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면반격
추영은 노계혼과 덕구가 보낸 정보를 마교가 그간 모은 것들과 취합했다. 당백호를 따르는 자들 역시 정보 수집을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교차하여 대조하면 가짜나 부실한 정보는 자연스럽게 걸러졌다.
'가족이 우선이다.'
추영 역시 어려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그래서 추향과 마찬가지로 가족에 대한 집착이 다소 심한 편이었다.
"황실을 전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던 암중 세력이 있다."
추영의 말에 당백호의 수하 대부분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제국이 망했음에도 당백호의 어진 품성과 용혈이라는 명분 때문에 따르는 자들이다.
"현재 각지에 난립하는 군벌 중 약 오 할에서 칠 할 정도가 이 암중 세력의 하수인이다."
"사실입니까?"
믿기지 않는지 누군가가 의문을 제기했다.
"오 할은 확실하다."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대단한 황실도 천하의 모든 세력을 아우르지 못한다. 그저 제국의 품에 있는 게 더 이득이어서 누구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천자라는 명분도 없이 천하의 오 할 이상을 수중에 넣은 세력이 있다고 하니 도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황실 역시 이들의 꼭두각시였다."
이들은 당백호를 따르는 자들이지 추영을 따르는 자들이 아니다. 무룡이 나섰다면 좀 더 고분고분 따르겠지만, 추영이 이들을 수족같이 부리려면 어느 정도 충격을 줘서 정신을 못 차리게 해야 한다.
"정녕 믿을 수 있는 말입니까?"
반발은 추영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난세에 영웅이 나고 패망하는 왕조에 충신이 난다. 이들이 제국과 용혈에 대한 충성심은 추영의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그래. 전대 황태자께서 이 세력과 싸우다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전대 황제 폐하가 드러누운 건 황태자께서 손을 쓴 것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추영은 자신의 말에 꽤 확신했다. 비록 장공주를 따르던 시녀들의 말과 황태자비와 대담하며 흘러나온 조각들을 조합한 것뿐이지만, 무룡의 사연까지 합치면 꽤 그럴듯하다.
거듭 몰려온 충격에 당백호를 따르는 자들은 정신을 못 차렸다.
"태후께선 어떤 복안을 갖고 계시는지요?"
"천족충千足蟲(지네)의 발 백 개를 자르면 남은 구백 개로 걷는다. 그러나 천 개 모두 자르면 꿈틀거리는 거로 움직이지. 난 암중 세력의 손발을 모두 자른 다음 꿈틀거리는 몸통을 찾을 생각이다."
"분부만 내려주시면 불가마라도 뛰어들겠습니다."
"불가마에 왜 뛰어들어. 우린 어두운 곳에 있고 상대는 밝은 곳에 노출되었는데."
노계혼과 덕구의 정보로 네 명의 군벌 가족이 몸을 숨긴 곳을 안다. 그 넷에서 규칙성을 찾은 뒤, 그 규칙에 부합하는 곳을 최대한 찾아 확인했다.
그리고 검증을 통해 아닌 곳을 일부 배제했고, 확실한 것들만 이용해 새로운 규칙 혹은 연결 고리를 찾아냈다.
그런 식으로 추가와 배제 그리고 재검증을 통해 하나의 그물을 찾아냈고, 전혀 정보가 없는 그물코 몇 개를 확인하는 거로 확신을 얻었다.
"경들은 제국의 충신인가?"
추영의 시원한 목소리가 냉엄하게 울렸다. 추향과 달리 추영은 고귀한 기품이 넘쳐 여전히 앳된 외모임에도 위엄이 가득했다.
"소인들은 제국을 위해 살고 제국을 위해 죽겠습니다."
"제국이 다시 일어설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제국의 일원으로서 세상을 바르게 하는 경들의 노고는 천추만대 미담으로 전해질 것이다. 이제부터 우린 철저한 계획으로 움직여 놈들의 수족을 순서대로 잘라낸다."
마교의 암살 부대 야효夜梟, 추영의 지시에 따라 덕구가 키운 독무곡의 독살 부대 향미響尾, 장공주의 비밀 부대 암향暗香.
어둠에 서식하던 자들이 마교의 성녀이자 독무곡의 부곡주이자 제국의 황태후인 추영의 명에 따라 일시에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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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정녕 황제 폐하요?"
"무엄하다!"
추향의 입에서 추상같은 호령이 터졌다. 그러나 헤실헤실 웃는 얼굴을 보면 재밌어 죽기 일보 직전이다.
"감히 폐하를 의심하다니. 폐하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직접 백만 대군을 몰아 저 무엄한 자의 구족을 멸하겠나이다."
당백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추향이 한창 신났을 때 찬물을 끼얹으면 꾹 참았다가 다 잊었을 때 보복한다.
차라리 하독하거나 때리거나 하면 괜찮을 텐데, 추향의 보복은 단순하지 않다. 웬만큼 강인한 자도 정신이 피폐해져서 한동안 추향의 그림자만 봐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다.
촉씨 소녀를 쫓던 자들은 얼굴에 멍이 몇 개씩 생긴 채 한쪽에 몰려 있었다. 추향이 당백호가 황제라고 주장하자마자 비웃음이 곳곳에서 터졌고, 그때 비웃은 자들 모두 추향의 따귀를 피하지 못했다.
소녀검을 상대하느라 정신을 분산할 여력이 없어 안 웃은 수염이 긴 장로는 다행히 추향의 모진 손길을 피해 체면을 지켰다.
"제국은 무너졌고 장안은 폐허가 되어 생존자가 하나도 없었다고 들었소."
장로는 검을 양손으로 꽉 잡은 채 땀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보이지 않는 기세가 사방에서 압박하는 바람에 가만히 있는데도 심력과 체력 소모가 극심했다.
"그걸 아시면서도 혼약을 폐기하지 않고 절 평생 규방에 가두려 했군요."
촉씨 소녀가 이를 꽉 물고 말했다. 보통 열넷이면 시집을 가고, 열여섯이면 아이를 낳는다. 열여덟에도 시집을 못 가면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스물이 넘으면 노처녀 소리를 듣는다.
그건 대가문의 아가씨라고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 대가문의 외동딸이기에 유언비어가 더 많았다.
"제국의 위엄을 등에 업고 왕이라도 되려고 했나 봐?"
추향의 말에 장로의 땀방울이 더 굵어졌다.
"힘도 있고 명분도 있고. 시운만 잘 타면 황제도 되겠네?"
축씨 가문의 힘은 이미 충분하다. 그러나 서하국 출신이라는 점이 늘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가 황태자비 일당과 짝짜꿍이 맞아 열 살도 안 된 딸을 황제의 짝으로 만들었다.
황태자비는 일부러 서하국 출신의 황후를 만들어 황제의 위엄을 떨어뜨리려 했고, 촉씨 가문은 제국 황실의 위엄을 후광으로 입으려 했다.
결국 장안에서 큰 사고가 터지며 유야무야됐지만, 촉씨 가문은 여전히 황후 가문이라는 점을 명분으로 삼아 세력을 확장하고 규합했다.
아직은 중원에도 왕을 칭하는 자가 나타나지 않아 참고 있지만, 때가 적당히 무르익으면 황후라는 명분을 내세워 중원으로 진출할 작정이다.
망해도 촉과 대리 지역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고, 잘하면 중원을 삼켜 황제가 될 수도 있다. 자체로 보유한 무력은 물론 토번국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어 수십 개로 찢어진 중원을 단번에 정리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수많은 세력을 규합하는 데 큰 명분을 준 소녀가 도주하면 모든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다.
전후 사정을 대충 짐작한 추향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잘하면 아미파를 돌릴 수 있다.'
마교와 촉씨 가문이라는 실질적인 무력, 거기에 제국의 황제인 당백호까지 있으면 아미파도 마중구문보다는 이쪽과 손잡을 가능성이 크다.
'저 멍청이도 딱히 싫은 게 아니고.'
당백호는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했다. 그러나 월영심법 덕분에 추향은 당백호의 감정 변화를 쉽게 알아맞힌다.
"꼭 눈으로 봐야 하는 놈들이 있지."
추향은 툴툴거리며 소매에서 옥새를 꺼냈다.
"그건 또 언제 훔쳤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힌 당백호 대신 난화봉이 질문했다. 마교에 있을 때 떼를 써서 구경한 적 있기에 제국 옥새를 한눈에 알아봤다.
"협약을 맺으려면 도장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출발할 때 챙겼지."
사실 추향은 옥새가 도둑맞을 걸 걱정해 출발하기 전에 몰래 훔쳤다. 혼자만 알아야 비밀이라고 믿기에 당백호는 물론 추영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다.
"황제 폐하 만세만세만만세."
눈알을 굴리던 장로가 잽싸게 검을 버리고 바닥에 이마를 대며 우렁차게 외쳤다. 추향에게 따귀를 맞고 풀 죽어 있던 자들도 장로의 속셈을 알아채고 재빨리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성도까지 소신이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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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씨 가문은 확실히 대단했다. 가장 가까운 마을도 도보로 사흘 걸리는 곳인데도 지리에 훤했다.
"이 계곡을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서 이동하면 지하수로가 나타납니다."
"지하수로?"
"땅 밑으로 흐르는 강이 있습니다. 그 강으로 사흘이면 분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지세가 낮은 곳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간의 분지를 빼면 온통 높은 산이 가득한 촉의 땅에서나 가능하다.
지하수로의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쉬는 사이, 촉씨 가문의 사람들이 나무를 잘라 반나절 만에 배 스무 척을 만들었다.
"물살이 세지 않아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위험해도 괜찮아. 적어도 우린 죽을 염려가 없으니까."
"지당한 말씀입니다."
장로에겐 당백호가 진짜 황제인지는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추향이 보여준 옥새가 진짜라는 것이다.
설사 장로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잘 만든 가짜여도 상관이 없다. 그걸 진짜라고 믿게 할 힘이 있으니까.
"가자."
추향 일행이 모두 배에 타고 출발하자 장로는 심복에게 눈짓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심복은 배를 타고 지하수로에 들기 전에 비둘기 세 마리를 날렸다.
세 비둘기의 다리에는 지급至急을 알리는 붉은 매듭이 세 개씩 묶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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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길에 혹시 실수한 건 없으시오?"
장로는 가주와 꽤 촌수가 멀지만, 굳이 따지면 삼촌뻘이다. 그래서 가주는 장로에게 하대하지 않았다.
"전혀 태만함이 없이 만전을 기해 모셨습니다."
"참으로 잘하셨소."
생각 밖으로 가주는 용혈과 옥새를 얻은 것에 기뻐하지 않았다.
"뭔가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봅니다."
"마교. 마교가 백만 군세를 몰아 혈교를 토벌하러 갔소."
"그게 무슨?"
장로는 뜬금없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하나 더. 황제의 친모가 마교 성녀라는 확실한 정보도 얻었소."
가주의 말을 천천히 음미하던 장로가 숨을 헉 들이켰다. 그리고 오는 길에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곰곰이 돌이켰다.
"다행입니다. 오는 내내 실수가 전혀 없었습니다. 수하 중에 실언한 자가 있는지 바로 확인해서 조치하겠습니다."
"그건 급할 게 없소. 그나저나, 폐하가 우리 훼卉한테 호감이 있는 것 같소?"
"워낙 진중한 분이셔서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부하십시오."
"확실치 않은 정본데, 중원을 차지한 군벌들이 연속으로 죽어 나간다는 소문이 있소. 확인하러 사람을 보냈는데 달포는 걸릴 거요."
"마교의 소행이랍니까?"
"백만 대군을 움직여 세상에 뜻을 보였소. 용혈도 손에 있고. 힘도 명분도 있는 마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할 다른 세력이 있겠소?"
장로는 다시 한번 자신이 당백호 일행에 실수한 게 없는지 꼼꼼히 되새기고, 다시한 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저는 절대 실수한 게 없습니다."
- 작가의말
촉 하면 수염이 긴 얼굴 붉은 사람, 눈이 왕방울이고 구레나룻이 수세미 같은 사람, 잘생긴 얼굴에 긴 창을 든 사람이 떠오르죠.
그래서 수염 긴 사람 하나 등장시켰는데, 성격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분과 정반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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