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행아미
글을 잘 모르는 난화봉을 뺀 셋은 열심히 서고의 책을 뒤져 마중구문과 관련한 기록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교에도 마중구문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았다.
"일단 이 일은 우리 넷만 알아야겠다."
"왜?"
질문은 난화봉 입에서 나왔다. 교주를 빼면 사유 재산이 허락되지 않는 오독교에선 비밀이라고 할 만한 일이 없다.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어서 안 알려진 일이 있어도 고의로 숨기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다.
"우리 마교만큼 인원 구성이 제멋대로인 곳은 없다. 장로 중에 절검문 사람도 있고 정의연에 매수당한 사람도 있지. 그러니 마중구문 소속이나 졸개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반드시 찾아 뿌리를 뽑아야겠습니다."
마중구문의 기록을 보고 충격에 빠져 말을 아끼던 당백호가 이를 갈았다.
자신이 애써 제국과 백성의 안위를 지키려고 한 노력이 겨우 암중 세력의 손바닥 위에서 재롱을 부린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에 치가 떨렸다.
"그래야지. 놈들이 새 황제를 만들려면 널 죽이고 옥새를 손에 넣어야 하니까."
난화봉은 잔뜩 풀린 눈으로 사마귀를 바라봤다. 얼굴과 분위기가 마음에 쏙 들었는데 머리도 똑똑하고 결단력도 뛰어났다.
"꼭 네 아이를 낳고 말 거야."
#
"넌 남아서 마교를 관리해야 한다."
사마귀는 고민 끝에 추영과 노계혼 그리고 덕구까지 불렀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손이 너무 딸린 탓이다.
"아이들만 밖에 내보낼 순 없어."
추영이 고집을 피웠다.
현재 사마귀가 세운 계획은 이러하다. 한 무리는 아미파로 가서 연합을 시도한다. 아미검문은 최소 수백 년 동안 마중구문과 은밀한 투쟁을 해왔다.
이젠 마교도 진실을 알았으니 힘을 합치자고 하면 어렵지 않게 연합을 맺을 수 있다.
아미는 중원의 문파들과 달리 마교에 전혀 편견이 없고, 사이에 곤륜산맥을 비롯해 험한 산이 많아 마찰을 빚을 일도 없었다.
그리고 한 무리는 절검문을 찾아간다. 절검문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얻은 정보에 따라 다음 행보를 결정한다.
한 무리는 태산파를 찾아간다. 태산파는 오대비문처럼 비밀스럽진 않지만, 세상에는 그저 도사들 무리로 알려졌다.
그리고 한 무리는 노계혼이 받은 명패를 들고 마중구문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사내를 찾아가 내부에 잠입한다.
사내를 통해 마중구문의 손길이 어디까지 뻗었는지 알아내서 연합할 세력과 제거할 세력을 명확히 구분한다.
이 중에서 절검문을 방문하는 것과 태산파에 가는 일은 함께 할 수 있다. 먼저 절검문을 찾아 정보를 얻은 다음 태산파로 가면 된다.
그리고 일의 분담도 아주 쉬웠다.
우선 절검문을 방문하는 일은 배제법을 사용하면 되었다. 절검문과 사이가 나쁜 무룡의 가족은 우선하여 배제. 노계혼과 덕구도 당연히 이 범주에 든다.
난화봉은 너무 철이 없어서 배제. 게다가 오는 길에 사고를 쉬지 않고 쳤다고 하니 도저히 이런 중임을 맡길 수 없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소교주 사마귀뿐이다.
다음으로 아미파에 갈 사람은 당백호가 적임자다. 그러나 당백호가 무공은 뛰어나도 사람을 쉽게 믿는 단점이 있는 걸 생각하면 혼자 보낼 순 없다.
그래서 추향을 함께 보내기로 했고, 난화봉도 여기에 넣었다. 아니면 계속 사마귀를 따라다니며 아기 만들자고 조를 것이 뻔하다.
노계혼과 덕구는 명황성에서 만난 사내의 명패를 들고 찾아가면 된다. 둘 다 흑응조를 익혔기에 마교 출신으로 둘러대면 그만이다.
세세겁화봉이 정의연에 함락된 기간 수많은 마교 무사가 중원으로 흘러갔기에 딱히 의심을 살 일도 없고, 마교가 마중구문과 적대한 적이 없기에 마교 소속으로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
"그렇게 믿을 사람이 없어?"
차라리 추향이 혼자서 밖에 나가면 안심이다. 벽력목을 부러뜨려 청람을 부를 수 있고, 까마귀를 통해 천방기사를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 당백호를 얹으면 다르다. 추영 자신보다 훨씬 냉철한 추향이라면 어설픈 함정에 속지 않을 거지만, 무룡을 닮아 마음이 후덕한 당백호라면 사람한테 쉽게 속는다.
고집이라도 없으면 다행이겠지만, 그릇을 가득 채워 고집이 누그러든 무룡과 달리 당백호는 쇠랑 싸워도 이길 정도다.
추영은 사고를 친 당백호 때문에 추향까지 위험해질 것이 너무 걱정되었다.
"마중구문을 찾아 제거하지 않으면 백호는 평생 놈들의 표적이 되어 살아야 한다. 그러니 작은 위험조차 무릅쓰지 않을 순 없다."
"엄마는 백호가 아직도 오줌싸개로 보여?"
추향은 만날 때부터 의젓한 소녀였다. 그러나 아기 때부터 봐온 당백호는 아직도 아이로 보인다.
"그래. 믿으마."
#
난화봉과 추향은 얼굴에 가면을 쓰고 품이 너른 옷을 입었다. 모르고 보면 영락없는 사내고, 알고 봐도 반신반의할 정도로 잘한 변장이었다.
난화봉은 사마귀와 함께 절검문에 가겠다고 한참 고집을 부렸으나, 아미산의 풍경이 그렇게 유명하다는 말에 넘어가 추향과 당백호 일행에 합류키로 했다.
사마귀는 추영에게 마교의 사무를 넘기느라 좀 늦게 출발할 예정이고, 노계혼과 덕구는 덕구가 벽파검법을 어느 정도로 능숙하게 다룬 후 출발하기로 했다.
"내 조카들을 잘 부탁한다."
"나랑 아기 만든다고 약속하면 털끝 하나 안 다치게 지켜주지."
"아들. 강호는 마교와 다르고 황궁과도 다르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으니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에 속으면 안 된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일도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게 강호다."
괜히 누나 말에 따르라고 하면 더 고집을 부릴 당백호다. 그걸 알기에 추영은 최대한 아들의 자존심을 안 건드리게 조심해 말했다.
"엄마, 딸은 출가외인이라고 너무 박대하는 거 아니야?"
"너도 똑같다. 네가 아무리 별의별 짓을 다 해봤다고 해도 강호엔 네가 상상도 못 하는 괴이한 자가 넘쳐난다. 세상에 나가면 너도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하니 늘 겸허함을 잊지 말고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라."
사마귀와 난화봉의 실랑이질, 추영의 긴 잔소리 때문에 이별이 조금 길어졌다.
"독성한테 들은 거랑 딴판이네?"
끝내 출발한 셋은 경공을 펼치는 대신 나귀를 타고 움직였다. 추향을 빼면 경공만으로 아미까지 가도 아무 탈 없을 정도로 내공이 깊은 사람이 없는 탓이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비상식량으로 삼아도 좋기 때문이다.
"뭐가?"
"너희 엄마. 되게 똑똑하고 확실한 여자라고 하던데."
"맞아. 저 철부지 일만 아니면 똑 부러지는 분이야."
"응? 철부지는 너고. 쟤는 완전 어른 같은데?"
"어른은 무슨. 아직 세상의 쓴맛을 덜 본 오지랖 넓은 애송인데."
당백호는 추향이 자신을 대놓고 까는 데도 아무 말 없었다.
"쟤는 지금 제국을 다시 일으키고 천하를 안정해 백성이 호의호식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꿈꾸고 있어."
"좋은 일 아니야?"
"좋은 일이지. 그런데 그거 얼마나 힘들겠어. 진심으로 그걸 이루려면 주변 모든 사람이 자기 행복을 버리고 전력으로 도와야 해. 아무리 좋은 일이어도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까지 모든 걸 희생하며 이뤄야 할 가치가 있을까?"
"그건 맞아. 희생해서 이뤄내는 건 하자가 있기 마련이지. 무위자연이 최고야."
난화봉의 말이 당백호의 뒤통수를 세게 쳤다.
'결국 독무곡이 공격을 당한 것도 내 탓이다. 차라리 내가 사라지고 새 왕조가 빨리 들어서는 게 천하를 위한 일이 아닐까?'
그러나 고민도 얼마 가지 않았다. 며칠 안 걸려서 인적이 전혀 닿지 않은 곳으로 진입했고, 거기엔 별천지가 있었다.
책으로 봤거나 말로만 들었던 온갖 기이한 나무와 풀이 있고, 수많은 종류의 크고 작은 짐승이 있었다.
오동통하게 살이 쪄서 군침이 돌게 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너무 귀여워서 먹기 미안한 놈도 있었다.
물론, 결국엔 추향의 손에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발라진 다음 모닥불 위에서 맛있게 익어서 당백호의 뱃속에 들어갔지만 말이다.
그냥 구워도 맛있는데 오독교에서 자란 난화봉이 온갖 자연에서 찾은 양념으로 풍미를 더한 덕분에 셋이 먹다 둘이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이걸로 설사약을 만들 수 있어."
난화봉이 약초와 독초를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설사약은 설사를 고치는 약이야 아니면 설사를 유발하는 약이야?"
"줄줄 싸게 하는 약이야. 이 약은 덕구 빼고 해독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없어."
오독교에서 독성이 약한 독을 만들어 서로한테 먹이는 건 놀이에 불과하다. 다른 애들이 흙과 조약돌로 집을 짓고 담을 쌓으며 소꿉놀이를 할 때 오독교 아이들은 독초와 약초를 배합해 독을 만드는 놀이에 열심이었다.
"줘봐."
보기만 해도 식욕이 달아나게 하는 검푸른 즙을 받은 추향은 내공으로 얼려서 가루를 낸 다음 천천히 말려서 분말 형태로 만들었다.
"이걸 내공으로 날려서 콧구멍으로 흡입하게 해도 효과가 있을까?"
"와, 난 왜 이런 생각을 전혀 못 했지?"
"그런데 시험해 볼 사람이 없어."
추향은 물론이고 당백호도 어지간한 독은 몸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분해되거나 해독된다. 그리고 난화봉 역시 마찬가지다.
차라리 경지가 더 깊으면 내공을 억제해 독을 가만두게 할 수 있지만, 셋 모두 그 정도 경지엔 이르지 못했다.
"가다 보면 사람이 나오겠지."
"나쁜 놈을 찾아서 독성을 시험해 보자."
둘이 짝짜꿍이 맞아 즐겁게 휴식 시간을 보낼 때, 당백호는 눈을 감고 편히 누워서 진짜로 휴식했다.
'아버지는 왜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았을까?'
무룡은 황제가 될 기회가 분명히 있었다. 당백호가 황제가 된 후에도 모습을 드러냈으면 황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당시 당백호의 명분이 약해 황태자비 세력에 밀리던 때였으니까.
'정말 가족이 천하보다 더 소중한 건가?'
예전엔 별로 와닿지 않던 말들이 매일 머리를 치고 가슴을 울렸다. 생소한 풍경을 보며 머리가 자극을 받아선지, 아니면 추향과 난화봉의 설교 아닌 설교 때문인지.
'차라리 이대로 속세를 등지고 혼자 조용히 사는 건 어떨까?'
당백호는 차라리 부모의 품을 완전히 떠나서 추향처럼 아무 걱정도 없이 제멋대로 살아보는 건 어떨지 고민했다.
-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히 지내십시요.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