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세가
남궁세가의 중견고수 남궁인은 심심했다. 심심한 나머지 관선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운송선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거로 시간을 보냈다.
"인아. 첩이 셋이나 되는데도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냐?"
"장로님, 아닙니다."
"밖에선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거라. 같은 혈족끼리 직책으로 부르는 것도 신물이 난다."
장로 남궁영천은 남궁인 아버지의 쌍둥이 동생이다.
"삼촌. 저기 면사포로 얼굴 가린 여자 보입니까?"
"허! 네가 삼화취정을 넘어 오기조원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이 거리에서도 저 면사를 뚫고 여인의 얼굴을 확인했다는 것이냐?"
"아니, 삼촌은 제가 여자에 환장한 놈으로 보입니까? 저 여자 곁에 덩치 큰 사내놈 때문입니다."
"네가 드디어 여자에 환멸을 느끼고 남색을 탐하기 시작했구나."
삼촌만 아니었으면 정말 때리고 꼬집으며 온갖 악독한 수법으로 괴롭히고 싶은 사람이다.
"삼촌. 세상이 흉흉하잖아요."
"그럼. 언제 자객이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여자보단 남자랑 자는 게 훨씬 안전하겠지. 사랑의 힘으로 든든하게 지켜줄 테니."
"용혈이 마른다는 소문이."
남국영천은 황급히 조카의 입을 틀어막았다.
"관선이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용혈은 황실 혈통을 말한다. 세간에는 그저 소문으로만 돌지만, 남궁세가 정도가 되면 소문의 진위를 가리는 게 어렵지 않다.
황실의 혈통을 이은 자들이 하나씩 죽어가고 있고, 그 배후는 누구도 아닌 황태자라는 정황이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중요한 얘기니까 마저 들으세요."
삼촌의 손을 뗀 남궁인이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했다.
"이런 상황에 용혈 한 분을 남궁가에 모시면 참 좋지 않겠습니까?"
"저 여인이 공주라도 된다는 말이냐? 그걸 넌 또 어찌 알았느냐?"
"아니. 우린 저 여자 곁에 사내 얘기를 하고 있었잖아요."
"네가 호위의 얼굴을 알아보고 여인이 공주라는 사실을 유추했다는 거 아니었어?"
"아니요. 저 사내가 용혈이라고요."
남궁영천은 다시 조카의 입을 틀어막았다.
"평생 궁중에 박혀 사는 용혈의 얼굴을 네가 어찌 안단 말이냐? 잘 생각하고 말해라."
질문을 마친 남궁영천은 조카가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다음 입을 막은 손을 뗐다.
"아버지가 천검산장의 전대 가주 서문진후 대협과 막역지교 아닙니까."
"하긴, 내가 둘이 남색을 하는 줄로 오해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지."
"서문 대협이 궁중에서 호위대장인가 하는 직책을 수행한 적도 있고요."
"반란이 한창 심했을 때 황실에서 진짜 믿을 만한 사람들만 은밀히 불러서 호위를 맡긴 적 있지. 아쉽게도 우리 남궁세가는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용혈 하나가 화산으로 갔습니다. 운반한 사람이 서문 대협이고요. 평생 딱 아버지한테만 얘기했고, 아버지는 그 얘기를 저한테만 하셨습니다."
남궁인의 아버지는 정력이 왕성하여 아들만 열이 넘는다. 그런데 평소 제일 덤벙대는 듯한 남궁인한테만 비밀을 토로했다.
"네 아버지가 그때 잠깐 노망이 드셨나?"
"무거운 비밀은 입도 무겁게 한다고 오판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비밀은 삼촌께 처음 말하는 겁니다."
남궁영천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 조카의 뒤통수를 하나 세게 때리고 싶었다.
"근데 넌 얼굴을 어떻게 아냐고."
"몇 년 전에 너무 궁금해서 화산에 가서 확인한 적 있습니다. 다행히 노혼 선배가 제자를 한 명만 들여서 헷갈릴 염려도 없었습니다."
"진짜라고 확신하느냐? 저자는 그림자고 진짜 용혈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잖아. 아예 화산이 아닌 다른 곳으로 보냈는지도 모르고."
"화산 제자 중 나이가 맞는 자는 저 청년과 화무룡 뿐입니다. 설마 용혈이 화진악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까? 황실에서 존엄이 훼손되는 걸 참는다고 해도 화진악이 감히 감당하겠습니까."
"뭐가 더 있구나. 확신하는 근거가."
"왼쪽 귀밑을 살피십시오."
남궁영천은 눈에 내공을 집중하고 한참 지켜봤다. 그러다 무룡이 고개를 돌리는 사이에 귀밑에서 붉은 점을 발견했다.
"황실에서 남긴 표기라고 합니다. 특제한 약을 바르면 사라지는 가짜 기미입니다."
"조카. 잘하면 불혹에 이르기 전에 장로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미리 축하한다."
"다 삼촌이 잘 이끄신 덕분이죠. 삼촌이야말로 그냥 장로 말고 장로회의 일원이 되셔야지 않겠습니까."
"하하. 형님이 자식을 너무 많이 낳는다고 나무랐는데, 너 같은 놈 얻으려고 밤마다 그리 애쓰셨던 게로구나."
둘은 오랜 상의를 거쳐 자세한 계획을 세운 후 관선의 선장에게 작은 배 하나 내리라고 지시했다.
"무룡. 남궁가의 사람이다."
관선에서 배를 내릴 때부터 추영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다 두 명의 사내가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오는 걸 보고 무룡에게 속삭였다.
"남궁세가도 조심해야 해?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흥. 네 목숨이 달린 게 아니라고 전혀 안 대수롭지?"
무룡은 목소리만으로도 추영이 화가 났음을 알고 대꾸하지 않았다. 한 마디 잘못하면 며칠 내내 말꼬리를 잡으며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재주가 아주 뛰어난 여자다.
"아하. 설마 했는데 진짜 무룡이 맞는구나."
강호에 나온 적도 없는 자신을 아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절검문의 고수에 이어 남궁세가의 사람도 아는 척을 해왔다. 무룡은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자신의 다리를 살짝 꼬집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게 꿈이 아니었다.
"누구십니까?"
"사부 얘기는 들었다. 홀로 마교의 장로 셋을 물리치고 비겁한 암수에 죽었다면서? 난 네 사부의 오랜 친구 남궁인이다. 네 사부한테 목숨을 몇 번 구원받았지.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사라져 막막했는데 하늘이 무심치 않아 이렇게 널 내게 보냈구나."
"근데 절 어찌 아십니까?"
"몇 년 전에 네 사부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그때 내가 급히 길을 재촉하다 화산 근처를 지나며 어렵게 짬을 낸 거여서 길게 대화하진 못했는데, 너에 대한 자랑이 끊이지 않더구나. 안부 물으러 가서 제자 얘기만 듣다 떠났지 뭐야. 하하."
"그렇다면 제 사부를 암해한 자가 누군지도 아시는 겁니까?"
"마교의 장로 후문영이다. 불혹을 갓 넘긴 자인데 두각을 드러낸 지 이십 년이 되고 장로 중에서도 실세라고 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아라. 노 형의 원수는 내 원수나 진배없다. 어떤 방도를 써서라도 복수가 이뤄지게 할 거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소질 무룡이라고 합니다."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구나. 그러나 슬프고 서럽다고 수련을 멈추면 아니 된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몸에 살이 많이 붙었구나."
"여의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혹시 곁에 분은 동행이냐?"
"화산 속가제자 춘영이라고 합니다."
추영은 가을을 봄으로 둔갑했다.
"서문문검의 딸과 이름이 같군그래."
서문문검의 딸 서문춘영西門春迎은 문무를 겸비하고 외모까지 뛰어난 강호의 유명인사다.
"헛짚으셨습니다."
화산의 마지막 강호행의 첫 행선지가 천검산장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넘겨짚었는데 아니었다.
"혹시 일행이 더 있느냐?"
"아닙니다."
"그럼 나랑 함께 관선으로 가자꾸나. 넓진 않지만 편하게 잘 방도 내줄 수 있고 이 배와 달리 운하도 탈 수 있다."
"드디어 편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구나."
추영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추영과 다니면서 는 게 눈치밖에 없는 무룡이 재빨리 포권으로 감사를 표했다.
"초면에 후의를 베푸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호의를 거절하는 건 후배된 도리가 아닌 듯하여 염치없지만 따르겠습니다."
무룡과 추영은 남궁인과 함께 배에 탔다. 관병으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는 노를 저어 작은 배를 관선에 붙였다.
"소저도 경공을 익히셨소?"
"앞가림 정도는 합니다."
남궁인은 바로 몸을 날려 뱃전에 드리운 밧줄의 매듭을 한 번 차고 갑판에 착지했다. 무룡과 추영도 남궁인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했다.
관병은 내린 밧줄에 작은 배를 묶은 후 배와 함께 갑판 근처까지 끌려 올라갔다. 배가 단단히 묶인 걸 확인한 후 갑판으로 가 남궁인에게 공손히 인사하고 볼일 보러 떠났다.
"선배께선 혹 관에 몸을 담고 계십니까?"
"아니다. 그저 자사가 우리 가문과 인연이 두터워 가끔 이렇게 편의를 봐줄 뿐이다."
조금 기다리니 다른 관병이 와서 일행을 방으로 안내했다. 잘 정리되긴 했지만, 누군가가 쓰던 방을 급히 냈는지 곳곳에 희미한 흔적들이 있었다.
'없는 방을 만들어 내줄 정도라면 사부와 정이 깊다는 것인데, 왜 나한테 한 번도 말씀하신 적 없을까?'
"혹시 협의행이라고 들어본 적 있느냐?"
남궁인이 불쑥 질문했다. 무룡이 표정을 감추는 일에 능숙치 못해 의문이 얼굴에 드러난 탓이다. 심계가 뛰어난 남궁인은 바로 눈치채고 선수를 쳤다.
"들어는 봤지만, 자세한 건 모릅니다."
"네 사부랑 그때 알게 되었다. 난 약관도 안 된 애송이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이 많다는 이유로 가문이 검을 들려 강호로 내쫓았지. 그때 네 사부가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했다."
남궁인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마 제자한테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거다. 네 사부와 내가 죽인 사람이 천 명은 넘었을 테니. 사실 네 사부와 난 성격도 다르고 배경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다. 친해질 수 있었던 건 내가 목숨을 구원받은 후 죽기 싫어서 계속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남궁인이 짐짓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면 친하다는 건 내 일방적인 착각일지도 모르겠구나. 네 사부는 날 목숨 건지려고 빌붙은 귀찮은 파리로 여겼을지도 모르지."
"사부 얘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남궁인은 노혼과 겪었던 일들을 무룡에게 세세히 들려줬다.
- 작가의말
남궁세가의 대물림 정력꾼 남궁인 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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