다. 아버지가 위험해.'
"화랑, 가서 그자가 무룡이 맞는지 확인하고, 옳든 아니든 아버지께 그자가 무룡인지도 모른다고 얘기해요."
- 작가의말
상대가 못 알아보게 얼굴까지 바꾼 무룡의 꿍꿍이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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