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대군
사마귀와 화무룡은 태산파를 찾아가 마중구문을 함께 대적하자고 제안했다. 태산파는 자신들은 도를 닦을 뿐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며 완곡히 거절했다.
"뭔가 구리지?"
태산파의 도관을 나오자마자 사마귀가 말했다. 화무룡 역시 같은 생각인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기록대로라면 태산파는 우리와 같은 편이다. 그런데 저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기를 거부했다. 이는 마교의 기록이 틀렸다는 뜻이지."
"마교의 선대가 멍청한 게 아니라면 뭔가 확신할 근거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세상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즉, 어떤 이유에서건 태산파가 예전에 마중구문에 적대하는 척 마교를 속였다는 뜻이지."
두 사람은 죽이 척척 맞았다.
"최악의 상황엔 태산파가 마중구문의 손발 혹은 몸통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군."
"좀 더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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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컴컴한 나머지 달마저 검은 구름 뒤에 숨은 깊은 밤.
사마귀와 화무룡은 빛을 빨아들이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야행의를 입고 눈마저 얇은 천으로 가린 채 태산파에 침투했다.
태산파의 지리는 낮에 방문할 때 유심히 살펴 익혀뒀고, 밤이 깊어지길 기다리며 어찌 행동할지 다 정했기에 두 사람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의심이 가는 곳을 모조리 뒤져도 뭔가 수상한 게 나오질 않았다.
"이걸 써야겠다."
사마귀가 품에서 황금색 종이에 붉은 글씨를 쓴 부적을 꺼냈다. 일반 부적보다 몇 배는 큰 종이에는 획이 백 개가 넘은 아주 복잡한 글자가 있었다.
"뭔데?"
"우리 조카가 만든 건데, 이름을 해체부라고 지었다."
말을 마친 사마귀는 화무룡에게 더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부적을 찢었다.
"숨어."
부적을 찢자마자 주변의 기운이 마구 몰려왔다. 깜짝 놀란 화무룡과 사마귀는 재빨리 경공을 펼쳐 가장 가까운 도관의 편액 뒤에 숨었다.
그리고 강한 기운의 움직임을 감지한 태산파의 도사들이 조금 늦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역행의 술? 저걸 펼칠 사람은 하계에 둘밖에 없는데."
무인은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죽기 전까진 칼을 휘두른다. 그게 생존을 위한 본능인지 무인의 자긍심인지는 모르지만, 대부분 무인은 상대가 강하다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술사들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법술임을 인정하고 그저 조용히 지켜봤다.
같은 법술도 펼치는 자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괜히 역행의 술을 저지한다고 어설프게 시도하다가 예상치 못한 횡액을 치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필요한 기운을 다 모은 부적이 불타 사라지고, 부적이 타고 남은 재는 그간 모은 기운을 타고 사방으로 퍼졌다.
그리고 평범한 도관으로 보이던 태산파의 건물들이 모습을 바꿨다.
바닥은 붉은 대리석을 깔아 평평하고, 기둥은 추운 북방에서 자라는 붉은 나무로 세웠다. 기둥을 고정한 주춧돌은 하얀 옥이었고, 도관의 푸른 기와는 비취를 갈아서 만든 거였다.
문과 창문은 창호지를 바른 게 아니라 마노와 호박을 얇게 갈아 끼운 거였고, 허름하게 보이던 나무 편액 역시 은으로 만들고 황금으로 글자를 새긴 거였다.
"입구를 지켜라."
더욱더 놀라운 건, 지상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태산파 도사들은 한 채면 도시 하나와 맞바꿔도 될 도관이 훼손되거나 도난당하는 걸 전혀 개의치 않고 소위 입구라는 곳을 엄중히 지켰다.
- 저기에 들어가면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할 것 같은데.
- 동감이다. 그러나 오늘은 곱게 물러날 궁리나 해야겠지.
사마귀는 화무룡의 전음에 동의했다. 일단 태산파가 뭔가 구린 곳임을 확인한 것과 뭔가 중요한 곳으로 통할 것 같은 입구를 찾은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일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태산파의 도사들은 주문을 외워 검은 털이 짧고 송곳니가 여섯 개씩 난 정체불명의 개를 불러 침입자를 찾게 했고, 편액 뒤에 숨은 둘은 금세 발각되었다.
"이걸 써."
화무룡은 사마귀가 건네는 가면을 썼다. 가면은 뭐로 만들었는지 알아서 얼굴에 찰싹 붙었고, 쭉 늘어나 화무룡의 목까지 덮었다.
'체형이 달라졌다.'
자신도 달라졌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사마귀의 체형이 생소해 보이는 걸 보면 화무룡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디서 온 고인이시오?"
"아미에서 왔다."
"낮에 온 자들과 일행인가?"
"아니. 우린 둘만 왔다."
가면이 체형을 바꿔주고 목소리까지 변조해 준 덕분에 태산파 도인들은 둘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는 낮에 방문한 둘이 순수한 무인임을 확인했기에 오늘 벌인 일의 범인 후보자에서 완전히 삭제한 이유가 컸다.
"검문인가 창문인가? 아니면 청성?"
콕 집어 셋을 말하는 태산파 도인의 질문에 사마귀는 그만 조바심이 났다. 남은 열을 생략한 건 당연히 태산파와 같은 노선을 탔기 때문이고, 태산파와 같은 노선이라는 건 십중팔구 마중구문의 편이라는 뜻이다.
'애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차라리 추향만 보냈으면 일이 틀어질 걸 고민하면 했지 추향의 안위까지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당백호와 난화봉까지 있어 어떤 전개가 될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추향이 제멋대로긴 하나 일행을 버리고 혼자서 안전을 도모할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왜 대답하지 않는 것이오?"
"마중구문의 사람을 쫓아서 왔는데 여기서 종적을 놓쳤다. 그리고 태산파의 진면목을 확인했지."
사마귀는 일단 상대방에 혼란을 주기로 했다. 과연, 사마귀의 말을 들은 태산파의 도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자기들끼리 사이가 안 좋은가 보군.'
크게 기대하고 한 거짓말은 아닌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오늘 기억을 지운다면 곱게 보내주겠소."
뜻밖의 말에 사마귀와 화무룡 모두 잠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강호의 문파라면 이유가 어찌 됐든 무조건 둘을 죽이거나 잡아서 구금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태산파 도사들은 둘이 절대 떠올릴 수 없는 제안으로 혼란을 줬다.
"거절한다."
상대에게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면 앞서 했던 거짓말이 모두 들통날 수 있다. 사마귀는 급한 나머지 깊이 생각지 않고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그럼 수고스러운 대로 죽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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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벼루의 모습이 구슬로 변했다.
이름이 성화령이어서 길쭉한 명패와 같은 모습을 기대했는데, 일견 평범한 검은 구슬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외관과 달리 허공에 둥실 떠서 불에 타는 모습은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가자."
동굴 밖으로 나가자 이미 백만 명이 넘은 교도가 밖에 있었다. 장로를 비롯한 지위가 높은 자들은 동굴과 가까운 곳에서 기다렸고, 남은 자들은 세세겁화봉은 물론 산자락까지 새까맣게 덮었다.
"나 사마영이 교주의 이름으로, 성화령의 권위로 고한다."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어 바늘이 떨어져도 천둥소리처럼 들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심지어 짐승과 벌레들마저 교주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듯 울음을 완전히 멈췄다.
"무기를 들고 전우의 손을 잡아라. 성전이 시작됐다. 우린 세상에서 혈교를 지워 성스러운 불의 위엄을 천하에 알린다."
영역에 침범한 적을 위협하는 맹수의 울부짖음을 닮은 괴성이 백만이 넘은 자의 목구멍에서 동시에 쏟아졌다.
숨죽이고 있던 짐승들이 뛰쳐나오고 숨었던 새들이 사방으로 도망쳤다.
"연로한 부모를 모시는 자, 유년한 자식을 보살피는 자, 집에 유일한 남정인 자, 열여섯 살 미만인 자, 오십 이상인 자는 알아서 빠져라."
말을 마친 사마영은 붉은 피풍의를 날리며 허공을 걸었다. 인간이 아닌 신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 교주의 위용에 마교도들은 고함을 지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세세겁화봉이 정의연에 함락당하며 느꼈던 수모가 일시에 씻겨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성화령이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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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혼과 덕구는 사내가 준 명패를 들고 큰 도시의 표국을 찾았다. 명패를 본 표국주는 둘을 극진히 모셨지만, 정작 며칠이면 만날 수 있다던 사내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처리할 사안이 많아 늦었소."
자신들의 정체가 들킨 게 아닌지 슬슬 불안하던 차에 끝내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오. 표국주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소."
노계혼의 공치사에 표국주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 같아선 거하게 한 상 차려서 회포를 풀고 싶지만, 사안이 급하오."
"그거 아쉽게 됐소."
노계혼이 입맛을 다셨다.
"단도직입으로 묻겠소. 두 분은 마교 출신이오?"
"아니오. 난 장안에서 자랐고 내 사제는 동해의 섬에서 자랐소. 흑응조 때문에 그러는 거 같은데, 내 사부가 마교와 거래해서 얻어낸 것이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소. 흑응조를 익힌 귀한 인재를 마교가 함부로 밖을 나돌게 하진 않을 테니."
"이거 귀한 거요? 그냥 흔한 외공인 줄 알았는데."
노계혼의 말이 모두 진실로 들리지 사내도 더는 지체하지 않고 용건을 꺼냈다.
"마교가 백만이 넘은 군세로 중원을 침공했소."
노계혼과 덕구는 깜짝 놀랐다.
"진짜요?"
"혈교를 친다는 핑계를 대는데, 그러려면 중원의 절반이나 되는 땅을 경유해야 하오. 백만이 넘은 무리가 고분고분 지나칠 리가 없지 않겠소? 더구나 마교인데."
사내는 말하면서 둘의 기색을 살폈다. 그러나 자신들을 마교 소속으로 전혀 생각지 않는 둘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사내의 말에 동의했다.
궁벽한 곳에 사는 마교 교도들은 약탈할 기회가 생기면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말인데, 나랑 평소 친분이 깊은 분들을 안전한 곳으로 호송하는 일을 도왔으면 하오. 여기 표국주가 세 지역을 맡았는데, 두 분이 손을 보태주면 사례는 톡톡히 하겠소."
- 작가의말
독왕 캐릭터는 2년 전부터 생각해 뒀습니다. 그때는 순수한 무협으로 쓸 생각이었죠. 그러나 무협이라는 장르 자체의 한계성을 실감하고 확장을 고민하던 중, 선협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접하게 됐습니다.
합법적으로 무협에 판타지 요소를 끼워 장르의 틀을 아예 깨부숴도 되는 마법의 단어에 즐거운 것도 잠시, 둘을 어찌 합쳐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간 여러 시도가 있었는데 그나마 이번 글에서 나름대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고 봅니다.
이제 현대물까지 결합하면 외래어의 사용이랑, 을씨년스럽다 같은 특정 시대와 맞물리는 단어를 쓰지 못하는 문제까지 해결됩니다. 그러고도 무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고민이지만, 일단 현대 배경의 판타지가 섞인 무협을 언젠간 시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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