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중세력
추향이 귀한 벽력목을 분질러서 청람은 부른 건 잘한 일이었다. 청람이 아니었으면 노계혼을 비롯한 세 무식한 칼잡이는 명황성에서 나오질 못했을 것이다.
"그 강아지 때문에 명황성에 당분간 못 들어간다고요?"
석군은 물론이고, 손청우 역시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손청우는 석군처럼 내공이 빠른 증진을 보이지 못했지만, 검법과 내공의 운용에 관해 수많은 영감을 얻던 차였다.
"강아지 아니고 늑대. 그리고 이름은 예두야. 사람 말 다 이해하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추향이 화를 내자 예두 역시 아직은 전혀 위협적으로 안 보이는 송곳니를 세우며 갸릉거렸다.
"어떻게 할 작정인데?"
청람의 질문에 추향은 바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난 노계혼이랑 오독교로 갈 거야. 삼촌은 벽력문에 돌아가면 되고, 둘은 화산으로 가."
석군은 추향과 헤어지는 게 섭섭했지만, 화산으로 돌아가 형과 여동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슬프진 않았다.
그간 벽파검법을 깊이 익히고 신기한 일을 여럿 겪으면서 마음이 단단해진 덕분이었다.
"화산으로 돌아갔다가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여길 와야겠소. 혹시 아는 술사 있으면 소개 좀 부탁하오."
손청우의 요청에 추향은 고개를 돌려 청람에게 부탁했다.
"삼촌이 적당한 사람을 물색해 줘."
"그래."
가볍게 작별을 마친 추향은 노계혼을 데리고 오독교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손청우는 청람과 다시 만날 날짜와 장소를 약속한 후 석군과 함께 화산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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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빠 사고 쳤다."
난화봉이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얼굴은 물론 성격도 여전히 소녀 같아서 마흔이 넘은 나이라고 믿기지 않았다.
"무슨 사고?"
"몰라. 심부름 온 놈이 개소리하니까 덕구가 죽여버렸어."
추향은 눈길을 덕구한테 돌렸다.
"사부께서 진법에 잘못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실을 말하라고 고문하던 중에 실수로 죽여버렸습니다."
"아직도 독으로 진실을 말하게 할 수 있다고 믿어?"
강호에는 진실을 자백하도록 강제하는 약이 몇 종류 있다. 그러나 무인에겐 거의 쓸모가 없고, 정신력이 강한 사람한테도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나 덕구는 다 약이 부족해서라고 말하며 아무리 강한 자도 자백케 하는 독을 연구하는 중이다.
"세상에 없는 게 어디 있습니까."
덕구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추향은 말문이 턱 막혔다. 덕구나 노계혼이 추향의 뜻에 안 따를 때 설득하던 말 중의 하나여서 도무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너희랑 같이 마교로 가야겠다."
난화봉이 말했다. 전개상 전혀 개연성이 없는 난화봉의 발언에 덕구는 물론 추향도 멍해서 대꾸하지 못했다.
"독성을 구해야 할 거 아니야. 그리고 이번 일에 우리 가문의 반역자들이 얽혀 있다고. 나도 진상을 알아야지."
"그게 마교로 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추향의 질문에 난화봉이 피식 웃었다.
"되게 똑똑하다고 들었는데, 아니네? 강호의 비밀을 알려면 당연히 마교로 가야지. 마교만큼 오래고 기록이 많은 문파가 세상에 어디 있어?"
'졌다.'
세상에서 상대하기 쉬운 사람은 두 부류다. 하나는 똑똑한 사람으로, 비슷하게만 말해도 바로 알아듣는다. 또 하나는 무식한 사람으로, 뭘 듣든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쉽게 받아들인다.
이에 기반하여 추리하면,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명확하다. 아는 게 좀 있는데 아주 잘 알지는 못하는 사람. 그 주제에 자신이 아는 게 전부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
오독교에서만 지낸 난화봉은 마교에 가면 세상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혈교로 들어가는 길은 막힌 게 확실하지?"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 지원을 열 번 요청하면 우린 한 번 정도 들어줬어. 이번에 온 심부름꾼을 죽여버렸으니 당분간은 사람을 안 보낼 거고, 사람을 보내더라도 바로 들어주면 의심할 거야."
"그럼 어쩔 수 없군. 일단 마교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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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교에서 마교까지 가는 길은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세상에 처음 나온 난화봉이 친 사고, 난화봉의 미모 때문에 생긴 사고, 가끔 발동한 추향의 장난기로 벌어진 난장판.
덕분에 마교에 도착했을 때 노계혼과 덕구는 마음고생으로 살이 쑥 빠졌다.
"교주. 여긴 마교니까 말 함부로 하고 그러지 마세요."
"알았어. 내가 앤 줄 알아?"
오는 내내 애보다 못한 모습을 보인 난화봉이 툴툴거렸다.
"차라리 애면 사람들이 너그럽게 봐주죠."
덕구와 노계혼은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추향과 난화봉은 바로 세세겁화봉으로 갔다.
"마교는 교도가 수백만 명이나 되는 큰 문파라고 들었는데, 왜 사람이 이리도 없어?"
"내가 왔다는 소문이 벌써 퍼진 모양이야."
나이가 들고선 좀 나아졌지만, 질풍노도의 시기에 추향이 친 사고가 한둘이 아니다. 누구나 당연히 여기는 걸 거듭 확인하는 버릇 때문인데, 거기에 걸려든 사람은 몸과 마음 모두 극도로 지친다.
"그러면 저기 반갑게 달려오는 사람들은 뭐야?"
"반갑게 달려오긴. 내가 사고 칠까 봐 걱정돼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거지."
놀라운 경공 실력을 뽐내며 달려온 자들은 마교 장로들이었다. 몇몇은 소교주인 사마귀보다 지위가 더 높기도 했으나, 추향 앞에선 모두 순한 양이었다.
"성녀께서 오셨군요.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왜. 오랜만에 왔는데 마을 구경부터 해야지."
"모친과 동생 그리고 소교주께서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엄마를 언급하자 추향도 장난칠 마음이 사라졌다.
"인사해. 여긴 오독교 교주 난화봉이고, 이쪽은 마교 장로들이야."
덕구의 걱정과 달리 난화봉은 꽤 의젓한 모습을 보이며 격식을 갖춰 인사를 나눴다.
그러나 덕구가 괜한 걱정을 한 건 아니었다.
"야, 너 맘에 든다."
교주전에 들어가서 소교주 사마귀를 보자마자 난화봉이 기쁘게 외쳤다.
"우리 애 낳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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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교주와 추향 그리고 당백호와 난화봉은 마교의 비밀 서고에 들어갔다.
현재 강호에 벌어졌거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을 이해하려면 아직 수면에 드러나지 않은 세력이 누군지 알아야 한다.
어떤 세력이고 어떤 목적을 갖췄는지 알아야 강호와 무룡 일가에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찾아."
추향과 당백호는 바로 책을 집어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난화봉은 굿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야, 너 내가 싫어?"
"그런 거 아니다."
"그럼 여긴 애들한테 맡기고, 우린 어디 풀숲을 찾아서..."
"그만."
소교주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여자를 모르는 나이도 아니고, 한두 명을 만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난화봉 같은 여자는 아마 전생에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감정의 교류 없이 욕정에만 따르는 건 짐승이다."
"인간은 그냥 말을 하는 짐승이야. 그리고 짐승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엉덩이 흔들고 몸을 꼬고 난리야."
"말이 안 통하는구나."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추향과 당백호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책을 뒤졌다.
"찾았다."
당백호의 외침에 추향이 분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당백호가 보기엔 사람들 모두 활발하고 애교가 많은 추향만 좋아한다. 그러나 추향이 보기엔 사람들이 점잖고 철이 든 당백호만 아낀다.
추향은 엄마가 어려서부터 끼고 산 당백호를 더 좋아한다고 여기고, 당백호는 아버지가 오랜 기간 떨어져 산 추향만 이뻐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선지 둘은 모든 면에서 상대를 이기려 들었다.
'저 둘의 대화가 너무 재밌어서 집중하지 못했다.'
추향이 반성과 자아 성찰을 하는 사이, 당백호가 신나서 책의 내용을 읽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세력이 있다. 이들의 행사는 은밀하기 그지없어 수천 년 동안 정체를 들킨 적 없다."
소교주와 난화봉도 대화를 멈추고 당백호에게 집중했다.
"이 세력의 특징은 검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세력과 천 년 이상 투쟁한 절검문이 검법의 고수만 받아들이는 거로 거의 확신할 수 있다."
난화봉을 제외한 셋은 강호에 검을 아예 안 쓰는 문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생각이 나는 문파가 거의 없었다.
"의미 없다. 사람은 돈으로 부리면 되니까."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잘 지켜진다. 이미 천 년 이상 맞선 절검문이 있는데도 강호에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걸 보면 암중 세력은 큰 규모가 아니다.
대신 넘치는 재물로 사람을 부렸을 것이다. 추향에게 금고를 털린 사내처럼.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걸 보면 그놈도 배후는 못 되고 심부름꾼 정도겠지.'
심부름꾼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재부를 쌓았다는 점에서 암중 세력의 평가를 신중히 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암중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약 천육백 년 전부터 모든 황제는 암중 세력이 배출했다. 낡은 왕조가 무너지고 새 왕조가 서는 과정도 다 암중 세력의 개입으로 이뤄졌다."
마교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천자로 호칭하는 황제마저 암중 세력의 꼭두각시라는 뜻이니 말이다.
"이들에 맞서 싸우는 세력은 몇 없다. 초반에 언급했던 절검문은 검신 여동빈을 조사로 모시는 검만 다루는 문파로, 문파의 설립 취지가 암중 세력의 와해인 거로 알고 있다. 절검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라도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점을 미뤄볼 때, 모든 부분에서 비밀이 많은 절검문의 취지가 강호에 알려진 건 의외가 아니다."
추향이 이를 빠득 갈았다. 절검문이 세상을 위해 수고한다는 이유로 무룡을 죽일 뻔했던 일을 이해하는 당백호와 달리, 추향은 절검문을 몹시 싫어했다.
"그 외에 아미 심삽파 중의 하나인 아미검문, 그리고 최초의 도문道門으로 알려진 태산도문도 암중 세력의 존재를 감지하고 그 정체를 파헤치고 있다."
아미파는 열세 개 문파로 이뤄졌는데 그중 아미검문과 아미창문의 명성이 강호에 가장 크게 울렸다. 그리고 도문은 출가한 도사로만 이뤄진 문파를 이르는 말로, 태산파를 비롯해 몇 없고 강호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 암중 세력의 부림을 받았던 자가 죽기 전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을 마중구문으로 부른다."
마중구문魔衆九門.
이름부터 뭔가 불길했다.
- 작가의말
서버가 또 아픈가 봅니다. VPN을 써도 글이 안 올라가서 한참 실랑이했습니다.
서버도 그렇고, 코로나로 진짜 다사다난한 일 년이었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롭게 바뀐 해에는 백신과 치료제로 일상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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