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신도록
"언제까지 책을 읽어야 합니까?"
무룡이 퀭한 눈으로 질문했다.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책만 읽는 것이 무공 수련보다 백 배는 힘들다. 차라리 종일 가류의 채찍을 맞는 게 더 편할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든다.
"어느 순간 더는 읽을 책이 없구나 하고 느낌이 올 것이다."
대화하는 사이에도 둘은 책장을 넘기는 걸 잊지 않았다. 무룡은 천방기사가 두 권을 읽을 사이 세 권을 읽는 기염을 토했다.
"제길. 난 절대 한계다."
천방기사는 읽던 책을 허공에 던졌다.
"절대 한계는 뭡니까?"
"내 그릇이 꽉 찼다. 담은 걸 소화하거나 그릇을 키우기 전엔 여기 책을 읽을 수 없다."
말을 마친 천방기사가 바닥에 드러누워 눈을 감더니 이내 코를 골았다.
비록 같은 공간에 있지만, 책을 읽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허감이 몰려왔다.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
마음을 다잡은 무룡은 허공에서 책을 잡아 빠르게 넘겼다. 채 열 호흡도 끝나기 전에 손가락 두 개 두께의 책을 다 읽고 다음 책을 골랐다.
며칠을 푹 잔 천방기사가 깨어났을 때 무룡은 눈을 감고 순심술의 구결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질이 대단한 놈이다.'
자신이 몇 번에 걸쳐 읽은 책을 다 훑고도 한계에 이르지 않았다. 이는 무룡의 그릇이 천방기사보다도 훨씬 크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데 머리가 못 따라가는구나.'
대신 무룡은 너무 자주 순심술을 펼쳤다. 그릇이 크긴 하지만 머리가 받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품은 재능이 큰데 머리가 둔하면 몸이 고생하지. 불쌍한 놈.'
천방기사는 품은 재능과 비교해 지나치게 좋은 머리 때문에 사고를 많이 쳐 다른 의미로 고생했다.
그때 무룡이 눈을 번쩍 뜨고 자신이 쌓아둔 책더미를 마구 뒤졌다.
"찾은 거야?"
무룡의 돌발 행동에 흥분한 천방기사가 다그쳐 물었다.
"맹룡도猛龍圖가 뭔지 압니까?"
실망한 천방기사는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칠신도록七神圖錄이라고 있다. 거기 세 번째가 맹룡도다."
맹룡도가 적힌 책을 찾은 무룡이 한 글자씩 곱씹으며 천천히 읽었다.
순심술로 머리를 비우고 깨어보니 심상에 맹룡도가 아주 선명하게 맺혔다. 혹시 여의주와 관계된 게 아닌지 기대되어 책을 찾아 탐독했다.
"이건 여섯 번째인 호세도虎勢圖이다."
칠신도록은 고대에 인간이 내공을 잘 모를 때 사용하던 운기법이다. 천방기사는 자신이 읽었던 책 중에서 호세도가 적힌 걸 찾아 무룡에게 건넸다.
"이겁니다. 이거면 자하동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무룡이 흥분한 얼굴로 고래고래 외쳤다.
맹룡도는 심법 수련과 비슷하게 내부에서 운기하는 방식이다. 호세도는 공명을 통해 외기를 움직이는 방식이다.
살기나 투기를 뿜어내거나 병장기를 휘두를 때 외기로 타격을 강화하거나 속도를 빨리하는 등 방법이 호세도에 속한다.
"맹룡도로 자하신공의 방식으로 내부에서 운기한 다음 호세도로 기운을 뿜어내면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어떤지 한 번 해봐."
무룡은 맹룡도를 이용해 벽파공의 운기를 시험했다. 예전엔 단전 부위에서 멈추던 운기가 맹룡도 덕분에 조금 덜컥거리긴 해도 흐름이 이어졌다.
그러나 새로 추가된 여섯 혈도까지 합쳐 총 이백사십팔 개 혈도를 경과해야 하는 자하신공은 달랐다.
가끔은 채 열 개 혈도도 못 통과하고 흐름이 끊겼고 어쩌다 모든 혈도를 경유해도 단전 위치에서 흐름을 이어가지 못했다.
정말 어쩌다 단전을 지나 두 번째 흐름을 형성하더라도 호세도로 밖으로 뿜어내는 데 실패했다.
호세도는 안의 내공을 밖으로 뿜어내는 게 아니라 안과 밖의 기운을 공명하게 하는 방식이다. 응용을 통해 소량의 내공을 뿜어내는 건 가능하지만, 쉽지도 않고 의미도 없다.
물론, 자하동의 문만 열면 되는 무룡에겐 충분했다.
"이론상으로 전혀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현할 가능성도 크구나. 열심히 수련해라."
그때부터 무룡의 일과에 맹룡도와 호세도의 수련이 추가되었다. 고대의 운기법이어서 기교보다는 의지에 의존하는 면이 커서 오래 수련할 수 없었다. 무룡은 두 운기법의 수련으로 지칠 땐 잠을 자거나 책을 보며 피로한 마음을 회복했다.
"제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자하신공의 운기를 열 번 시도하여 세 번 성공할 정도가 됐고 호세도로 기운을 뿜는 건 열 번 시도하여 한 번 성공할 정도가 되었다.
단순한 계산으로 백 번 시도하면 세 번 정도 성공할 수 있다.
"이 년 하고도 석 달이구나."
천방기사의 말에 무룡은 깜짝 놀랐다.
'시간이 많지 않다.'
"저는 이만 자하동으로 가야겠습니다. 혹시 천방기사께서도 함께 가시렵니까?"
"아니. 난 사정이 있어 여길 못 떠난다."
아쉬운 표정을 짓던 무룡이 갑자기 천방기사를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하동에서 여의주를 찾는 방법이나 단서를 아신다면 알려주십시오.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넌 반드시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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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밖이었다. 약 삼 리 거리에 흑석산의 모습이 보였고 땅에는 커다란 꾸러미가 두 개 보였다.
굳이 열어보지 않아도 냄새만으로 음식 꾸러미임을 알 수 있었다.
무룡은 흑석산 방향으로 큰절을 올린 후 봇짐과 음식 꾸러미를 짊어지고 동쪽으로 달렸다.
맹룡도로 몸속의 기운을 돌려 몸을 가볍게 하고 호세도로 외기와 공명해 기류를 타니 경공을 펼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보았다.
운기가 중단되거나 공명이 실패하면 바닥을 호되게 뒹굴기도 했지만, 올 때보다 최소 열 배는 빠르게 이동했다.
채 열흘도 안 걸려 무룡은 마교와 정의연의 전쟁 지역에 발을 들였다.
정마대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검극이 참전하며 소규모 전투의 의미가 사라졌다. 수십 명이나 백 명 정도 규모로 몰려다니다가 검극이나 마교 교주를 만나면 허무한 죽음이 되고 만다.
검극이나 마교 교주를 만나더라도 어느 정도 버티려면 최소 천 명 이상 뭉쳐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전투 규모가 점점 커졌다.
대규모 전쟁은 자주 펼치기 어렵다. 자칫 병력이나 음식이나 약의 공급이 중단되면 순식간에 패배로 몰릴 수 있기에 서로 조심하며 한 달에 한 번 정도 수천 명 혹은 만 명 이상 규모로 접전을 펼쳤다.
덕분에 무룡은 별 방해를 받지 않고 전쟁 지역을 빠르게 가로질러 화산에 도착했다.
"사형, 별래무양하셨습니까."
장문인이 된 청우는 수염을 길러 훨씬 위엄있는 모습이 되었다.
"장문 사제께선 잘 지내셨소?"
"사형의 음양강수 덕분에 많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청우는 화산의 초청장을 받고도 장문인 취임식에 오지 않은 가문과 문파를 일일이 찾아가 음양강수로 대문의 돌사자나 돌기린을 녹인 다음 저주의 말을 남겼다.
회산파의 소행이든 이매망량의 장난이든 쉽게 지나칠 일이 아니다. 겁을 잔뜩 먹은 자들이 늦게나마 선물을 들고 옥녀봉을 찾아 청우의 장문인 취임을 축하했다.
회잔악이 예전에 화무룡에게 했던 말처럼 강호에서 실력이 전부가 아니다.
근처의 수많은 문파가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자 화산의 위신이 절로 높아졌고 진행하는 사업들이 순탄하게 풀렸다. 청우와 석람이 벌인 수많은 사업이 연이어 성공한 덕분에 화산파는 곳간에 재물이 넘칠 지경이 되었다.
이젠 무력이 아닌 이익 때문에 수많은 문파와 지역 유지들이 화산과 가까워지려고 애썼다.
"그래도 근본은 잊지 말아야 하오."
"당연합니다. 문규를 바꿔 장문인보다 한 배분 높은 장로들에게 문파를 지키는 책임을 지게 하고 장문인과 같은 배분은 강호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문파의 이익을 도모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어린 제자들은 수련에만 힘쓰고 있습니다."
화씨 가문이 장문인 직을 세습하면서 다른 가문을 견제하느라 합리적이지 못한 구조를 고집해왔다.
장로들은 거의 허울뿐인 감투로 실제로는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장문인과 같은 배분의 제자들도 제자 양성을 빌미로 문파에 잡아두고 장문인을 따르는 자들만 강호로 나가게 했다.
어린 제자들도 장문인의 줄을 잡는 데 혈안이 되어 수련을 등한시했다. 노혼만 해도 화산제일검이란 명호를 얻고도 조양봉에서 자하동을 지키는 의미없는 일을 맡아 허송세월했다.
당연히 야심이 있는 자는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기보다 장문인 혹은 대사형과 친분을 다지는 데 더 심혈을 기울였다.
청우는 과감하게 장로들의 권한을 늘이고 같은 배분의 제자들에게도 능력을 뽐낼 기회를 줬다.
"그러다 장문인 자리가 위태한 건 아니오?"
무룡의 걱정에 청우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강호는 결국 칼부림으로 끝난다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현재 화산에서 제 검을 열 합 이상 받을 자가 없습니다."
태청심법과 태청검법을 익히고부터 청우의 무력은 빠르게 상승했다. 게다가 옥허심법에 맞춰 직접 창안한 매화검법 역시 위력이 대단하여 많은 제자의 추앙을 받았다.
장문인 고유의 권한 대부분을 장로와 같은 배분의 제자들에게 나눴지만, 오히려 장문인의 지위는 더 탄탄해졌다.
"장문 사제의 성정에 거슬리겠지만, 어느 정도 자기 세력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오."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우도 장문인 자리를 든든히 지키려면 자기 세력을 어느 정도 키워야 함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정 자체가 무리를 짓는 데 거부감을 느껴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무룡이 건넨 조언이 염두에만 두던 일을 끝내 행동으로 옮기는 계기가 되었다.
"자하동으로 들어갈 예정이오."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편법을 하나 찾았소."
"제가 어떻게 도울까요?"
"정기적으로 계곡의 자하동 문 앞에 잘 상하지 않는 음식을 놔주면 되오."
부탁을 마친 무룡은 경공을 펼쳐 옥녀봉을 떠났다. 괴물과 싸우고 벌써 팔 년이 흘렀다. 괴물이 깨는 게 빠르면 십 년이라고 했으니 어서 자하동의 비밀을 풀어 여의주를 찾아야 한다.
'여의주를 줘서 독룡이 승천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괴물이 사라지면 추영은 마교 교도들의 존경만 듬뿍 받는 쓸모가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런 상황에서 추영이 마교를 떠난다고 하면 교주와 장로들이 두 손 들어 찬성할 가능성이 크다.
교주가 권력 지향적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개인의 성정이 어떠하든 최고의 권좌에 앉으면 권력의 분산을 꺼리는 게 일반적이다.
'제발, 꼭 찾아야 한다.'
열두 번째 시도에 자하동 문이 열렸다. 무룡은 기름으로 구운 밀가루 떡과 마실 물을 한가득 짊어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작가의말
일곱 구슬이 모이는 순간 신룡이 나타납니다. 이제 다섯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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