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초지적
비록 단전을 두 개나 품어 무지막지한 양의 내공을 얻었지만, 사마월은 쌍룡도해처럼 기운 소모가 큰 초식을 더는 펼치지 않았다.
첫 초식으로 쌍룡도해를 펼친 건 그저 사마영에게 자신이 예전의 사마월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같은 초식을 펼친 적 없어."
"그리고 초식을 끝까지 펼친 적도 없지."
마교 장로들은 여길 왜 왔는지 까맣게 잊은 채 둘의 대결에 집중했다.
사마월은 사마영이 단전이 뽑힌 후에도 계속 새로운 무공을 익혔다. 덕분에 사마영이 모르는 초식을 끝없이 펼칠 수 있었다.
사마영은 익힌 초식을 변형해 펼쳤다. 모두 사마월이 아는 초식이지만, 응용이 하도 뛰어나 사마월도 처음 보는 초식을 상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한 명은 계속 다른 초식을 뽑아내고, 한 명은 같은 초식도 똑같이 펼치는 법 없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마교 장로들에겐 그저 둘의 초식 대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목이 확 넓어지고 깨달음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아, 왜 저기서 멈췄지?"
"더 나갔으면 교주의 기세가 가장 강할 때 부딪쳤을 테니까. 절정에 이른 고수의 대결에선 이런 작은 차이가 쌓여 승패가 갈리는 거야."
"한 번 변화를 더 줄 수 있는 거로 보였는데."
"변화가 한 번만 남은 건 없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지막 변화를 써버리면 상대 도마 위에 오른 셈이니까."
무인은 자주 대결을 펼쳐 자신을 점검하고 가늠한다. 그런 주제에 정작 중요한 깨달음은 남과 나누지 않고 독식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의 한계에 닿은, 혹은 벗어난 두 초인의 대결에 정신이 나가서 자신이 느낀 바를 고스란히 공유했다.
"무림사에 길이 남을 대결이야."
그릇이 커야 많이 담는다. 강호에서 누구나 기탄하는 마교 장로들이지만, 약 삼천 초식 정도까지 보니 더는 새로운 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들 눈에서 쌍심지를 끄고 순수한 마음으로 편하게 구경했다.
"중원의 머저리들이 이 대결을 보고도 검극을 교주께 비교할까?"
초식이 천 개가 넘고부터 사마월과 사마영 모두 내공을 아꼈다. 쌍룡도해와 같은 초식으로도 승패가 쉽게 갈리지 않기에 결국 체력전이 되었다.
누구의 육체가 더 오래 버티고, 누구의 내공이 더 늦게 마르고, 누구의 정신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지가 대결의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다.
이런 때에 내공을 써서 공격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상대가 피해버리거나 흘리면 공격에 쓴 내공만 헛되이 날리는 셈이 된다.
그러나 피하기만 하다가 외통수에 걸릴 수 있기에 또 내공을 아예 소모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래서 둘 다 공세에 임할 땐 내공을 최대한 아끼고, 수비할 땐 내공을 적절히 써서 궁지에 몰리는 걸 대비했다.
"횃불을 붙이자."
사마월과 사마영 정도면 어두운 밤이라고 실력이 하락하진 않는다. 그러나 둘의 대결을 더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장로들은 둘 주변에 횃불을 가득 밝혔다.
"벌써 일만 초식이다."
둘을 합쳐서가 아니라 각각 초식을 만 개 정도 선보였다. 그러고도 사마월은 새 초식을 끊임없이 꺼냈고, 사마영 역시 초식을 분해하고 조합하는 거로 사마월이 예상키 어려운 수를 펼쳤다.
"승부가 안 날 것 같다."
고수의 대결답지 않게 사마월과 사마영 모두 흐른 땀에 수염이 엉겨 붙고 얼굴과 목에 먼지가 잔뜩 꼈다.
쉬운 상대 만 명과 싸웠다면 땀 한 방울 안 흘렸겠지만, 호적수인 둘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그럼 안 되지."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울리더니 턱수염이 수북한 사내가 나타났다.
미처 장로들이 반응할 새도 없이 사내는 사마영과 사마월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가."
사마영이 고운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내공이 깊은 사마월은 괜찮은 기색이지만, 사내의 개입에 사마영은 작은 내상을 입어 입가에 피를 머금었다.
"단전도 없는 놈이 겁이 없구나."
사내는 비수 같기도 하고 송곳 같기도 한 기이한 무기로 사마영을 할퀴었다. 이미 상대의 실력을 한 번 체감한 사마영은 감히 얕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멍청이."
사마월이 쌍룡도해를 펼쳐 갑자기 끼어든 사내를 공격했다. 둘의 팽팽한 대결에 끼어들어 사마영에게 내상까지 입힌 대단한 사내지만, 쌍룡도해는 무시하기 어려웠는지 사마영을 공격하는 걸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홧김에 실수했군."
사마영이 자신의 실책을 솔직히 인정했다. 자존심 때문에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기에 덤비는 대신 물러났다. 정석대로라면 무기를 든 강한 상대에게 거리를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좁혀야 했다.
"배신자를 처단하러 왔다."
사내의 말에 사마영이 껄껄 웃었다.
"넌 마교에서도 배신자고 저쪽에 가서도 배신자구나."
"난 날 위해 산다. 그러니 어디에서도 배신자가 아니다."
사마월이 콧방귀를 뀌었다.
"넌 너도 배신했잖아."
사마영의 비아냥에 사마월의 얼굴이 굳었다.
"혼자는 부담되니까 둘 정도 더 와."
사내의 외침에 기척도 없이 두 사내가 사람들 시야에 나타났다.
"교도들을 데리고 돌아가라. 그리고 혈교는 아까 말했던 대로 병든 새와 쥐를 풀어서 씨를 말려라."
장로들은 사마영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몸을 돌려 북쪽으로 도망쳤다. 비록 사내들의 정체를 모르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고양이를 만난 쥐새끼와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사마월과 사마영을 동시에 상대하고도 멀쩡한 사내에게 동료 둘까지 더해지니 도망치는 것 빼고는 할 일이 없었다.
"요즘 인간은 의리를 다 잊었구나."
"옛날이 좋았지."
세 사내 모두 팔다리는 평범한데 몸통이 아주 컸다. 마치 살진 돼지를 사람처럼 세워 놓은 것 같은 모습인데, 움직임 하나하나가 묵직하면서도 자연스러워 고수의 풍모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형제끼리 상잔하지 말라는 하늘의 뜻인가 보다."
사마영의 말에 사마월이 이를 꽉 악물었다.
"싸움을 방해한 놈들 버르장머리를 고쳐준 다음 네 목을 취하겠다."
"좋을 대로."
일단 손잡기로 합의한 둘은 서로 등을 대고 세 사내와 대치했다.
"제길. 집중이 안 되잖아."
등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에 사마영은 자꾸 마음이 약해졌다.
"네가 모자라서 그래."
사마월도 마찬가지지만, 이 모든 게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탓에 그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때. 불청객이 나타났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검이 끝으로 갈수록 천천히 좁아지는 기형검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머리에 윤기가 넘치고 얼굴은 술을 마신 사람처럼 붉었다.
팔과 다리가 길고 허리가 잘록하여 날렵해 보였고, 어깨가 넓고 가슴이 두꺼워 힘이 좋을 듯했다.
"어린놈이 어디서 맞먹으려고."
건들거리며 나타난 자는 뜻밖에도 검극이었다. 마교에서 독룡을 상대할 때만 해도 진중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시정잡배와 같이 품위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맙시다."
사마영과 검극은 교류가 잦은 편이었다. 비록 교류라고 하기엔 검극이 늘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다음 악담을 퍼부으며 돌아가는 일의 반복이었지만, 검극이 사마영에게 배운 게 있고 사마영도 검극 덕분에 느끼는 바가 있었다.
사마영의 자리를 뺏은 사마월이 더는 대결하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함을 느꼈고 혼자서 조사했다.
그러다가 남궁가주한테서 월영심법에 관한 얘기를 듣고 진실을 밝히려고 정의연 편에 들어 마교와 싸웠다.
"과유불급이다."
사마영의 말에 검극이 장난기를 거두고 진중한 얼굴로 변했다. 틀을 깨려고 제멋대로 굴었는데, 사마영의 말을 듣고 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었다.
"늘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대충 걸친 옷도 그대로고 머리도 여전히 제멋대로 풀어 헤쳐졌는데 아까와 달리 진중해 보였다. 한창 실력이 느는 때여서 기세가 강한 터라 외모와 상관없이 마음가짐으로 분위기가 정해진 덕분이다.
"둘 더 나와."
처음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지시에 두 명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자가 오줌 싸듯이 찔끔찔끔하지 말고 다 나오지 그래."
사마월이 도발했다.
"다 사정이 있겠지.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사마영이 사마월의 말을 받았다. 의가 상해 서로 외면한 지 이젠 팔십 년 정도 되는데도 여전히 합이 척척 맞았다.
"그래. 죽기 전에 주둥이라도 실컷 놀려라."
다섯 사내 중 넷은 사마영과 사마월을 공격하고 한 명은 검극을 견제했다. 이들은 마중구문의 추살조로 사마영과 사마월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 과정에 어떤 짓을 해도 상관없지만, 딱 두 명은 죽일 수 없다.
바로 무룡과 검극. 중원의 무공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둘은 마중구문의 구미에 맞기에 살려야 한다.
"조금 힘든데? 원신을 드러내도 될까?"
사마영과 사마월은 무려 만 개의 초식씩 써가며 싸웠다. 이는 서로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둘이 합심한 지금 자신들보다 확실히 강한 사내 넷이 연수해도 여유 있게 잘 막아냈다.
"그러다 사고라도 치면?"
그때 검극이 외쳤다.
"선배, 조금만 버티면 절검문과 벽력문이 지원을 올 겁니다."
검극과 자주 본 사마영은 거짓말임을 바로 알아챘다. 그러나 사마월은 물론 마중구문의 다섯 사내도 검극의 거짓말에 깜빡 속았다.
"절검문주가 오면 큰일인데?"
"너, 원신을 허락한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한 명을 지목했다. 지목을 받은 사내는 아주 기쁜 표정으로 손에 든 무기를 던져버렸다.
"도망칠까?"
무기를 집어 던진 사내의 몸집이 크게 부풀더니 가시를 방불케 하는 털이 자랐다.
"그것도 재밌을 것 같긴 한데."
사마영이 도주를 제안했고 사마월도 동의했다. 조금 비유가 그렇지만, 사마 형제는 쥐고 정체가 불분명한 사내들은 고양이다. 힘이 더 세다고 해도 쥐는 태생이 사냥감이다. 더구나 다섯 사내 중 사마영이나 사마월보다 약하게 보이는 자는 한 명도 없다. 지금은 차라리 도주로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버는 게 현명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은 세 사내가 경계를 철저히 하여 도주할 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삼재진을 합시다."
검극이 강한 공격으로 자신을 담당한 사내를 떨쳐낸 다음 합류했다.
"젊은 너라도 도망쳐서 살아라. 우린 이기든지 죽든지 둘 중 하나다."
다섯 중 사마영이나 사마월보다 약한 존재는 한 명도 없었는데, 심지어 한 놈이 뭔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원신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길보다는 흉이 많은 결과가 점쳐지기에 검극이라도 살길 바랐다.
대화하는 사이, 사내가 변신을 끝냈다. 사내의 정체는 물소보다 조금 큰 까만 털의 두더지였다.
- 작가의말
아주 절정에 이른 고수의 싸움은 어떨지 고민했는데, 반박귀진이라고 오히려 평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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