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소실
검극은 심검을 연속 두 번 펼치며 지쳤다. 서문문검 역시 절검참마를 비롯해 어려운 재주를 여럿 선보이며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벽력문이 절반만 와도 괴물과 무룡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처지다.
"당신은 일곱 번째 심장과 무룡을 동시에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큰 심장을 모두 잃었다고 괴물이 죽었을까요?"
서문문검은 가슴이 철렁하며 손발이 떨려왔다.
"인간도 심장이 멈춘다고 바로 죽진 않습니다. 어떤 짐승은 심장을 떼도 일각 이상 꿈틀거리며 숨을 이어갑니다. 이처럼 거대한 괴물이 가장 큰 심장 일곱 개를 잃었다고 바로 죽을까요?"
서문문검은 자신이 떠올린 끔찍한 상상 때문에 뒷걸음질을 연신 쳤다.
"만약 제가 방해하지 않았다면 무룡이 죽었을 것이고, 그러면 괴물이 여의주를 얻었을 겁니다."
끝내 버티지 못한 서문문검이 주저앉았다.
"괴물이 언제 죽을지 우린 모릅니다. 그러니 무룡을 반드시 살려야 합니다. 만에 하나 무룡이 괴물보다 먼저 죽으면 세상이 끝납니다."
풀이 죽은 서문문검은 고개를 끄덕여 벽력문이 무룡을 데려가는 데 동의했다. 그 모습을 보며 검극도 속이 떨렸다.
'나도 필승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대인데 말 몇 마디로 주저앉히는구나. 검이 부러지는 것보다 마음이 꺾이는 게 훨씬 위험하다고 하더니, 저 수준의 고수한테도 먹힐 줄이야.'
벽력문의 넷째는 작은 벼락 덩어리를 소환한 다음 괴물의 입으로 들어가려 했다. 세 치 혀로 우위를 점하긴 했으나 무공도 경지도 서문문검과 비교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서문문검처럼 밖에서 검을 휘둘러 무룡을 움직일 재주가 없으니 직접 괴물의 몸에 들어가야 한다.
그때.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커다란 황금마차가 나타났다. 아무 조짐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황금마차는 생명이라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괴물을 삼켰다.
불시에 벌어진 괴사에 검극도 서문문검도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겨우 사람이 둘이나 탈까 말까 한 작은 마차인데 길이가 백 장이 넘은 괴물을 순식간에 삼켜버렸다.
"꺅, 꺅꺅."
그리고 어느새 나타난 까마귀 한 마리가 자신을 말로 잘못 알았는지 굴레를 쓰고 마차를 끌었다. 발이 넷 달린 말 대신 날개 둘 달린 새가 끄는 마차는 당연하게도 하늘을 날았다.
"저, 저."
벽력문의 넷째가 멀어지는 마차를 손가락질하며 소리를 연신 질렀다.
"누군지 아는가?"
검극이 상냥한 말투로 질문했다. 사안의 엄중함을 알기에 여차하면 주화입마를 각오하고 검을 던질 생각이었다.
"천방기사라고, 사고를 너무 쳐서 자기 가문에서도 쫓겨난 천방지축입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니 그냥 둬도 괜찮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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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방기사는 천재다. 가문에서 천 년 동안 있은 적 없던 어마어마한 천재다.
그러나 총명한 머리에 비해 그릇이 작다. 천방기사의 재능은 그릇에 오롯이 담기지 못하고 흘러넘쳤고, 재능이 밖으로 흐를 때마다 큰 사고를 쳤다.
결국 가문에서조차 반기지 않는 사람이 되어 원수들을 피해 곤륜산 끝자락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사고의 횟수나 규모와 비교해 인명 피해는 없어서 곤륜산 끝자락까지 이를 갈며 쫓아오는 자는 적었다.
그러나 길 가다 마주치면 칼부림을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은신처를 잘 떠나지 않았다.
무룡에게 갑옷을 건네주는 일을 핑계로 은신처를 떠난 천방기사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너무 아쉬웠다.
고민 끝에 전장 부근에 산사태가 난 산에 임시 은신처를 만들었다. 갓 허물어져서 위험한 산에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았기에 들키지 않고 잘 숨었다.
천리안千里眼과 순풍이順風耳의 법술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모든 대화를 엿들었다. 심지어 서문문검이 검극한테 보낸 전음까지.
'아우가 위험한데 형이 가만히 있으면 도리가 아니지.'
맨날 도리를 찾다가 번번이 사고를 치고 도망쳐야 했던 과거를 떠올리지 못한 천방기사는 바로 움직였다. 모든 사고뭉치가 그러하듯이 행동력 하나는 정말 끝내줬다.
두 개의 분신이 각각 마교와 정의연의 진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교 진영에 나타난 분신은 소교주의 모습을 했다.
"놈들이 교주를 암해했다."
사실 이때 교주는 멀쩡했다. 전음을 엿들은 천방기사가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천룡갑을 입은 대장로가 제때 나타나 검극의 심검에 당할 위기에서 교주를 구한 것이었다.
"분부를 내리십시오."
대장로는 황급히 경공을 펼쳐 떠났고, 남은 장로들은 한쪽 무릎을 꿇는 것으로 소교주의 지시에 절대복종할 것임을 밝혔다.
정확히 서열을 따지면 소교주보다 몇몇 장로가 더 높기에 꼭 필요한 절차였다.
"당한 만큼 갚아준다. 오늘 정의연의 무리를 최대한 죽여야 이후에도 싸움을 이어갈 수 있다."
십 년에 가까운 기간 싸우고 있지만, 자신이 망가지면서까지 상대를 궁지로 몰려고 한 적은 없었다. 대규모로 싸워도 충돌 수준을 적절히 통제하며 승기가 잡히기만 기대했다.
그러나 검극이 교주를 암해했다면 균형이 깨져 마교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다. 모든 장로가 소교주의 결단을 칭송하며 앞다퉈 살기를 키웠다.
한편.
"마교 교주가 검극을 기습했소."
서문문검의 모습으로 정의연 진영에 나타난 분신이 말했다.
"곧 마교가 공격할 것이오. 대비하시오."
"검극께선 별일 없습니까?"
화무룡이 질문했다. 화무룡과 서문문검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천방기사의 분신은 낯선 사람 대하듯 무심하게 대꾸했다.
"별일 없으면 직접 왔겠지. 별일 있으면 내가 당장 도망치라고 했겠지."
화무룡은 살짝 의심이 들었으나 마교쪽에서 소란이 일자 더 캐묻지 못했다. 화무룡과 서문문검의 관계는 딱히 비밀이 아니지만, 강호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오늘 절검문주의 신분으로 나타났기에 화무룡을 모른 척하는 것도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화무룡은 의심을 접고 마교의 동태에 주의를 돌렸다.
그렇게 마교와 정의연을 잡아둔 천방기사는 은밀하게 움직여 괴물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천방기사가 도착했을 땐 이미 무룡이 괴물의 뱃속에 들어간 후였다.
다행히 벽력문의 제자가 나타나 북천검의 공격을 방해했다. 비록 강호에는 명성을 떨치지 못했으나 절검문의 신기인 호익의 주인이 되었다가 다시 검을 잡은 북천검의 실력은 진짜였다.
목숨을 건 대결에선 경험 부족으로 낭패를 볼지도 모르지만, 아무 방해도 안 받고 양의검을 제대로 펼쳤으면 무룡은 반드시 죽은 목숨이었다.
'하늘의 뜻이 아우한테 있는 거야.'
천방기사는 사고뭉치답게 판단을 쉽게 내렸다. 괴물과 여의주에 얽힌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 알만한 사람이기에 누구보다 신중해야 하는데, 그릇이 작아 깊은 고민은 태생적으로 어려운 사람이다.
그래서 바로 황금마차를 소환해 괴물과 무룡을 함께 실었고, 탈것이자 유능한 부하이자 유일한 벗이었던 까마귀를 소환해 마차를 끌고 흑석산으로 도망치게 했다.
그런데 벽력문의 넷째가 까마귀를 알아보고 천방기사의 짓임을 한눈에 간파했다.
천방기사가 사고 칠 때마다 늘 선봉에 섰던 붉은 부리의 까마귀는 까마귀가 불길한 새라는 속설이 중원에 널리 퍼지는 데 크게 일조를 한 주범으로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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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사는 곳은?"
서문문검의 질문에 벽력문의 넷째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곤륜산에 숨었다는 소문이 있긴 한데 검증해본 건 아니라서요."
어차피 무룡이 괴물보다 먼저 죽는 걸 제지하여 세상을 구했고, 덤으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했던 친구의 목숨도 구했다.
천방기사가 사고뭉치는 맞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고 멍청이도 아니다. 당연히 무룡을 구하려고 전력을 다할 것이며 넘치는 재능으로 벽력문을 포함한 누구보다 더 확실하게 무룡을 살릴 것이다.
자기 몫은 넘치게 했다는 생각에 벽력문 넷째는 천하태평이 되었다.
서문문검은 잠깐도 고민하지 않고 바로 경공을 펼쳐 곤륜산 방향으로 달렸다. 검극은 멀어지는 서문문검과 혈향을 진하게 풍기는 전장을 번갈아 보다가 결국엔 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벽력문의 넷째는 바닥에서 곰 사내의 것이었던 일곱 비수를 챙긴 후 벽력문으로 돌아갔다.
'난 검의 선택을 받은 것인가 신기에 버림받은 것인가.'
멍한 얼굴로 곤륜산을 향해 달리면서 서문문검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절검문 내부에서도 신기를 받은 다음 검을 돌려받는 게 더 대단한지 처음부터 검을 받는 게 대단한지 의견이 분분하다.
무력이나 경지 등은 서문문검이 북천검보다 확실히 앞섰다. 더구나 북천검이 서문문검보다 무려 서른 살이나 많기에 우열은 명확하다. 삼십 년 덜 수련했는데도 더 강하면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처음부터 검을 받는 게 대단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서문문검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서문문검은 천검산장에 있는 검법 중 수백 개를 익혔고 최근에 초식의 구애를 받지 않고 검이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이는 처음부터 검을 받은 덕분이다.
반면 북천검은 호익을 반납하고 검을 다시 잡은 지 오래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 새 검법을 배우고 익히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평생 무공을 수련한 몸이야 나이를 먹었다고 딱히 문제 될 게 없지만, 수련만 하며 강호 경험이나 대련 경험이 턱없이 부족한 건 큰 걸림돌이 되었다.
'북천검 선배가 이십 년 일찍 검을 받았다면?'
어려서부터 검총아로 불리며 주변의 기대를 듬뿍 받았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적이 한번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잘못된 판단으로 일을 크게 그르칠 뻔한 게 어마어마한 타격이 되어 서문문검을 괴롭혔다.
'이대로는 주화입마가 올지도 모른다.'
벽력문의 넷째는 일의 엄중함을 모르고 헛소리를 할 모자란 아이가 아니다. 서문문검이 천방기사에게 집착한 건 직접 눈으로 이번 일의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이 나쁜 결과로 이어졌다면, 자신은 검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그릇이 작아서 신기의 버림을 받은 것이다.
잘못된 선택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다면 모든 일에 하늘의 뜻이 있다는 서문문검의 말버릇대로다. 자신이 검의 선택을 바로 받은 것에도 하늘의 뜻이 있을 터이니 신기에 버림받은 게 아닌지 의심하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든 결과만 확인하면 되기에 서문문검은 걸음을 재촉하는 대신 잠시 쉬면서 마음을 다스리기로 했다.
'아깐 뭐가 그리 조급했지?'
생각의 갈래가 잡히며 마음이 안정을 찾았다. 서문문검은 날이 절반 사라진 검을 무릎 위에 놓은 채 눈을 살포시 감고 명상에 잠겼다.
"고생했구나."
이미 여러 번 있은 일이어서 서문문검은 놀라지 않았다.
"모자란 후손이 사조를 뵙습니다."
여동빈이 풍성한 수염을 쓸며 자애롭게 웃었다.
"네가 모자라면 천하에 안 모자란 놈이 어디 있겠느냐."
"새로운 분부가 있습니까?"
마음의 여유가 적어 서문문검은 겸양의 말을 뱉는 대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괴물이 죽고 여의주도 사라졌다. 이젠 네 삶을 살아라."
꿈속이지만,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최근 검이 자유를 얻으며 뭔가 계속 불편함을 느꼈는데, 서문문검을 옭아매던 사슬이 드디어 풀렸다.
"무룡이라는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의주가 사라졌다고 하니 괴물과 함께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룡이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 질문했다.
"괴물은 죽고 여의주는 사라졌다. 그러니 그 아이의 생사에 더는 마음을 두지 말아라. 인연인 것과 아닌 것을 확실히 구분하여 맺고 끊음을 잘해야 선계에 발을 들일 수 있다."
서문문검은 사조의 가르침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인연이 끊어져서 나도 그 아이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구나."
여동빈이 사라지고 서문문검은 잠에서 깼다. 여전히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훔친 서문문검은 곤륜산 방향을 한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젠 절검문주보다 서문문검으로 살아도 된다.
- 작가의말
천방기사의 이름 유래가 나왔습니다. 천방지축의 천방, 이상한 놈이라고 하여 기사.
그리고 까마귀가 불길하다는 오명을 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정말 나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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