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인저주
난청응의 뒤를 따라가며 무룡은 근심에 잠겼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행되는 일이 너무 많다.'
그리고 난청응이 일을 벌이는 재주도 참 대단했다. 다른 가문의 피가 필요하다고 하니 바로 전쟁을 일으키고, 주문을 구해 독을 촉발해야 한다고 하니 며칠 안 걸려서 백여 년 동안 복구하지 못한 주문을 얻어냈다.
'교주 가문이 아니라 난씨 가문이 배후와 연결된 건가?'
아는 게 힘이다. 아무리 강한 무인이어도 혼자서 세상 사람을 다 죽이진 못한다. 그러나 무룡처럼 독에 조예가 깊은 자가 악심을 품으면 수백만 명을 죽이는 전염성이 강한 독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은 힘보다는 지식으로 돌아간다.
남화교에 관해 아는 게 너무 적은 무룡은 처음 잠입할 때 계획했던 것과 달리 상황에 끌려다니기만 했다.
'다행히 재주가 있어서 아예 배제되진 않았다.'
무룡보다 의술이 뛰어난 의원이 있었다면 아예 계획에서 배제되어 더욱더 오리무중에 빠졌을 거다. 그나마 일의 진행에 계속 참여한다는 부분이 작은 위안이었다.
"가주, 소자 청응이옵니다."
"들거라."
소리만 듣고 알 수 있었다. 음성의 주인이 몇 달 안 남은 거의 다 탄 목숨이라는 것을.
문이 절로 열렸다. 안에 발을 들이니 커다란 방엔 탁자나 걸상 하나 없이 침대 하나만 있고, 침대 앞에 방석이 몇 개 놓였다.
"가주, 일전에 말씀드린 노 신의입니다."
"꼴이 이래서 정식으로 신의를 맞이할 수 없음을 양해하시오."
"아닙니다."
무룡은 난청응과 눈을 맞췄다. 난청응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가주, 진맥할 때 미약하지만 제 내공이 몸에 들어갈 겁니다. 저항하지 마십시오."
"그리하리다."
무룡은 침대 가까이 다가가 주발을 걷었다. 차라리 부패한 주검이 훨씬 정갈하게 느껴질 정도로 엉망인 노인이 거기 있었다.
살이 뒤집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피부가 엉망일 때 쓰는 표현이다. 노인의 피부는 세 번 정도 뒤집힌 모습이었고, 검버섯은 분명히 아닌 검은 점이 얼굴과 몸에 가득했다.
팔다리는 고목의 앙상한 가지처럼 메말랐고 흐릿한 눈에도 생기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귀에선 누런 진물이 흘러나오다 굳어서 마치 혹처럼 느껴졌다.
"이유를 압니까?"
무룡의 질문에 난청응이 대답했다.
"주문이 훼손된 탓입니다. 새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주문을 외워 독을 안정시켜야 하는데, 주문이 훼손되며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대 가주도 노년에 혈인저주血印詛呪로 고생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난씨 가문이 제일 강한 거구나.'
오랜 가문보다는 오독교로부터 피가 깨끗한 사람이 많이 유입된 난씨 가문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간 취합한 정보로 추론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생겼다.
"혹시 전염성이 있습니까?"
"네?"
"제가 처음으로 오독교에 갔을 때 교도들이 저를 남화교 사람으로 오해하고 아주 적대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 피에 흐르는 독이 같은 피에 옮겨가는 전염성이 있습니까?"
난청응이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비밀을 지켜주시겠습니까? 괜히 불안이 고취되면 우리 가문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덕구가 처음에 무룡을 오물 보듯이 하면서 어떻게든 죽이거나 내쫓으려고 했던 게 이해가 됐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혈독을 오독교까지 옮겨갔던 적이 있은 모양이다.
'자신도 피에 독이 흐른다는 걸 모르는 자가 많은 모양이다. 이젠 더 숨기기 힘든 상태고.'
난씨 가문은 어떻게든 독이 발작할 기미가 보이는 자는 죽이든지 가두든지 해서 비밀을 지켜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힘들 정도로 사태가 안 좋다. 세대교체가 진행되지 않아 가문의 중책을 맡은 자들이 독이 발작할 나이가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을 몰래 죽이거나 가두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주문을 읊을 수 있습니까?"
"그럼요. 혈인저주는 무공 성취에만 도움이 되는 게 아닙니다."
'추씨 가문의 여자한테만 대물림되는 피도 이와 비슷할까?'
괴물이 사라졌기에 이젠 저주가 아닌 축복뿐이다. 그래서 무룡도 별로 개의치 않았는데, 남화교의 혈인저주를 접하면서 생각이 추영과 추향의 피에 미쳤다.
"시작하십시오."
"좀 더 살피지 않으시고요?"
"몸에 독이 전혀 없이 깨끗한 상태입니다. 현재 가주는 독이 아닌 저주 때문에 이 모습이 됐습니다. 저주를 풀면 몸이 천천히 회복할 테니 독만 해결하면 됩니다."
무룡의 말에 난청응은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의원이 치료에 실패한 거구나. 이건 애초에 병이 아니었어.'
신생아가 태어날 때마다 각인 주문을 외워 저주를 안정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들어 생명력이 약해질 때 독 대신 저주가 몸을 해친다.
미씨 가문의 권력이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단순히 독을 촉발하는 주문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미씨 가문의 권위가 무너진 것도 촉발 주문이 훼손된 것보단 각인 주문이 사라진 것이 더 컸다.
'각인 주문은 누구 손에 있는 거지?'
무룡이 고민하는 사이, 난청응도 커다란 갈등에 빠졌다. 성공하면 계획했던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릴 테지만, 괜히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지고 소가주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소가주, 시간이 촉박합니다. 치료가 늦으면 저주와 독이 해결되어도 가주의 건강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약재만 충분하다면 무룡은 가주의 건강을 돌려놓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어디서든 자신의 밑천을 다 보여주는 건 멍청한 짓이다.
"시작합니다."
난청응이 소매에서 양피지를 꺼내 주문을 읊었다.
'중원은 죽간이나 짐승의 다리뼈 혹은 거북 등껍질에 글을 적었다. 양피지는 서역에서 건너온 건데.'
그러나 남화교는 중원과 서역 사이에 길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서역과 중원의 교류가 예상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는지도.'
무룡이 생각하는 사이 난청응의 주문이 끝났다.
"물러나."
저주에 꾹꾹 눌렸던 혈독이 터진 화산이 용암을 쏟아내듯 범람했다. 무룡은 급히 몸으로 난청응 앞을 막은 다음 미리 준비한 침을 가주의 몸에 꽂았다.
침에 묶은 가는 줄을 통해 혈독이 무룡의 몸에 흘러들었다. 자연스럽게 자환신공이 움직여 독을 분산했고, 독룡유가 혈독의 멱살을 잡고 독룡담으로 끌고 갔다.
독룡담에 간 혈독은 여의주가 품었던 독 앞에서 순한 양이 되었고, 당연하게도 훌륭한 먹이가 되어 무룡의 독을 살찌웠다.
채 반 각도 안 되어 해독이 끝났으나 무룡은 침을 뽑지 않았다. 해독이 너무 빠르면 의심을 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생각할 것도 많았다.
'생물독이 아니다.'
무룡이 예상했던 것처럼 피에 서식하는 생물독이 아니었다. 그냥 고물독인데 저주 덕분에 같은 피에 옮겨가는 전염성이 있을 뿐이다.
독 자체가 피에 섞여서 발작하자마자 심장이나 뇌를 비롯한 주요 기관을 마비시키고, 근육에도 바로 작용하여 손쓸 새도 없이 죽는 것이지, 독 자체는 대단하지 않았다.
대단한 건 이들이 저주라고 부르는 미지의 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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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두 달에 걸쳐 난씨 가문의 혈독을 해결했다. 사실 열흘도 필요 없는 일인데, 일부러 힘든 척하면서 시간을 끌며 정보를 모았다.
무룡을 가문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 사람들이 입을 쉽게 연 덕분에 환자들과 대화할 때보다 훨씬 많은 걸 알게 되었다.
'날 쉽게 풀어주진 않을 거야.'
칼은 나만 들었을 때 비로소 가치가 빛난다. 상대도 칼을 들면 내 칼의 가치가 반 깎이고, 상대가 방패까지 들면 내 칼은 부지깽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모든 걸 손에 넣으면 자신도 베일지 모르는 칼이 눈엣가시가 되겠지.'
차라리 지금이 낫다. 난씨 가문이 각인 주문을 비롯해 혈인저주와 관련한 주문을 전부 찾으면 무룡을 죽여 없애려 할 것이다.
지금이야 저주와 독에서 구해주는 은인이지만, 자신들이 칼을 잡은 사람이 됐을 때 무룡은 방해물에 불과하다.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건 분하지만, 괜히 남았다간 더 큰 사건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의, 저 또 왔습니다."
그때 다리에 가체를 단 무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왔다. 이젠 가체에 적응했는지 다리를 전혀 절지 않고 똑바로 걸었다.
"산에 갔는데 매화꽃이 핀 걸 보고 신기해서 따왔습니다."
무룡은 무사가 내민 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이건 복사꽃이요."
"우린 이걸 매화라고 부릅니다."
무룡은 무사와 눈을 마주친 다음 고개를 작게 끄덕여줬다.
"우린 복사꽃이라고 부릅니다."
"저같이 무식한 놈이 뭘 알겠습니까. 신의가 복사꽃이라면 복사꽃이겠지요. 매화는 특히 밤에 아름다우니 일찍 주무시지 말고 달밤에 한 번 감상해 보십시오."
무룡은 비수로 가지를 적당히 다듬은 다음 물을 반쯤 담근 병에 꽃을 꽂았다. 잘 다듬은 덕분에 살짝 시들었던 꽃이 다시금 생기를 머금었다.
"꽃 고맙소."
"복사꽃이 사람 구실을 하게 해주신 신의의 은혜에 비하겠습니까."
무사가 떠나자 무룡은 함께 일하는 의원들에게 저녁에 술 한잔하자고 말했다. 무룡의 인품과 학식 그리고 의술에 크게 반한 의원들이 친분을 쌓을 기회가 생겼다고 하나같이 좋아했다.
'도桃 그리고 매梅.'
매黴는 매우梅雨(매화 열매가 여물 때 내리는 비)를 뜻하고, 창병瘡病(부스럼을 비롯한 모든 피부 질병)을 뜻하기도 한다.
현재 무룡은 난씨 가문의 유전 불치병인 살이 썩는 창병을 치료했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그 증거로 오랜 기간 모습을 감췄던 가주가 멀쩡한 모습을 보였고, 은퇴했다고 소문 났던 장로들도 하나둘 얼굴을 비췄다.
무사가 복사꽃을 따다가 무룡에게 매화라고 한 건 창병을 치료한 무룡에게 얼른 도逃주하라는 경고다.
당신이 창병을 치료한 일 때문에 위험하니 얼른 도망치시오. 무사가 전달하려는 의미는 이거였다.
그리고 시기와 방법도 알려줬다. 달이 뜬 밤에 북쪽으로. 매화는 겨울을 뜻하며 방위로는 북쪽에 해당한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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