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도훼용
얇고 긴 침이 무룡의 견정혈을 천천히 찔렀다. 차가운 침의 감촉과 달리 견정혈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웠다.
"씨앗이 있는지 살피는 거다."
이틀 전 바로 이 자리에서 자기 제자를 때려죽인 사람이다. 그러나 무룡에겐 더없이 상냥한 태도를 보였다.
"씨앗이 얼마나 건강한지에 따라 단전 치료에 걸리는 시간이 정해진다."
초원은 가끔 큰불이 일어 모든 풀이 사라진다. 그러나 몇 년 안 되어 다시 잡초로 무성하다. 이는 불에 타지 않고 견딘 뿌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바람에 날려온 씨앗 덕분이기도 하다.
단전은 뿌리로 살리는 것보다 씨앗으로 살리는 게 낫다.
단전은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혈도다. 인간의 몸에 있는 많은 혈도가 상호 작용하며 생긴 그림자들이 겹쳐서 이뤄진 곳으로, 내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은 기운이 단전을 경과하지 않는다.
호흡법이나 심법으로 경맥을 따라 흐르는 기운을 살짝 틀어 관원혈, 기해혈, 석문혈, 음교혈 근처를 경과하게 하면 실재하지 않는 혈도인 단전이 생긴다. 단전이 생긴 이후부터는 모든 흐름이 단전을 경과하게 되는데, 단전을 이룬 사람은 아닌 사람보다 훨씬 건강하고 병에 잘 저항한다.
단전은 이론상 모든 혈도의 그림자가 모인 곳으로 어떤 혈도와도 직접적으로 통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까운 혈도하고만 직접 기운을 주고받고 먼 혈도에는 몇 개 혹은 몇십 개 혈도를 거쳐 기운을 전달한다.
경지가 높을수록 먼 혈도에 기운을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내공만 많고 경지가 낮은 자들이 고수 상대로 맥을 못 추는 이유다.
바다를 찾은 자가 아닌 우물을 찾은 자가 갈증을 해결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단전이 파괴되었다는 건 대부분 혈도와 상호 관계를 잃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철저히 파괴된 게 아니라면 그러한 관계를 하나씩 살리는 거로 단전을 복구할 수 있다.
무룡의 혈도들에 일정 간격으로 침이 꽂혔다. 약 혹은 독을 발라 혈도를 자극하는 특별한 침들이다.
"씨앗은 없는 듯하구나."
가류가 이마를 찌푸린 채 한탄했다. 너무 상냥하게 들리는 말투에 무룡은 소름이 잔뜩 돋았다. 고작 물을 쏟았다는 이유로 자기 제자를 때려죽인 냉혈한이라곤 믿기지 않는 친절함에 구역질이 치밀었다.
"뿌리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해야겠다. 씨앗이 있어 혈도를 자극해 단전을 복구하는 방법이 더 확실하긴 하지만, 나라면 단전에 남은 뿌리를 각 혈도에 연결하는 일도 어렵지 않다."
씨앗이 없다면 뿌리로라도 살려야 한다. 뿌리로 살린 단전은 파괴되기 전의 수준을 넘기 어렵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아까는 은침과 철침을 사용했는데 이번엔 황동으로 된 침을 썼다. 황동으로 된 침은 은침과 철침과 달리 휘지 않고 세 배 정도 굵었다.
바르는 약도 다르고 침을 꽂은 혈도와 순서도 달랐다.
무룡은 아까와 달리 아프게 찌르는 침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제자 목숨을 파리 취급하는 자격 미달의 사부이긴 하지만, 그간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들을 종합하면 천하에 가류만큼 의술이 뛰어난 자가 없다.
괜히 심기를 건드려 치료가 멈춰지는 건 절대 바라지 않는다.
"참 기괴하구나."
가슴이 덜컹했다. 무룡 주제에 가류만큼 뛰어난 의원을 다시 만나 치료를 받을 가능성은 없다. 단전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로 여겼는데 가류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결과를 확인한 가류가 혀를 찼다. 내가 중수법이나 파혈침이 아닌 외상으로 단전이 파괴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씨앗은 물론 뿌리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단전의 흔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단전은 내가 중수법이나 파혈침으로 파괴해도 살릴 수 있다. 드는 시간과 재물과 정성이 여간이 아니어서 포기하는 게 대부분이긴 하지만, 이론상으로 복구 못 하는 단전은 없다.
그런데 가류가 아는 지식에 절대 부합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무룡이 마환기공을 익혔기 때문이다.
단전은 실재하지 않기에 외부 타격으로 파괴할 수 없다. 내가 중수법 혹은 파혈침으로 주변 혈도와의 흐름을 끊는 것으로 단전을 고립시켜 말려 죽이는 게 일반적이다.
실재하지 않는 단전을 파괴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타격이라면 사람이 먼저 죽는다.
마환기공은 판관필의 충격을 전신 혈도로 분산했다. 무룡이 천노의 필생 공력이 담긴 공격에 목숨을 부지한 이유다.
내공의 양도 적고 경지도 낮고 혈도의 단련도 부족한 무룡은 전신 혈도가 동시에 감당하기 힘든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에 혈도의 상호 관계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최상승의 내가 중수법으로도 해내기 힘든 일인데, 마환기공의 특성 때문에 무룡의 몸에 발생했다.
단전이 사라진 건 물론이고, 자칫 숨이 끊어질 위험한 일이었다. 다행히도 면면불식의 호흡법 덕분에 외부의 기운을 지속하여 몸에 들여 느리지만 확실히 전신 혈도를 회복했다.
당시 가류가 현장에 있었다면 바로 조치하여 단전을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일이 꽤 흐른 지금 무룡의 단전은 씨앗도 뿌리도 안 남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단전을 제외한 혈도를 전부 살리고 얼마 안 지나 면면불식의 호흡도 끊겼다.
가류가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어도 이러한 과정을 짐작하지 못한다. 마환기공도 효과를 잃고 면면불식도 멈췄기에 유추할 근거가 전혀 없다.
무룡 역시 자신의 단전이 파괴된 원리를 아예 모르기에 가류한테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못했다.
"단전을 새로 만들 수 있을까?"
가류가 뚜벅뚜벅 걸으며 낮게 중얼댔다. 잔재가 전혀 남지 않아 새로 만드는 게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가류의 발걸음 소리에 따라 무룡의 심장도 점점 빨라졌다.
'해볼 만하다.'
무룡이 단전을 새로 만드는 건 가류에게도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다. 가류는 무룡의 단전을 회복하는 데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눈썰미 좋은 제자로 스무 명 준비해라. 요혈초妖血艸 구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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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가류가 만든 약을 먹고 온몸에 침을 가득 꽂은 채 벽파공을 수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도 단전 위치에서 흐름이 끊어졌다.
'실패했지만, 얻은 게 많다.'
무룡의 치료에 사용한 약초와 독초를 생각하면 배가 아플 법도 하지만, 가류는 좋게 생각했다. 무룡을 치료하는 과정에 얻은 지식이 가류에게 큰 도움이 된 덕분이다.
단전 치료에 성공했다면 훨씬 귀한 걸 얻었겠지만, 지금 결과만으로도 가류가 만족할만했다.
"그만 떠나거라."
치료가 실패하자 가류는 무룡에게 그냥 떠나라고 했다. 가류가 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 몰랐던 후문영이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대로 떠나면 안 된다.'
후문영이 마지막으로 찾아왔을 때 무룡은 살기를 느꼈다. 추영을 언급하며 단전을 치료해 달라고 애원한 건 상대의 동정을 사는 동시에 자신이 전혀 위협적이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단전을 복구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단전이 없으면 벽파공은 운기조차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무룡의 십 성에 이른 벽파공은 단전 위치에서 끊어지긴 했으나 아예 운기에 실패할 정도는 아니었다.
가류가 단전을 복구할 방법이 절대 없다고 단정해 말했지만, 무룡은 자신의 단전이 사라진 게 아니라 숨은 거라고 이해하여 복구할 방법이 반드시 있다고 확신했다.
'단전만 회복하면 단숨에 고수가 된다.'
마환기공의 최고 경지가 바로 모든 혈도가 단전이 되며 가상의 혈도인 단전이 사라지는 것이다. 현재 무룡은 단전이 사라지며 마환기공의 최종 경지와 비슷한 상태가 되었다. 산의 정상은 아니지만, 정상과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에 발을 디뎠다.
단전을 복구하여 마환기공의 수련을 이어갈 수만 있다면 성취가 아주 빠를 것이다. 게다가 이젠 누구도 무룡이 자하동으로 가서 자하신공을 익히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
단전만 복구하면 만사가 해결된다.
'여기서 단전을 복구할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버티자.'
가류 말고 다른 의원을 알지도 못한다. 안다고 해도 찾아가서 자기 단전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할 염치가 없다. 그간 가류가 자신의 치료에 들인 약초와 독초가 얼마나 귀한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기에 무턱대고 찾아가서 단전 치료를 부탁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확실히 안다.
결심을 내린 무룡은 시체가 쌓인 곳에 가서 주검을 뒤졌다. 가류의 매질에 죽은 제자의 시체도 있고 치료에 실패해 죽은 환자의 주검도 있었다.
독무곡 사람들이 즐겨 입는 회색 무복을 입은 자의 소매에서 약초를 다듬는 데 사용하는 짧은 칼을 찾아냈다.
죽은 자의 물건을 불길하다고 하여 잘 건드리지 않는 게 풍습이긴 하지만, 무룡은 그걸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숨을 크고 느리게 쉬며 마음을 다잡은 무룡은 칼로 자기 얼굴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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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일꾼들을 관리하는 제자한테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정하여 잡일꾼으로 취직했다.
건장한 체격 덕분에 일꾼이 되는 건 쉬웠다. 얼굴에 난 수십 개 칼자국은 독무곡의 일꾼이 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가류 자체가 인간보단 괴물에 어울리는 외모고, 독무곡의 제자 중에도 차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인상이 수두룩했다.
"무지렁이, 어서 일어나."
무룡의 일과는 단순하면서도 고됐다.
새벽에 깨자마자 물을 긷고 마당을 쓸어야 했다. 우물이 있긴 한데 제자들만 쓸 수 있어 일꾼들이 쓸 물은 강에 가서 길어와야 한다.
물독을 다 채우면 아침을 거른 채 장작을 패고 누군가가 시키는 심부름을 해야 한다. 점심에 겨우 한 끼 먹고 오후 내내 약초와 독초를 말리고 거두는 일을 한다.
여기까진 몸만 쓰는 일이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되어서 그나마 괜찮았다.
문제는 저녁이었다.
"죽어!"
주먹에 얼굴을 맞은 무룡이 코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곧바로 여러 개 발이 무룡의 몸과 팔다리를 밟았다.
높은 수준은 아니어도 무공을 익힌 놈들이어서 발길질에 실린 힘이 예사롭지 않다.
"야, 일으켜."
때리다 지쳤는지 발길질이 멈췄다. 가장 서열이 높은 제자의 지시에 힘센 놈 둘이 무룡의 팔을 잡고 강제로 일으켰다. 눈썹 오른쪽에 큰 기미가 있는 놈이 도움닫기까지 하며 달리다가 몸을 날려 무룡을 힘껏 찼다.
내공이 실린 발길질이어서 무룡의 몸이 허공을 일 장이나 날았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 무룡이 캑캑거리며 입으로 피를 토했다.
"무지렁이는 때리는 맛이 있어."
무룡은 자신의 처지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이름을 무지렁이라고 했다. 일명 토룡으로도 불리는 지렁이로 자기 이름의 용을 대체한 것이다.
"이놈은 맞아도 싸."
큰 덩치와 얼굴의 수십 개 칼자국 때문에 가류의 제자들도 처음엔 무룡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의 몰매에 숨이 간당간당한 다른 일꾼을 구하려다 눈 밖에 난 바람에 매일 매를 맞게 되었다.
초반에는 괘씸하다는 이유라도 있었지만, 이젠 그저 본인들 화풀이 혹은 심심풀이로 때리고 있다. 특히 누군가가 가류의 채찍질에 기절해 생사의 기로에 선 날엔 매질이 배로 혹독했다.
덩치가 크고 몸이 단단한 무룡을 때리는 게 힘없고 왜소한 다른 일꾼들을 때리는 것보다 쾌감이 커서 어느 순간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매를 맞아야 했다.
"야, 또 일어나는데?"
흐린 눈을 껌뻑이며 몸을 일으키는 무룡에게 또 몰매가 쏟아졌다. 무룡이 끝내 기절했을 땐 때리는 자들도 지쳐 숨을 헐떡였다.
"무지렁이, 어서 일어나."
무룡을 때린 제자들이 떠나자 잡일꾼들이 달려와서 무룡을 부축했다. 무룡이 맞기 시작한 이후로 이들은 매질을 아주 드물게 받았다.
무룡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또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 뻔하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무룡의 생사에 관심이 깊었다.
"이걸 마셔. 어혈을 풀어주는 풀을 달인 물이야."
한 명은 미리 달인 약을 마시게 하고 한 명은 무룡의 상처를 적신 천으로 닦은 다음 빻은 약초를 발라줬다.
"저녁 안 먹었지? 이거라도 마셔."
누군가는 희멀건 죽이 조금 담긴 깨진 사발을 내밀었다.
독무곡에선 점심과 저녁이 나온다. 그러나 처음 매를 맞은 날 먹은 걸 다 토한 이후로 무룡은 저녁을 먹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을 아는 일꾼들이 음식도 조금 빼돌려 무룡에게 먹였다.
"고맙소."
제자들의 매일 같이 이어지는 구타에도 무룡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나 가류의 제자가 되어 단전을 복구하는 일은 여전히 막막했다.
- 작가의말
揮刀毁容 - 칼을 휘둘러 얼굴을 훼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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