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구번선
"대협,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관선에서 몇 년 일한 경험으로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법을 아는 자가 나섰다.
"무슨 일이냐?"
"저 앞은 물길이 사나워 좌초할 위험이 있으나 사흘이면 육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안전하게 저길 피해 가려면 보름 정도 걸립니다."
"배가 좌초할 위험이 얼마나 되느냐?"
"빨라서 많은 배가 다니는 물길입니다. 저희 중에도 여기를 자주 다녔던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배가 좌초하면 물질을 잘하는 저희야 괜찮지만, 협객께선."
선원이 말끝을 흐렸다.
"하하. 이놈이 날 뭐로 보고. 숨을 일각 정도 안 쉬고도 멀쩡한 나다. 아무리 바다가 험하다고 해도 내가 털끝 하나 상할 것 같으냐?"
"그러면?"
"잔말 말고 빠른 길로 가거라."
자하동의 비밀을 풀고 성화공을 익힐 생각에 가슴이 부푼 천산자다. 마교가 알아채고 조치하기 전에 얼른 자하동으로 가야 하기에 마음이 급했다.
가장 걱정인 추영이 내공을 잃었고 열흘 내내 조용하다. 무룡이 자하신공 일 단계를 이뤘다지만 섬에서 대결할 때 짐작한 수준으론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남은 건 저잣거리에 나도는 권각술을 어설프게 익힌 범부들밖에 없으니 별 의심 안 하고 빠른 물길을 선택했다.
그래서 배가 세게 흔들릴 때도 추영과 무룡을 감시하는 데만 정신을 팔았고, 배가 꽤 가라앉고 나서야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챘다.
"어찌 된 일이냐!"
"배가 물살에 쓸려 암초에 부딪쳤습니다. 지금 막고는 있는데 구멍이 너무 큽니다. 대협께선 어서 저쪽 배로 가십시오."
두 배의 거리가 꽤 멀었다. 게다가 저쪽 배는 거의 멈췄는데 천산자가 탄 배는 바다에 잠기면서도 꽤 빠른 속도로 흘렀다.
"이 배는 버려야 하는 거냐?"
"송구합니다."
"아니다.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천산자는 작은 배를 내리라고 명하고 무룡과 추영을 꺼냈다. 배를 내리자 추영과 무룡을 태운 다음 노를 힘껏 저어 멀쩡한 배로 향했다.
배에 남은 선원들은 뱃전과 선수와 선미에 묶은 배들을 전부 갑판으로 끌어올린 후 재물을 담았다.
은자나 황금 같은 재화는 얼마 없고, 비단과 천과 소금을 비롯해 마교에 부족한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마교가 지배하는 지역에선 금은과 맞먹는 귀한 것들이고, 상대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동부에서도 꽤 비싼 물건이다.
"멍청한 것들. 배가 가라앉는 데도 재물이나 챙기다니."
역류이던 물길이 갑자기 바뀌어 목표로 한 배로 흘렀다. 노를 들어 올리고 고개를 돌려 상황을 확인한 천산자가 욕심에 눈이 먼 선원들을 비웃었다.
"천노, 내가 보기에 멍청한 건 천노야."
추영의 말에 천산자는 등골이 오싹했다. 그간 추영이 조용했던 걸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내심 찝찝했었다.
성화공을 익힐 부푼 꿈에 자리를 내줬던 경각심이 다시 살아나며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제길!"
천산자는 황급히 노를 저었다. 빠른 물살이 배를 큰 배 쪽으로 나르고 있긴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마음이 급했다.
큰 배 근처에 가자 천산자는 추영과 무룡의 덜미를 잡고 경공을 펼쳐 배의 갑판에 올랐다.
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배를 암초 사이에 끼게 하여 멈춘 다음 재물을 실은 작은 배를 타고 미리 도주한 거였다.
그리고 가라앉는 배에 탄 자들도 재물을 다 챙긴 후 바닷물이 갑판을 잠그기를 기다려 작은 배를 몰아 유유히 사라졌다.
"내가, 내가 저런 놈들한테."
화가 잔뜩 치민 천산자가 주먹으로 뱃전을 부순 후 묵직한 덩이 두 개에 내공을 실어 던졌다. 배 두 척이 동강이 나며 희희낙낙 노를 젓던 선원들이 물결에 쓸려갔다.
그러나 남은 배들은 바위로 된 섬 뒤로 모습을 감춰 천산자에게 더 공격할 기회를 남기지 않았다.
"천노. 우리가 타고 온 배라도 건져야지."
천산자가 달려갔을 땐 타고 온 배도 물살에 쓸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천노의 실수로 우리 목숨까지 여기서 헛되이 끝나는구나."
추영이 한탄했다. 무룡 역시 얼굴을 찡그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천노. 사실 자하동에는 극독이 있어. 그래서 천노를 자하동에 데려가서 죽일 생각이었거든. 어차피 죽을 거 일찍 죽는 거라고 좋게 생각해."
천산자는 선창을 뒤져 술을 담은 커다란 항아리를 찾아낸 다음 뚜껑을 뜯고 꿀꺽꿀꺽 단숨에 삼켰다.
"무슨 독인데?"
"처음엔 아무 해도 끼치지 않소. 그러다 자하신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공격을 시작하오. 그리고 난 화무룡이 아닌 그저 무룡이오. 화진악이 나와 사부를 자하동에 가뒀는데 내 사부가 삼 년 만에 자하신공을 대성하여 독을 물리친 덕분에 살아서 나왔소. 난 자하신공 성취가 낮아서 아예 독의 해를 받지 않았소."
절망 속에서 욕심이 또 머리를 슬그머니 쳐들었다.
'삼 년이라고? 고작 삼 년?'
"사부는 몇 년이면 삼화취정에 이를 수 있다고 했소. 그러면 날 데리고 강호를 주유하며 세상을 구경시켜준다고 했소. 그런데 마교가 화산의 어린 제자를 죽이는 걸 지나치지 못하고 나섰다가 암수에 당했소."
'벽파검이 흑응조를 죽였지!'
혁 장로를 십 합도 안 되어 목을 베 죽이고 채 장로도 일방적으로 몰아치다가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홍 장로 상대로는 눈을 감고 검까지 버린 채 어기성검을 펼쳤다고 한다.
천산자라면 어떤 수를 써도 이룰 수 없는 전과다. 혁 장로와 홍 장로를 이기는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채 장로는 독과 암기를 모두 동원해도 승리할 확률이 채 삼 할에 미치지 못한다.
'내가 성화공만 생각했는데 자하신공도 있었어.'
천산자가 알려고 하는 자하동의 비밀은 자하신공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천산자는 자하신공을 성취가 느린 정파의 무공으로 여겨 염두에 두지도 않았는데 노혼이 고작 삼 년 만에 대성했다고 하니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천산파와 천산파 조상들의 이름으로 너희가 날 자하동에 데려가기만 하면 해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준다고 맹세하겠다. 대신 너희도 날 진심으로 돕고 자하신공을 익히는 데 필요한 정보를 모두 준다고 맹세해라."
"좋소. 만약 당신이 우리 부부를 자유롭게 풀어주고 여길 탈출해 육지에 갈 때까지 절대 버리지 않는다고 맹세하면 나도 화산과 사부의 명예를 걸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맹세하겠소."
천산자와 무룡 그리고 추영은 조건을 달고 맹세했다. 맹세를 마치자 천산자는 바로 무룡과 추영의 묶인 손을 풀어줬다.
둘의 무공이 천산자에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도 있고, 어떻게든 셋이 힘을 합쳐 이 제멋대로인 바다를 벗어나야 한다.
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천산자와 마찬가지로, 추영과 무룡 역시 천산자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무룡은 내공을 잃은 추영을 데리고 이 바다를 벗어날 능력이 절대 안 된다.
"자, 여길 어떻게 벗어날까?"
"밧줄이 필요해."
한참 고민한 추영이 입을 열었다.
"밧줄로 몸을 묶은 다음 물길이 어떻게 흐르는지 탐색해야 해. 물길을 알아내면 이 배를 뜯어 작은 배를 만든 다음 일정 크기의 섬까지 가고, 거기에서 또 물길을 탐색하고 다음 섬으로 가고. 그렇게 반복해서 이 흉험한 해역을 벗어난 다음 노를 저어 육지로 가는 거지."
천산자는 몸을 훌쩍 날려 선창에 들어갔다. 추영과 무룡은 입을 꾹 다문 채 조용히 기다렸다.
"음식도 문젠데 물은 아예 없구나."
천산자가 홧김에 마셔버린 게 마지막 술이었다. 고수인 천산자와 몸이 튼튼하고 내공도 꽤 있는 무룡은 괜찮지만, 내공 대부분을 잃은 추영에겐 마실 물이 필수다.
"빗물을 받을 통도 준비하고, 만일을 대비해 소피를 함부로 버리지 말고 모아두자."
허리에 밧줄을 감은 무룡이 바다에 뛰어들어 물길이 어떻게 흐르는지 파악하고 추영이 일일이 기록했다.
천산자는 배의 갑판을 뜯고 필요한 재료를 찾아 작은 배를 만들었다. 만든 배의 선창은 그냥 비워둔 게 아니라 잘 밀봉한 나무통을 허용하는 만큼 넣었다. 혹시 뱃전에 구멍이 나서 침수가 되더라도 밀봉한 나무통이 부력을 발생해 완전히 가라앉지 않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만든 배를 밧줄로 묶어 바다에 내려서 물이 안 새는 걸 확인하고 출발하기로 했다.
"천노. 내 낭군을 버리면 당연히 자하동에 못 들어가고, 날 버려도 낭군이 자하동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야. 최악의 상황엔 자하동에 들어간 다음 자결해서 널 거기에 가둘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맹세한 거 꼭 지켜."
맹세를 했다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도 여전히 지킬지는 의문이다. 만약 배에 침수하여 한 명만 태울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천산자는 당연히 추영과 무룡을 바다에 버릴 것이다.
그걸 알기에 추영은 배를 묶은 밧줄을 풀기 전에 다시 한번 다짐을 받으려 했다.
"문파와 조상을 걸고 한 맹세다. 어떤 상황이 와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천산자의 말이 개소리라는 건 바로 증명되었다. 큰 배에서 채 이십 장도 멀어지기 전에 셋을 태운 배가 단단한 암초와 부딪혔다.
다행히 선창에 넣어서 한데 묶은 나무통들이 작용을 발휘해 배가 완전히 침몰하진 않았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세 사람을 모두 태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천노, 천벌이 두렵지 않아?"
"두렵지. 그래서 좋은 말로 타이르는 거 아니냐. 내가 손 쓰기 전에 너희 발로 뛰어내리거라."
"네 끝이 절대 편하지 않을 거야."
악담을 퍼부은 추영이 무룡과 서로 그러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거센 물살이 바로 둘을 깊은 곳으로 끌어갔다.
"내가 음구陰溝에서 번선飜船하는 구나."
거친 바다를 잘 누비던 배가 잔잔한 물에서 뒤집혔다는 뜻으로 확실한 일을 어처구니없이 망치는 경우를 빗대어서 하는 말이다. 여든이 되기까지 작은 실패조차 겪은 적 없는 천산자인데 추영과 엮이고부터 풀리는 일이 없었다.
맹세 때문에 찝찝한 마음도 있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무룡을 죽이진 않았지만, 자하동으로 들어갈 방법이 사라졌다는 데서 오는 상실감이 너무 컸다.
"일단 살고 보자."
어렵게 마음을 다잡은 천산자는 배를 해류에 맡기고 선창의 물을 퍼내는 데 열중했다.
- 작가의말
천재지변이 없는 한 연재는 중단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요즘 서버 상황이 참 별로네요. 지금은 방법을 찾아 매일 글을 올리곤 있지만, 서버 상황이 계속 이러면 글을 못 올릴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약 한 달가량 중이염을 앓으며 비축분을 몇 편 못 썼습니다. 접속이 불안정한 상황이 지속하면 비축분도 문제고 사이트 접속도 문젭니다.
제발 서버 문제가 빨리 해결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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