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뇌옥
감시의 눈길은 무룡이 측간에 갈 때도 따라다녔다. 주변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노골적이진 않지만, 무룡에게 들키는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무공을 숨긴 게 들켰구나.'
무룡도 속으로 찝찝하던 차였다. 예상 밖으로 독이 체외까지 뿜어져 나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난청응 앞을 막았다.
평범한 사람이면 자신을 구해준 데 고마움을 느껴 무공을 숨긴 정도는 그냥 지나치겠지만, 난청응은 야심이 큰 인물이다. 무룡이 진짜 그냥 의원이어도 살려줄 가능성이 반밖에 안 된다.
측간에서 돌아온 무룡은 적당한 술기운에 기분이 어느새 지붕을 뚫은 의원들한테 짐짓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나무에도 혈도가 있다는 건 아시오?"
"노 신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내 직접 보여드리리다."
말을 마친 무룡은 죽통에서 은침을 꺼내 무사가 선물한 복사꽃 가지에 꽂았다.
"어어, 나 취했나?"
의원들이 놀라움에 경탄을 토했다. 일부는 자기 눈이 잘못됐는지 의심하며 손등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물병에 꽂은 복사꽃 줄기에서 움이 트고 새로운 꽃망울이 돋았다.
잘린 가지에서 이파리가 나고 꽃망울이 생기는 것만 해도 신기한데, 보통은 며칠 걸려야 하는 과정이 순식간에 끝났다.
그리고 놀랄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공을 안 익힌 사람이 봐도 고수인 게 표가 날 정도로 날렵한 자들이 갑자기 방에 나타났다.
"흔적을 찾아."
놀라운 일을 연속으로 겪으며 술이 깬 의원들은 그제야 무룡이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
"뭐지? 꿈인가?"
식은땀으로 등이 푹 젖은 의원 하나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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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복사꽃 가지에 생기를 주입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감시자들마저 놀라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걸 감지하자마자 바로 도주했다.
'고맙소.'
솔직히 위험을 경고한 무사에 대한 의심이 조금은 있었다. 그러나 북쪽으로 도망치다가 술판을 벌이는 경계 무사들의 모습을 확인한 후엔 의심이 깨끗이 가셨다.
엄중히 경계해도 무룡의 경공이라면 안 들키고 도망칠 수 있다. 그런데 무사는 굳이 경계 중인 자들을 모아놓고 술판을 벌이는 거로 무룡의 도주를 도우려 했다.
마교도 선입견 때문에 처음엔 모두 안 좋게 생각했는데, 설사 진짜 나쁜 사람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한텐 정말 친절했다.
남화교 역시 강호에 혈교로 불리고 혈영살수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은혜를 갚는 올바른 사람이 있었다.
'그렇다고 혈교의 모든 사람이 저렇다고 기대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세 겹의 경계망을 벗어난 무룡은 은밀함을 버리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진법 사이에 생긴 틈을 찾아 바로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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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라잡이를 최대한 모았습니다."
길라잡이는 대부분 가문에 귀속하지 않았다. 외부인과 접촉하는 길라잡이들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있고, 특정 가문과 유착이 심한 길라잡이는 다른 가문의 손에 죽어 사라졌다.
가문에 어떤 손님이 오는지 시시콜콜 다 알려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탓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길라잡이는 중립인 게 당연하게 되었고, 길라잡이한테 손님의 정체를 캐묻지 않는 불문율도 생겼다.
길라잡이들 역시 목숨 귀한 줄 알아서 손님을 안내할 때 대화를 최대한 자제했다.
그래서 아무리 남화교에서 단일 가문으로 가장 강한 난씨여도 원하는 만큼 길라잡이를 모으지 못했다.
"쌀 열 가마니가 우습나 보네."
난청응이 푸르뎅뎅한 얼굴로 호통쳤다.
심복을 비롯해 가문의 어른들 모두 무룡을 죽여 없애고자 할 때 혼자 더 큰 쓸모가 있을 거라고 우겼다.
그런데 무룡이 갑자기 도망쳐서 진법에 몸을 던지는 바람에 난청응만 난처하게 되었다.
"그게 아니고. 며칠 전에 미씨 가문이 길라잡이를 대대적으로 고용했습니다."
수하의 말에 난청응은 속에 가득한 분노와 억울함 그리고 누구한테 쏟아야 할지 모를 원망 등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이유는?"
"지하뇌옥이 고립되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지하뇌옥엔 뭔가 캐낼 게 있는 사람을 가두는 곳이다. 그러나 캐내지 못할 바엔 차라리 죽어 사라지는 게 나은 사람이기에 진법 한가운데 만들었다.
늘 사라지고 생기는 진법의 틈 때문에 가끔 몇 달씩 지하뇌옥으로 출입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기는데, 공교롭게도 바로 지금이었다.
"설마 놈의 목적이 지하뇌옥인가?"
자기 가문에 해코지하려는 거라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혈독을 해독해주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다른 가문에 용건이 있다는 건데, 굳이 따지면 외부와 교류가 가장 활발한 미씨 가문이다.
무룡이 미씨 가문에 관한 정보를 은밀히 수집한다는 분석이 있었기에 꽤 그럴듯한 가설이다.
"지하뇌옥에 누구 있지?"
"지금은 둘밖에 없습니다. 남은 자들은 다 자결했다고 합니다."
"둘이 누구야?"
"하나는 경공만큼은 천하제일이라는 비천각의 각주고, 남은 하나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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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진법을 잘 모른다. 그러나 진법에 난 틈을 발견할 수 있고, 안내하던 길라잡이가 말한 영원히 안전한 곳을 안다.
그리고 이대로 도주할 생각도 없었다. 일단 난씨 가문을 벗어나 안전을 도모하는 게 급선무여서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어떤 진법에도 속하지 않는 곳을 찾아 정착한 다음, 길을 찾아내 남화교가 있는 곳으로 드나들면서 미씨 가문 그리고 난씨 가문에 관해 더 많은 걸 조사할 계획이다.
'여긴 틈이 하나밖에 없다.'
무룡이 원하는 건 틈이 여럿이어서 도주할 때 선택의 여지가 있는 곳이다.
오던 길로 나간 무룡은 다른 틈으로 바꿔서 걸었다. 길라잡이처럼 틈이 사라질 걸 예측하는 능력은 없지만, 설사 틈이 사라져서 진법에 갇히더라도 틈을 찾아 다시 나오면 그만이기에 무룡의 걸음은 거침없었다.
'여기 뭔가 있다.'
무룡은 은신술을 펼쳐 길라잡이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벌써 일곱 명이다. 그리고 손님도 없다.'
무룡은 반나절 사이에 길라잡이를 일곱 명이나 봤다. 그것도 손님 없이 홀로 돌아다니는 길라잡이를.
'중요한 곳이 있거나 중요한 인물이 있는 곳.'
무룡은 거점부터 마련하려던 생각을 바꿔 길라잡이들 뒤를 밟았다. 가끔 길라잡이들끼리 만나면 정보를 교환하는데, 짧은 대화로 현재 상황을 대충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지하뇌옥이라. 잘하면 남화교의 중요한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
무룡은 계속 길라잡이들 뒤를 따르며 정보를 수집했다. 그 과정에 틈이 언제 사라질지 계산하는 술식도 배웠고 지하뇌옥의 정확한 위치도 알았다.
'모험을 해야겠다.'
사실 모험이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진법에 갇힌다고 무룡이 다칠 사람도 아니다. 그저 시간을 헛되이 보내 좋은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작은 부담이 있을 뿐이다.
결심을 내린 무룡은 틈 말고 진법에 들어갔다. 곧 숨이 잘 안 쉬어지고 귀에 이명이 들렸다. 그리고 눈 역시 한쪽은 더 잘 보이고 한쪽은 안개가 낀 것처럼 어렴풋이 보이며 거리 감각이 흐릿해졌다.
'이래서 폐가 상했구나.'
무룡은 바로 면면불식으로 내호흡에 전환했다. 뜨겁게 달궈진 공기는 피부를 위협하기엔 부족하지만, 콧구멍이나 기도 그리고 폐를 손상하기엔 넉넉했다.
무룡은 진법에서 전후좌우로 걸으면서 방위는 맞는지 확인했다. 앞으로 걷는 게 뒤로 가는 게 될 수도 있고, 뒷걸음질을 치면 옆으로 움직이기도 한다.
규칙을 찾아내면 정확한 걸음걸이로 이미 위치를 아는 지하뇌옥에 정확히 도착할 수 있고, 지하뇌옥 근처에 도착하면 틈이 생기기를 기다려 바로 안에 진입할 수 있다.
'규칙이 너무 복잡하다.'
무룡은 기억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그런 무룡의 기억력이 무색할 만큼 진법의 규칙이 복잡했다.
지금 걸음을 내딛기 전에 어떻게 걸었는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치기에 규칙이 아닌 규칙을 만든 법칙을 찾아내야 하는 판이었다.
"아빠 멍청이. 이 간단한 걸 몰라?"
문득 추향이 떠올랐다.
"굳이 다 알 필요 있을까? 꼭 필요한 것만 알면 되지."
'엄마 닮아 참 똑똑하구나.'
무룡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생겼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걷는 방법만 찾으면 돼. 굳이 규칙이고 법칙이고 알 필욘 없어.'
무룡은 자신이 원하는 방위를 정한 다음, 그 방향으로 꾸준히 걸을 수 있는 조합을 찾는 데 집중했다. 규칙이 너무 복잡해서 그것마저 어려웠지만, 약 한 시진 고생해서 조금은 에돌아가더라도 결국엔 원하는 곳으로 가는 조합을 찾았다.
무룡은 앞으로 옆으로 뒤로 열심히 걸으면서 꾸준히 지하뇌옥으로 접근했다. 원하는 방향으로 한 걸음 가려고 수십 걸음을 내디뎌야 했지만, 원하는 곳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느낌에 지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몸보다는 머리가, 머리보다는 마음이 괴로운 여정이 지속했다. 그리고 지하뇌옥 근처에 도착한 후에도 틈이 생기기를 기다리느라 사흘이나 기다렸다.
'마환기공은 극에 달했지만, 자환신공은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
그 기다림은 허망하지 않았다. 불친절한 진법의 환경 덕분에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외공으로서 마환기공은 이미 극에 달해 더 발전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자하신공과 결합한 마환기공은 더 나아질 수 있다.
자하신공과 마환기공은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데, 둘을 더욱더 잘 결합하여 부족한 부분을 더 잘 채워주게 하는 방법이 있다.
'진짜 하나가 되면 그땐 또 어찌 될지 모르고.'
무룡은 이미 초식이 무의미하고 심법도 무의미한 경지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유독 애착이 깊은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이 더 나아질 기미가 있다는 것은 아주 기뻤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집중하자.'
남화교가 나쁜 놈이니 지하뇌옥에 좋은 사람이 갇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돌려서 생각하면, 나쁜 놈인 남화교도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진짜 나쁘거나 위험한 존재라고 여길 수도 있다.
기척과 존재감을 최대한 죽인 무룡은 지하뇌옥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었다.
- 작가의말
지하뇌옥에 갇힌 자는?
1. 무룡 아빠
2. 혈교 교주
3. 검극
4.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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