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본색원
계혼은 심장이 쾅쾅 뛰었다.
오랜만에 잡아보는 검이고 진검이다. 그리고 첫 실전이다.
사람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검으로 상대 숨통을 베야 할지도 모르고 팔다리를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
"벽파검법은 뭐라고 했지?"
"살인 검법이고 검을 든 순간 상대를 죽이는 것만 생각합니다."
"가자."
아직 내공이 부족한 계혼은 물론, 전신에 막대한 내공을 품은 무룡마저 경공을 펼치지 못한다.
둘은 무작정 소금 창고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당연히 창고를 지키던 자들 눈에 띌 수밖에 없고 주변에서 쉬던 무사들마저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고수는 없다.'
무룡과 계혼이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벽파검법은 싸우기 전에 늘 상대를 관찰한다. 무식하게 몰아치는 게 아니라 어떻게 몰아칠지 미리 생각하고 움직인다.
무기를 제대로 잡았는지, 자세가 자연스러운지, 몸이 굳었는지, 상대의 눈이 어디를 주시하는지 등을 순식간에 관찰해 실력을 짐작한다.
다리를 얼마나 벌렸는지와 몸과 무기의 거리 등으로 공격적인지 수비적인지 성향도 알아낸다.
사실 무룡도 첫 실전이나 다름이 없지만 마환기공을 믿고 침착을 유지했기에 서른이 넘은 상대를 일일이 분석하는 데 차질이 없었다.
계혼 역시 싸움이 시작되자 떨지 않고 상대를 가늠하는 데 집중했다.
선수는 무룡이었다.
암도흉용은 벽파검법의 초식 중 동작이 작은 편이다. 정면에서 달려들던 무사는 무룡의 커다란 덩치에도 불구하고 검에 실린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무기를 휘둘렀다.
은자 서른 냥짜리 무룡의 흑철검을 때린 상대의 무기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부러졌다.
"보검이다."
그 장면을 본 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보검을 들었으면 고수라는 생각은 안 하나?'
보검이 탐났는지 대부분 무사가 계혼을 무시하고 무룡에게 덤벼들었다.
"합격기."
무룡의 말에 계혼이 노도박안을 펼쳐 세 무사를 검격에 끌어들였다. 무룡은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을 무시하고 암파조난暗波助瀾을 펼쳤다.
암파조난은 다른 사람을 도와 협공하는 초식으로 무림에서 정말 보기 드문 유형이다. 실전으로 검술을 완성했기에 있을 수 있는 희귀한 초식으로 무룡은 노혼과 함께 합격을 자주 연습했었다.
비록 계혼과는 함께 수련한 적이 없지만, 말로 들려준 적이 있어 어렵지 않게 해냈다.
계혼이 노린 셋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구르는 동시에 네 개나 되는 무기가 무룡의 등을 때렸다.
"몸에 보의를 입었다."
무룡은 아무리 봐도 고수가 아니었다. 달려올 때 경공을 펼치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도 어딘가 엉성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들의 무기가 상대 살을 찢지 못한 걸 보의를 입었다고 오해했다.
"머리와 하체를 노려."
양심 따위는 버린 지 오래고 분별력도 없는 자들이다. 보검과 보의를 탐내 사신이 손을 흔드는 곳으로 서슴없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조심. 어린놈이 제법 매섭다."
계혼은 자신의 검이 얼마나 통할지 모른다. 상대를 가늠하기엔 연륜도 경험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신이 지치더라도 무룡이 다 해결해 줄 거로 믿는 마음에 실력을 어느 정도 감추기보단 처음부터 초식을 강하게 펼치며 최선을 다했다.
추도작랑으로 가까이 온 자들을 힘으로 밀어버린 계혼이 도도부절로 공격을 이어갔다. 거기에 무룡이 만경벽파로 도우니 계혼을 만만하게 보고 덤볐던 자 중 태반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무룡은 계혼을 돕자마자 몸을 돌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을 상대했다. 보검과 보의가 그렇게 탐났는지 강한 자들은 다 무룡에게 몰려왔다. 마환기공 덕분에 별 타격은 없지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어서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무룡은 차분하게 자신을 노리는 여러 무기 사이로 검을 뻗어 깔끔한 찌르기로 숨 하나 끊었다.
계혼이 비칠거렸다. 강한 초식을 연속 쏟아내며 지쳐서인지 발이 미끄러졌는지 금세 넘어질 듯한 모습을 보였다.
도끼인지 망치인지 구분이 힘든 괴이한 무기를 든 자가 얼씨구나 하며 달려들어 커다란 무기로 계혼의 뒤통수를 후렸다.
계혼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며 왼쪽 팔꿈치를 땅에 댔다. 그리고 검을 잡은 오른쪽 팔꿈치를 휘둘러 자신을 기습한 자의 음낭을 가격했다.
무거운 무기를 전력으로 휘두르느라 균형을 잃은 놈은 빤히 보면서도 계혼의 팔꿈치를 피하지 못했다.
음낭을 가격한 계혼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검으로 놈의 움츠린 목을 벴다.
노혼이 옥녀검을 흉내 내 만든 벽파검의 오의 암파유동이다.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초식뿐인 벽파검법에 한계를 느끼고 고민하다가 상대를 속여 움직임을 제한하는 거로 이득을 취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그러나 정형화한 초식을 만드는 건 어려워서 검법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옥녀검을 참조해 몇 가지 큰 원칙을 세웠다.
실전을 통해 경험이 쌓이면서 뺄 건 빼고 추가할 건 추가하여 암파유동이라는 검의를 만들었는데 무룡이 가장 어렵게 느낀 부분이었다.
그런데 계혼은 처음으로 실전에 임하는 주제에 암파유동의 방식으로 상대를 감쪽같이 속였다.
무룡 역시 발달한 감각으로 계혼이 진짜로 균형을 잃은 게 아님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암염을 밀거래하는 놈들은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더니.'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룡은 전혀 지치지 않았지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닥에는 요해를 베이거나 찔려 깔끔하게 죽은 주검이 서른 구 이상 널려 있었다.
무룡은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우열이 분명히 갈린 후에도 놈들은 도주할 생각이 없이 무턱대고 덤벼들었다.
싸움은 예상보다 시시하여 계혼이 찰과상 세 개를 입은 것과 무룡의 옷이 너덜너덜해진 걸 빼면 딱히 피해는 없었다.
"사부, 사람 구하러 갑시다."
지붕도 없이 굵은 나무를 박아 만든 감옥이다. 바닥에는 눅눅한 지푸라기가 가득하고 가까이 접근하기도 전에 구토물과 분변 냄새가 섞인 악취가 코를 덮쳤다.
"우린 당신들을 구하러 왔소."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계혼은 물론 무룡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이 섬을 탈출한다고 칩시다. 그다음엔 어디로 갑니까? 화정현으로 가면 다시 잡혀서 여길 올 거고 운이 나쁘면 맞아 죽습니다."
"더 멀리 가면."
"더 멀리 어딜 갑니까? 작은 마을에 가면 마찬가지로 잡혀서 노예로 살 겁니다. 항주나 소주 같은 큰 도시는 너무 멀어서 가다가 굶어 죽습니다. 어쩌면 굶주린 맹수의 밥이 될지도 모르죠."
무룡과 계혼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도망을 쳤다고 칩시다. 그럼 우린 뭘 하고 살아야 합니까? 거지가 되어 비럭질할까요? 여기선 최소한 굶어 죽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럼 어쩌면 좋겠소?"
무룡의 질문에 시종 나서서 말하던 자가 얼굴을 붉혔다.
"여긴 강남동도에 속합니다. 강남동도 도지사가 오군 군수와 사이가 안 좋습니다. 고발장을 작성하여 그간 조정의 소금을 몰래 빼돌린 걸 적발하면 도지사가 군대를 거느리고 올 겁니다. 오군 군수의 목이 날아갈 거고 화정현의 도당도 모조리 처리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 염전의 정식 일꾼이 되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현령을 도우라고 조정에서 파견한 현위縣慰입니다. 바른 소리를 몇 번 했다고 무엄하게도 조정이 임명한 적법한 관리를 여기로 보내 노역을 시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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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과 계혼은 가장 큰 배를 골라 창고에 있는 소금을 최대한 싣고 떠났다.
"사부, 세상은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우리가 저들의 입장이 되어보지 못해서 그렇다. 물에 빠진 놈을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데, 어쩌면 그 보따리에 전 재산이 들어 찾지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아서인지도 모르겠구나."
무룡과 계혼은 배를 몰아 대주까지 간 다음 대경방大鯨幇이라는 문파를 찾았다.
"배랑 소금을 합쳐서 은자 오십 냥이오. 갈 길이 급하여 손해 보면서 처분하는 거요."
배만 해도 열 냥은 되는 금액이다. 거기에 소금은 내륙에 갖다 팔면 백 냥도 더 받을 수 있는 양이다.
"하하. 그댄 안전하게 은자 오십 냥을 벌지만 우린 걸리면 모가지 몇 개 바쳐야 하는 일이오."
"그건 당신들 사정이오. 이 소금을 받을 곳이 대경방뿐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시오."
무룡의 말에 대경방의 사내는 금세 친절한 태도를 보였다.
"급한 대로 술과 안주를 준비했소. 시장하실 텐데 한잔하면서 얘기합시다."
"제자야. 넌 배를 지키고 있어라."
계혼에게 배를 맡긴 무룡은 부두에 올라 대경방이 차린 술상 앞에 앉았다. 커다란 대접에 술이 콸콸 부어졌다.
"빠른 배로 방주께 사람을 보냈소. 방주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지만 거래 여부와 관계없이 형장과 친분을 쌓고 싶소."
무룡은 말없이 대접의 술을 단숨에 마셔버린 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더 마셔도 되겠소?"
"그러시오."
무룡은 아예 술단지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마셨다. 배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계혼이 침을 꼴깍거렸다.
"자, 은자 육십 냥이오. 아니면 오늘부로 거경방은 없소."
거경방의 당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오래 못 기다리오."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어 대인의 존안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그저 선처를 바랍니다."
"처음이니 봐주지."
조금 기다리니 관처럼 생긴 배 한 척이 물 위를 미끄러져 부두에 도착했다. 꽤 공을 들여 만든 나무 상자엔 열 냥짜리 은원보 다섯 개에 작은 은두 쉰 개가 있었다.
무룡은 은두 한 개를 거경방 당주의 술잔에 던졌다. 독이 든 술을 만난 은두가 까맣게 변색했다.
"향이 강한 술로도 독의 비린내가 덮이지 않았고 혀를 자극하는 맛도 그대로요. 이런 어설픈 수작을 계속 쓰다간 언제든 큰 화를 당할 거요. 알아서 자중하시오."
말을 마친 무룡이 은자를 챙기고 일어섰다. 거경방 당주는 무룡과 계혼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부. 정말 멋졌습니다."
진정한 강호를 경험했다는 흥분으로 계혼이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강호는 흉험하니 늘 경계를 늦추지 말아라."
사실 무룡도 술에 독을 탄 걸 마시고 나서야 알았다.
새삼스럽지만, 무룡 역시 강호 초출이다.
- 작가의말
물에 빠진 놈보다 보따리를 먼저 건져야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최소한 보따리는 물에 빠진 놈을 내놓으라고 억지를 부리진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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