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길나락
둘의 생각과 달리 천산자는 추영을 인질로 잡으려는 생각이 아니었다.
추영을 인질로 잡아봤자 마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은 제대로 만든 것도 아닌 작은 배를 타고 노도 혼자 젓지만 상대는 먼 바다로 나가는 게 가능한 커다란 배이고 뱃전에서 보이는 노만 해도 스무 개는 훌쩍 넘었다.
마교가 평범한 협박이 통하는 상대도 아니니 추영을 인질로 잡아봤자 며칠 안에 천산자의 목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날아간다.
천산자가 노를 부러뜨리면서까지 미친 듯이 달리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유일한 지푸라기인 추영과 손잡으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교로 가기 싫은 추영이기에 천산자로선 속수무책인 현재 상황에 뭔가 뾰족한 수를 꺼내 들지도 모른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서로 미워하는 마음도 확고하지만, 마교라는 거대한 적을 상대로 힘을 합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천산자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추영과 무룡의 생각은 달랐다. 둘은 오히려 천산자를 이용해 죽음을 위장할 계책을 세우고 기다렸다.
둘이 이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숨으면 마교가 끈질기게 수색한다. 그리고 천산자가 목숨을 부지하려고 입을 함부로 놀릴 수도 있다.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둘은 암기로 천산자를 죽이는 동시에 천산자의 공격에 당해 바다에 떨어지는 걸 연기해야 한다.
그런다고 마교가 수색을 그만두는 건 아니겠지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둘을 찾는 걸 포기할 가능성이 그냥 바다로 뛰어내리는 선택보다는 훨씬 커진다.
열심히 노를 저어 둘이 탄 배를 따라잡은 천산자가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하고 힘껏 뛰었다. 뒷부분은 갑판이 전부 뜯겼기에 뱃전을 먼저 한 번 밟은 후 갑판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자기 뒤를 쫓는 마교의 배를 확인했다면 추영도 자신과 손잡을 생각을 떠올렸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추영과 무룡의 실력을 무시하는 마음 때문에 크게 경계하지 않았다.
그때 추영이 괴이한 기수식에 이어 팔을 부드럽게 흔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격공멸화장隔空滅花掌?'
추씨 가문의 멸화장이다. 원래는 불 화火를 썼는데 마교가 받드는 성화에 불경하다고 꽃 화로 바꿨다.
멸화장은 살상력이 강한 무공이 아니다. 그러나 멸화장의 특이한 효과 때문에 고수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장법이 되었다.
추영이 내공 대부분을 잃은 건 분명히 확인했지만, 그간 무슨 수작을 부려 자신을 속였을 수도 있고 갑자기 내공을 회복했는지도 모른다.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던 천산자는 황급히 손으로 하단전과 중단전을 보호했다.
멸화장에 맞으면 내공이 일시적으로 굳어버린다. 내공이 멈추면 지칠 대로 지친 천산자는 무룡의 적수가 못 된다.
그때 무룡이 천산자의 음낭을 향해 쇠붙이를 던졌다. 암기를 만들려고 배에 있는 쇠붙이들을 수거했는데 성질이 안 맞거나 모양이 안 맞아 암기 재료가 되지 못한 것들을 모아둔 것이다.
음낭은 남성의 요해인 것도 있지만, 임독 양맥이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제대로 당하면 멸화장에 맞은 것처럼 내공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길 가능성이 크다.
단전을 보호해야 하여 양손을 쓸 수 없기에 천산자는 내공을 용천혈로 보낸 후 강하게 뿜어냈다. 동시에 엉덩이와 허리를 좌우로 흔들어 몸을 움직였다.
무림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허공답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칠 푼 정도 흉내는 냈다고 볼 수 있는 대단한 경공이다.
'속았다.'
추영의 멸화장은 가짜였다. 실제로 추영은 멸화장의 운기를 익혀내지 못했고 그저 초식 몇 개만 외워뒀다.
둘의 방해를 뿌리치고 갑판에 착지한 천산자는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에 정신이 분산되었다.
음낭을 노리던 쇠붙이가 허벅지를 스치며 피가 흐른 거지만, 혹시 오줌을 지린 게 아닌지 걱정된 탓이다.
그때 무룡이 목검을 들고 천산자를 공격했다. 칼이 없어 무딘 쇠붙이로 어설프게 깎은 목검이지만, 필살의 의지를 담은 벽파검법 덕분에 진검 못지않게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천산자는 천산파의 절기인 산화수散花手를 펼쳐 목검을 막았다. 내공을 실은 손과 부딪친 목검이 박살 나고 무룡은 반탄력을 못 이겨 뒤로 넘어졌다.
그때 추영의 손이 들렸다. 비록 둘을 얕잡아 보는 마음이지만, 암기에 대한 경계는 한 번도 늦춘 적 없다. 천산자는 다른 함정이 있을지 몰라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추영의 손을 단단히 주시했다.
그때 픽 소리와 함께 천산자의 음낭이 터졌다. 바닥에 넘어진 무룡이 손잡이에 숨긴 암기를 발사한 것이다.
천산자의 몸 상태와 내공이 정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리 주의를 추영에게 쏟았어도 제때 반응하여 피하든지 막든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판자 몇 개에 의지해 바다를 열흘 이상 표류했고 추영과 무룡의 배를 빼앗는 과정에 사흘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냈다.
배를 빼앗아 바다로 간 후에 음식과 물은 충분히 섭취했으나 언제 암초를 만날지 몰라 잠은 자지 못했다. 그러다 마교 배를 발견하고 바로 도망치느라 내공도 체력도 다 끌어 썼다.
마교를 먼저 발견한 천산자가 바다에 뛰어들어 숨었다면 상대가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속에 켕기는 게 있는 천산자는 배에 탄 마교 무사의 복장을 확인한 순간 바로 배를 돌려 전속력으로 도망쳤다.
결론을 말하자면, 추영이 만들고 무룡이 발사한 암기에 당한 천산자는 음낭이 터진 동시에 암기에 묻은 독에 중독되었다.
'살았다.'
추영의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무룡이 뒷걸음치자 추영이 바로 등에 업혔다. 이제 뱃전으로 가서 뭔가 암기에 당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바다에 떨어지면 계획한 것과 한 치의 다름이 없는 전개다.
'면면부절로 마교가 포기할 때까지 버틴다.'
마지막 난관이 남긴 했지만, 이건 진짜 하늘에 맡겨야 한다. 무룡과 추영의 힘이나 머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때, 무룡이 비칠거리다 퍽 쓰러졌다.
추영의 계획에는 큰 허점이 있었다. 여자인 추영은 음낭을 잃은 천산자가 느낄 고통과 분노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무룡과 추영이 바다로 뛰어들 기미를 보이자 천산자는 살을 엔 후 소금을 가득 붓고 거기에 흡혈 개미까지 쏟은 것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판관필을 꺼내 힘껏 던졌다.
천산자의 필생 내공을 담은 판관필 두 자루 중 하나는 허망하게 빗나갔다. 필경 음낭이 터진 고통은 아무리 대단한 고수여도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수련을 쉬지 않은 천산자의 노력도 고통이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정확히 날아간 판관필이 무룡의 명치에 사정없이 꽂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판관필 자체가 관통이 아닌 점혈을 목적으로 한 무기여서 끝이 무디다는 것이다. 마환기공으로 충격을 분산하며 모든 타격을 무룡이 흡수한 덕분에 등에 업힌 추영은 무사했다.
음낭이 터진 고통에 복어 독을 비롯해 여러 가지 독이 섞인 혼독混毒에 중독된 데다가 억지로 내공을 끌어다 쓴 천산자 역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세요."
추영이 무룡의 귀에 대고 낮지만 명확하게 말했다.
"당신은 양부와 함께 산속에서만 살던 사람입니다. 양부는 천노가 죽였고 당신은 내 설득 때문에 무룡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나와 함께 천노를 속였습니다. 화무룡인 척 천노를 속인 다음 나와 함께 도망쳤습니다. 당신은 내 이름만 압니다.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른 건 천노에 대한 복수심과 무공을 가르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룡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힘껏 저었다. 가의신공으로 추궁과혈하고 마교에 순순히 잡히려 했던 때처럼 추영이 혼자 모든 죄를 감당하고 자신만 살리려는 거로 생각해 완강히 거부했다.
"고집부릴 때가 아닙니다. 당신은 방금 말한 것밖에 모릅니다. 그리고 남은 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당신도 살고 나도 살 방법이 있습니다. 날 믿으세요."
추영도 산다는 말에 그제야 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파도 참아요."
말을 마친 추영이 무룡의 배에 꽂힌 판관필을 뽑았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무룡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그대로 기절했다.
추영은 판관필을 들고 천산자를 덮쳤다. 천산자는 음낭이 터지면서 음맥과 독맥으로 흐르던 흐름이 멈춘 탓에 무기력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썩어도 준치라고, 추영을 반드시 저승길 동무로 데려가려는 천산자의 각오는 어마어마했다. 내공을 대부분 잃어 속도가 느린 추영으로선 천산자가 필살을 다짐한 일격을 피할 길이 없어 보였다.
그때 소리도 없이 날아온 화살이 천산자의 뒤통수에 꽂힌 후 이마로 삐져나왔다. 추영은 자신의 얼굴에 튄 뇌수 찌꺼기를 털어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낭군도 나도 아이도 내가 살린다.'
마교의 손을 빌려 천산자를 제거했기에 추영이 어떤 거짓말을 해도 까밝힐 사람이 없다. 추영은 자신이 급하게 세운 계획을 되새기며 허점이 없는지 찬찬히 점검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마교의 배에서 바다를 향해 널빤지를 던졌다. 곧 흰 장포를 입은 인영이 바다에 던진 널빤지를 밟으며 추영과 무룡이 있는 배로 넘어왔다.
"장로 후문영이 성혈 가문의 마지막 불씨께 문안 올리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저기 저 남자를 살려라."
"이유가 분명치 않은 지시엔 따를 수 없소."
"저자는 용혈이다. 교주껜 비밀로 해라."
후문영은 불혹을 갓 넘긴 나이임에도 마교에서 위신이 대단하다. 약관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장로가 된 지도 십 년이 넘는다.
추영이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지만, 괴물이 곧 깨어날 이 시기에 용혈이 마교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올지 바로 계산이 끝났다.
"최선을 다해 구명하겠소. 그리고 성녀께서도 장난을 멈추기 바라오."
"가문의 피에 맹세컨대, 후 장로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를 것이다. 대신 용혈을 구하지 못하면 마교도 주검으로 돌아가겠다."
후문영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내상약을 무룡에게 먹인 후 배의 구멍에도 금창약을 발라줬다. 그리고 손목을 잡고 기를 약하게 흘렸다.
"대단한 양강 계열의 기공을 익힌 흔적이 있는데 아쉽게 됐소. 단전이 완전히 파괴되어 복구할 가능성이 전무하오."
- 작가의말
어이 젊은 친구, 주인공답게 행동해 - 단전을 잃는 전개에 글쇠한테 강력히 항의하는 무룡에게 곽철용이 건넨 조언
단전 묻고 더블로 가 - 항의가 뭉개지고 낙심한 무룡에게 곽철용이 건넨 의미심장한 한마디
단전이 없다고? 기해혈은 무너졌냐? - 질질 짜는 무룡에게 곽철용이 홧김에 한 말
나도 순정이 있었다 - 추영을 그리워하는 무룡에게 곽철용이 뜬금포로 던진 말
그래서 깡패가 된 거야 - 대충 순정이 짓밟혔음을 암시하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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