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진기용
무룡은 호세도로 뿜는 기세에 자하괴독을 몰래 섞었다.
노혼이 자하동에서 삼 년 가까이 수련하면서도 정체를 눈치 못 챘을 정도로 은밀한 자하괴독이어서 두 사내에게 들키지 않았다.
"내가 오위 할게. 둘이 싸워서 이기는 자가 삼위 해."
무룡의 말에 곰 사내와 다람쥐 사내가 서로 쳐다봤다. 흑의인들 중 일부는 자하괴독을 흡입하자마자 목숨을 잃었고, 대부분은 환영을 보다가 결국 중독으로 숨이 멈췄다.
곰 사내와 다람쥐 사내도 예외는 아니어서 환영을 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을 무룡이 끼어 들이 유도한 바람에 둘은 서열 다툼을 하는 상황을 보았다.
무작정 살포한 게 아니라 세밀하게 제어하여 양을 조절한 덕분에 무룡에게 온 반동도 적었다. 그러나 기간은 짧아져도 몸을 못 움직이는 건 같았다.
둘 중 하나라도 환영을 보지 않았다면 사지가 경직한 사이에 목숨을 잃거나 생포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룡은 전혀 모험이라고 생각지 않고 확신에 찼다.
독의 최고 경지는 심독心毒이다. 몸이 아닌 마음에 영향을 주는 독을 최고로 치는데, 자하괴독이 바로 심독이다.
본인이 가장 원하는 환영을 보여줌으로써 의지를 꺾거나 오히려 강하게 하는 성질이 있는데, 독이라는 게 꼭 누구를 해쳐야 하는 숙명을 타고난 건 아니어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자하동에서 노혼은 자하괴독의 영향으로 오히려 자하신공을 구 단계까지 익히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한 성질을 어렴풋이 파악한 무룡은 서열 욕심이 강한 둘이 자하괴독의 환영에 반드시 걸려들 거로 확신했다.
"그래. 여기에서 확실한 삼위가 되는 자가 서열 이위한테 도전하는 거다."
다람쥐 사내가 장대를 부숴 안에 든 창을 꺼냈다. 곰 사내는 허리에 찬 비수 일곱 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엄중한 태세를 갖췄다.
이미 서로 손등에 난 털 개수를 알 정도로 익숙하다. 둘은 속임수를 완전히 배제하고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
창이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여 곰 사내의 목을 노렸다. 대부분 외공은 찌르면 목숨이 위험한 파문이 존재하고, 대부분 무인은 찔리면 무력화되는 약점이 존재한다.
그 약점을 가리려고 대부분 무인이 외공을 익히는데, 기존 무공으로 생긴 약점을 외공으로 극복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검극과 마교 교주 사마영을 빼면 자기가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는 두 사내도 그러한 약점을 하나씩 안고 있었다.
사내의 손가락 사이에 끼었던 비수 세 자루가 아무런 조짐도 없이 사라졌다. 다행히 사지는 여전히 안 움직이지만 무룡의 눈은 아주 멀쩡하여 비수의 행방을 바로 찾았다.
'대단하다.'
세 자루 비수가 순서대로 창과 충돌하여 살짝 궤적을 바꿨다. 다람쥐 사내의 창은 이대로라면 곰 사내의 어깨를 스치는 정도로 끝난다.
그러면 곰 사내는 바로 근접할 것이고, 비록 왼손의 주판이 있다곤 하나 다람쥐 사내는 열세에 처할 수밖에 없다.
무룡이 혼자 머리가 미어터지게 해결책을 고민할 일이 없도록 다람쥐 사내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저걸 회수해?'
무룡은 갑자기 무공을 익히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 빛살처럼 찔러가던 창이 비수와 충돌하며 궤적이 어긋나자 다람쥐 사내는 바로 무기를 회수했다.
마치 원래부터 허공을 찍고 창을 거두려 했던 사람처럼.
곰 사내는 예상했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보법을 펼쳤다. 무룡처럼 잔상조차 없이 사라지진 못했으나 훨씬 은밀하게 움직여 다람쥐 사내의 뒤를 잡았다.
무룡은 어느새 손가락 사이로 돌아온 세 비수를 보며 어떻게 회수했을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나 미처 다 궁금해하지도 못했는데 다람쥐 사내가 주판을 흔들었다.
열세 개의 현철을 두드려 만든 주판알이 허공에 자리를 잡았다. 확신은 없지만, 무룡은 약소하게 펼친 진법이라고 판단했다.
곰 사내 역시 예상했는지 당황하지 않고 다시 보법을 펼쳤다. 이번엔 아까 무룡이 찌른 왼쪽 겨드랑이 쪽에 나타났다.
곰 사내의 모습이 나타나기 무섭게 다람쥐 사내의 창이 목을 찔렀다. 곰 사내는 원래부터 그러려고 했다는 듯이 아무 미련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다람쥐 사내의 정면에 나타났다.
길수록 강하고 짧을수록 위험하다.
곰 사내는 다람쥐 사내가 창에 힘을 싣기 어렵게 접근하려 하고 다람쥐 사내는 곰 사내가 근접하지 못하게 거리를 벌렸다.
덕분에 둘은 어중간하게 검이나 칼을 들고 싸우면 좋을 거리를 유지했다.
'주판을 휘두르면 딱인데.'
그러나 곰 사내도 주판이 가장 위력적인 거리라는 걸 알고 있고, 어쩌면 주판을 휘두르기를 기다려 반격할 계획을 짜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때 무룡의 팔다리가 통제에 돌아왔다.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하지만, 무룡은 더는 지체해서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을 돌려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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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다.'
무룡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졌다. 최소 골짜기 하나는 무너져야 날 법한 굉음 때문에 흑의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소리의 근원지로 달렸다.
무룡은 은형산으로 모습을 가린 채 흑의인들이 지나가길 기다린 다음 전력으로 신법을 펼쳐 마교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둘의 싸움으로 포위망이 흐트러진 덕분에 무룡은 그 뒤로 흑의인의 그림자도 안 보고 목표했던 곳에 도착했다.
"사형, 무사하셨군요."
화산파의 젊은 장문인 손청우가 무룡을 기다렸다.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소."
무룡의 옷은 넝마라고 부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엉망이고 신발은 사라진 지 오랬다. 거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머리에 먼지가 가득 꼈다.
"화산의 원수입니까?"
화진악을 죽이고 노혼을 죽이라고 사주한 자들이냐는 질문이었다.
"아니오. 그쪽은 지키려는 놈들이고 이쪽은 그 반대로 보이오."
무룡은 화진악을 죽이고 자하신공을 익힌 자를 전부 죽이라고 한 배후로 절검문을 의심하고 있다. 절검문은 여동빈이 세운 문파로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가려는 비밀 세력과 싸우고 있다.
화진악을 죽이고 노혼을 죽이는 게 절검문의 이익에 부합하기에 용의 선상에서도 첫 순위다.
절검문 소속으론 온갖 문파와 가문의 무인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녀도 있고 거지도 있고 사방을 떠도는 장사치도 있다.
절검문의 문도는 모두 하나의 검법을 일정 경지까지 익힌 후 절검문 제자가 되며 검 대신 다른 무기를 잡았다.
자기 외에 문파에 어떤 제자가 있는지 잘 모르며, 평소엔 그냥 살던 대로 산다. 그러다 절검문의 이름으로 명령이 내려지면 따를지 말지 고민한다. 내키면 지시에 따르고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만다.
이들은 자신이 절검문 소속이라는 걸 떠벌리지 않는 것과 같은 절검문 제자가 살해당했을 때 반드시 복수해줘야 한다는 걸 빼면 매우 자유롭다.
심지어 마교에도 절검문 소속이 있다고 하니 의심을 거두려야 거둘 수 없다.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남은 건 사형한테 달렸습니다."
"그럼 된 거나 마찬가지오."
무룡의 확신에 찬 대답에 손청우가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마교를 상대하던 노혼의 굽힘 없음이 떠올라 기쁘면서도 사형이 대의를 위한답시고 사부와 같은 길을 걸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
"날짜와 장소는?"
손청우가 지도를 꺼내 빨간 인주로 찍은 곳을 짚었다.
"사흘 후 마교와 정의맹이 대규모 전쟁을 벌이기로 했습니다. 정의맹은 서문세가가 화무룡 사형과 연락해서 계책을 꾸몄고 저는 사형 지시대로 소교주와 접촉했습니다."
"소교주가 약속을 지켰구나."
무룡은 소교주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절검문과 마찬가지로 지키려는 자이기에 화산의 원수일 가능성이 있다.
후문영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존재는 마교에서 채 다섯이 안 된다. 성녀인 추영은 그때 이미 마교에 없었고, 교주는 후문영을 화산으로 보내 자하동의 비밀을 풀라고 지시한 사람이다.
남은 건 교주를 육십 년 따른 대장로와 소교주 그리고 후문영의 가문뿐이다. 후문영이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었기에 가문의 지시라고 여기기 어렵다. 그래서 의심 상대는 소교주와 대장로로 좁혀졌다.
"마교의 무기는?"
이룡을 상대하려고 고안한 무기. 무룡은 마교가 삼십 년 가까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기가 이룡을 죽이지 못함을 안다. 그러나 이룡을 죽이는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기에 어떻게든 전장에 나타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소교주의 심복과 독무곡 사람들이 힘을 합쳐 전장까지 운반할 거라고 합니다."
도룡노屠龍弩는 부품별로 운반하여 전장에서 조립해야 할 정도로 크다. 문제는 부품 하나라도 제때 도착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사제도 화산 제자들을 이끌고 그들을 도우시게."
손청우가 잠깐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무룡과 손청우는 용건이 끝나자 바로 작별했다. 손청우는 독무곡으로 향했고 무룡은 다음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리 오래지도 않아."
천방기사는 아주 신난 표정이었다. 젊은 시절 큰 사고를 여럿 쳐서 중원을 멀리 떠나 곤륜산에서도 가장 서쪽 자락에 숨어서 사는 처지다.
그런데 이번에 무룡의 일로 중원은 아니나 꽤 가까운 곳까지 나들이하니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냥 보내셔도 되는데 직접 오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천방기사가 키우는 부리만 붉은 까마귀는 편지를 전달하기도 하고 물건을 운송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말 중요한 일은 직접 말을 전하기도 한다.
그간 천검산장이나 벽력문에 있으면서도 천방기사와 늘 연락이 닿았던 이유다.
"이건 너무 귀해서 그 시꺼먼 놈이 삼켜버릴지도 몰라."
용의 가죽으로 만들고 비늘을 구부려 감싼 신발, 용의 힘줄로 엮은 갑옷, 용의 뼈를 갈아서 만든 투구.
일섬은 물론이고 질풍약영도 몸에 큰 부담을 준다. 마환기공으로 튼튼하여 몸은 다행히도 잘 버티고 있는데 옷과 신발이 문제였다.
일섬 몇 번 펼치면 신발이 갈라 터지는 일이 종종 있고 가끔 옷도 찢겨 속살을 강제로 노출해야 했다.
그간 천방기사가 튼튼한 옷과 신발을 만들어 까마귀로 보내줬는데 이번 결전에 대비하여 제대로 만든 갑옷과 신발을 직접 갖고 왔다.
"용의 것으로 만들어서 독에 강해. 독룡의 독에도 잘 버틸 거야."
천방기사에게 고마움을 듬뿍 표현한 무룡은 마지막 약속 지점에 갔다.
"배산제자 무룡이 사부님을 뵙습니다."
마지막에 만날 사람은 벽력문 문주 화뇌였다. 숨 쉬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게으름뱅이인데 용케도 직접 몸을 움직여 무룡을 만나러 왔다.
"거 좀 섭섭하구나. 우리가 첫 번째라니."
"송구합니다. 그러나 상성이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습니다."
"귀찮으니까 어서 지도를 펼쳐라."
무룡이 손청우한테서 받은 지도를 펼치자 화뇌가 손가락으로 번개를 불러서 한 곳을 태웠다.
"벽력진은 여기에 펼칠 예정이다."
"사부와 사형들을 믿습니다."
"믿지 마. 귀찮으니까."
화뇌하고 작별한 무룡은 이룡이 잠든 독으로 가득 덮인 산으로 갔다. 산자락에 이르자마자 허리에 찬 싸구려 검이 녹아 사라졌다.
'먼저 깨운다.'
구백 일이 되기 전에 강제로 깨운 다음 미리 준비한 것들로 연이어 타격을 줄 계획이다. 놈이 깨는 날에 맞춰 마교와 정의연을 전장에 부르는 게 어려운 것도 있고, 일찍 깨우면 승산이 조금이라도 오르지 않을까 하는 요행심리 때문이었다.
- 작가의말
물진기용 物盡其用
물건의 쓸모를 다 끄집어내다. 무룡의 얼마 안 되는 인맥을 싹 끌어모았습니다. 소소하게 마교와 정의연 그리고 오대비문의 둘인 절검문과 벽력문을 움직일 정도밖에 안 되는군요. 화산파와 천방기사는 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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