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후후손
"괜히 긴장했어."
사흘이 지나서 패도문의 장원에 나타난 건 덩치가 왜소하고 무공도 법술도 전혀 모르는 중년 남자였다.
외모나 옷차림은 대체로 평범한데, 손에 든 부채만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풀풀 풍겼다.
"둘은 잠깐 호흡을 멈추고 아무 소리도 내지 마. 나 순풍이順風耳로 저기 대화를 엿들을 거야."
먼 곳의 소리를 듣는 순풍이는 아주 명확한 약점이 있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소리만 들을 수 있고, 어중간한 거리에서 생기는 소리는 아예 못 듣는다.
그리고 귀에 들리는 게 가까운 곳의 건지 먼 곳의 건지 구분하지 못하는 소소한 결함도 있다.
손청우와 석군이 호흡을 멈추자 추향은 바로 법술을 펼쳤다.
"제갈 선생. 이건 약속이랑 다릅니다."
"저는 지시를 받고 움직일 뿐입니다. 약속을 어겼는지 여부는 직접 가서 따지시죠."
패도문과 중년 사내 사이에는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그간 저희가 선생 대접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고. 좀 좋게 얘기해줄 수 없습니까?"
"오해하는 것 같군요. 물건을 옮기는 건 최근 장원에 일어난 소란 때문이 아닙니다."
제갈이라는 사내의 말에 패도문 문주 얼굴이 환하게 폈다.
"문책성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물건을 패도문에 맡길 때부터 계획한 겁니다."
'패도문을 수족처럼 부리고 수년에 걸친 계획을 짜는 조직이라. 얼마나 대단한 놈들인지 한 번 끝까지 파헤쳐주마.'
"그럼 이 건물은 이제 무용지물이 된 겁니까? 아시다시피 이걸 만드느라 들인 돈이 한두 푼이 아니어서."
패도문의 문주는 변방에 있다 보니 명성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호 어디에 내놔도 실력으로 손색이 없는 고수다. 그런데 돈 앞에선 범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결과가 좋으면 이후 정기적으로 물건을 맡길 겁니다."
패도문 문주 얼굴에 화색이 완연했다. 그럴수록 추향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얼마나 많은 돈이기에 패도문 문주가 저 평범한 서생한테 굽신거리지?'
패도문은 철혈방 따위와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로 대단하다. 아직 중원에 영향력은 별로 없지만, 수백 년 역사를 지닌 탄탄한 문파기도 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덩치가 커지면서 먹여 살려야 할 입이 늘었지만, 그만큼 돈 들어올 구멍도 커졌다.
그런 패도문의 문주가 저토록 저자세를 일관하는 걸 보면, 물건을 맡으면서 받는 돈이 작은 액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건도 예사 물건은 아니겠네?'
추향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귀한 물건을 훔치거나 망가뜨리면 놈들이 얼마나 가슴 아플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수하를 물리십시오. 이번에 성공하면 소문나도 괜찮지만, 그전까진 외부에 알려져선 절대 안 됩니다."
패도문 문주는 수하들을 물리고 본인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숨 쉬어도 돼."
추향은 순풍이를 거두고 천리안千里眼을 펼쳤다.
"뭡니까?"
석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패도문 문주가 저 서생을 제갈 선생이라고 불렀어. 그리고 저 서생 손에 든 깃털로 만든 부채로 추정하건대, 제갈무후의 후손인 거 같다."
추향은 중년 사내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 진법."
사실 제갈량은 진법 고수가 아니다. 진정한 고수는 제갈량의 아내인 황월영이다. 그러나 아내의 활약이 모두 제갈량의 것처럼 소문이 난 바람에 대부분 사람은 오해하고 있다.
"부채가 법보였어."
제갈량의 후손으로 추정하는 사내 역시 진법 고수는 아니었다. 그저 손에 든 우모선羽毛扇의 힘을 빌려 사진을 생진으로 바꾼 다음 활로를 여는 게 다였다.
'피로 각인하는 법보구나. 안타깝게 됐어.'
제갈량의 피인지 황월영의 피인지 모르지만, 같은 핏줄이 아니면 그냥 평범한 부채나 다름없는 게 우모선이다.
깃털로 만들어 바람도 시원치 않기에 오히려 일반인에겐 그냥 대나무에 두꺼운 종이를 바른 부채보다도 못하다.
"진법을 수복하는 게 아닌 것 같소."
손청우의 말에 추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은 눈가림이었어. 괜히 기관으로 침투했다간 진법에 갇혀 고생할 뻔했네."
기관이 진법을 드나드는 길인 건 맞는다. 그러나 기관으로 진법에 들어가도 저들이 말하는 물건을 확인할 길은 없다.
괜히 길도 없는 완전히 죽은 진법이면 누구나 의심할 게 뻔하기에, 수고스럽게 기관을 만든 거였다.
이젠 물건을 완전히 꺼낼 것이기에 당장 기관을 복구할 필요가 없고, 이후에는 알려져도 괜찮다고 하니 역시 귀한 돈을 써서 기관을 복구할 일이 없다.
'기분 나쁘네.'
추향은 자신이 한 일이 상대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는 게 조금 거슬렸다.
'이번 일은 어떻게든 방해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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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술도 익혔습니까?"
"주변에 추적술 아는 사람 하나도 없어?"
화산엔 약초꾼과 사냥꾼이 많아 추적술을 익힌 제자가 많았었다. 그러나 화산이 강할 때면 몰라도, 강호에서 대놓고 놀림을 받기도 하는 처지에 무공이 아닌 다른 기술을 익힐 여력이 없었다.
"무공 익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서요."
"만법귀일萬法歸一이다. 뭘 익히든 제대로 배우면 결국엔 도움이 된다."
속으론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석군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놈들이 마차에 실은 물건은 도대체 뭡니까?"
추향한테 설교를 당할 때마다 아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괴로웠다. 그래서 석군은 화제를 급하게 전환했다.
"안을 보지 않아 확실치는 않지만, 밖에 붙인 부적을 볼 때 십중팔구 청동괴야."
"청동괴요?"
굳이 고수 소리를 듣지 않아도 십 년 정도 내공을 보유한 무인이면 청동괴와 일대일 대결을 벌여 안정적으로 이길 수 있다.
작은 청동괴는 건장한 사내 다섯 명이 힘을 합치면 큰 부상 없이 파괴할 수 있다.
청동괴가 무서운 건 수십 혹은 수백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기 때문이다.
"청동괴로 무슨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데."
그러나 총명한 추향도 상대의 의중이 뭔지 쉬이 짐작하지 못했다. 정보가 넉넉하다면 비슷하게 추측하지만, 현재는 상대의 정체도 전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겁니까?"
"놈 중에 술사가 세 명 있어. 가까이 가면 들킬 거야."
"그럼 언제까지 따라가는 겁니까?"
"수련을 못 해서 조급하구나."
추향은 석군이 조바심을 내는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다.
"큰 성취는 아니지만, 벽파검법을 이해하려면 수련을 조금 쉬는 것도 좋아. 물은 가로막는 게 있으면 멈추지만, 물이 계속 모이면 결국엔 넘어서 다시 흘러."
석군은 추향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가로막는 걸 억지로 부수며 흐르다 보니 깊이가 부족했던 게 아닐까?'
둘의 대화를 경청하던 손청우는 점점 욕심이 커졌다.
'저 아이가 화산파 장문인이 되면 정말 좋겠다.'
세상에 자기만 잘난 줄 아는 석람도 정신을 차릴 거고, 우직하기만 해서 걱정인 석군도 방향을 가리켜 주는 사람이 생겨서 좋다.
"명황성에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둘 생각이 궁금해."
장안과 형주 그리고 대도를 빼고 남은 여섯 도시는 진법으로 세상과 격리되었다.
오로지 술사가 재주를 부려 출입할 수 있는데, 절검문이 안에서 나는 부산물을 높은 가격에 구매한 덕분에 수많은 술사와 무인이 몰려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명황성冥荒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열이 들어가면 겨우 일곱이 나온다는 죽음의 땅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귀한 물건과 기연이 넘쳐 기회의 땅으로 불리는 곳이다.
"마수만 안 만난다면 우리 셋만으로도 안에서 활보할 수 있어. 그러나 마수를 만나면 몰라. 어쩌면 개미 마수한테 물려 죽을지도."
요괴나 괴수는 상대하기 편하다. 이들은 약점이 대부분 알려졌고, 그렇지 않은 놈도 더 강한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
그러나 마수는 다르다.
외형이 똑같은 마수도 약점이 다르고 능력이 다르다. 그리고 이들의 능력은 요괴의 요술이나 술사들의 법술과 달리 규칙성이 아예 없다.
추향 말대로 손톱보다 작은 개미 마수한테 뒤꿈치를 물려서 죽을 수도 있다.
"마수는 절검문이 우선하여 소멸한다고 들었소."
절검문이 명황성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높은 가격으로 사들이는 건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론 명황성에서 대요괴나 대마수가 탄생하는 걸 막으려는 속셈이다.
그렇기에 돈이 거의 안 되고 위협적인 마수는 절검문이 솔선수범해서 없앴다.
"마수를 만나도 난 무사해. 그러나 둘까지 지켜줄 자신이 없어서 묻는 거야."
손청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무룡 사형도 괜찮은 것 같고, 석군도 강호 경험을 넘치게 했다. 추 소저도 딱히 우리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고.'
명황성으로 가서 모험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석군에게 강호의 바닥을 한 번 보여주는 것도 나쁘진 않아.'
발톱 하나가 은자 열 냥씩 하는 곳이다. 밖에서야 평판 때문에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지만, 명황성 안에선 요괴한테 죽는 것보다 사람한테 죽는 경우가 훨씬 많다.
강호에서도 작은 말다툼이 시비로 번져 칼부림이 나는 일이 허다하다. 손청우와 석군 역시 화산을 비하하는 자들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현재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명황성에서 벌어지는 작태와는 비교조차 미안할 정도다.
"가겠소."
손청우의 말에 석군이 기쁜 웃음을 지었다. 하늘 같은 사부가 화산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찍소리도 못 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석군이다.
"좋아. 그럼 일단 부적부터 쓰자."
요괴나 괴수가 적대감을 덜 느끼게 하는 부적부터 기척과 존재감을 줄여주는 부적까지. 추향은 금박을 입힌 종이로 부적 수십 장을 만들어 손청우와 석군에게 줬다.
"내 목숨까지 버리면서 너희를 구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각자 알아서 목숨을 챙기자."
그 후 셋은 청동괴를 운반하는 자들을 앞질러 먼저 명황성에 도착했다. 놈들이 추적을 감지하기 위해 부린 수작을 찾아내 피하는 것도 피곤하던 차였고, 미리 정보를 수집할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평소 직원들 앞에서 ‘곤조’ 부리던 하청업체 사장님의 민낯.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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