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신성인
어린 제자가 시꺼먼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이지?"
"함정을 설치하는 데 정교한 손놀림이 필요해 장갑을 벗더니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무룡은 기영에게 다가가 손에 물린 자국을 확인했다. 그러나 글로만 배워 경험이 없는 탓에 자국만 보고 무슨 독물인지 알아낼 능력이 없었다.
"모양이 일 년 전에 죽은 사형과 비슷합니다. 칠홍지주가 아닐까요?"
그때 대제자를 죽인 건 무룡이다. 다른 독으로 대제자를 죽인 다음 침대에 금은표귀초와 칠홍지주를 넣었다.
원래는 한참 찾는 척하다가 까발릴 생각이었는데 가류가 채찍질하자 기지를 발휘해 침대 근처로 도망갔다.
생각대로 침대가 채찍질에 부서지는 바람에 일이 쉽게 끝났다.
'난 독을 먹여서 죽였는데. 죽은 놈을 거미가 또 물었던 것인가?'
무룡이 본 책에는 없는 내용으로, 칠홍지주는 큰 짐승을 물어서 죽인 다음 독액을 다시 빨아 먹는다. 독이 짐승의 몸에서 더 많아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짧은 고민을 마친 무룡은 모험하기로 했다. 추영이 자해했다는 정보를 들은 후부터 조급한 마음이 은연중에 생겨 조심성이 옅어졌다.
"금은표귀초를 줘."
홍안섬여를 유인할 미끼 중 하나인 금은표귀초를 입에 문 무룡이 기영의 물린 부위를 칼로 살짝 짼 다음 입을 갖다 댔다.
기영의 피를 따라 흐르던 독이 금은표귀초에 끌려 무룡의 입으로 갔다.
'이건 뭐야!'
갑자기 입안에서 물컹한 게 느껴졌다.
'투명 거미. 칠홍지주가 아니었어.'
기영을 문 것은 칠홍지주의 다음 형태인 투명 거미였다. 벌레도 먹고 독초도 갉아 먹는 칠홍지주와 달리 투명 거미는 피가 뜨거운 짐승을 물어 죽이고 독이 함유된 피만 마신다.
그런데 어렵게 구한 사냥감의 독혈이 무룡의 입안으로 향하자 식욕을 못 이기고 따라서 들어간 것이다.
무룡은 소매를 뒤적거려 나무 상자를 하나 꺼내 안에 든 물건을 바닥에 버린 후 조심스럽게 입가로 가져갔다.
퉤 소리와 함께 뚜껑을 빠르게 닫은 무룡은 가죽끈으로 상자를 꼭꼭 동여매고 다시 기영의 손에 입을 가져갔다.
"사형, 뭡니까?"
기영과 함께 무리를 이뤘던 제자들이 물었다. 무룡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글자를 여럿 적었다.
"투명 거미?"
무식한 놈이 대부분이라 투명 거미만 알아보고 남은 글자들은 해석하지 못했다.
시커멓게 죽은 금은표귀초를 뱉은 무룡이 싱싱한 거로 바꿔 물고 다시 독을 흡입했다. 이미 피에 고르게 분포되긴 했으나 금은표귀초 덕분에 피보다는 독 위주로 빨려와서 용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심장을 포함한 오장육부가 독에 상해 목숨만 구한 셈이다.
"이대로는 숨만 붙은 폐인이다. 실패하면 죽을지도 모르지만, 성공하면 물리기 전과 똑같이 돌아갈 수 있다."
"해보겠습니다."
무룡이 필요한 약초를 얘기하자 남은 제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일부는 이미 갖고 있고 일부는 다른 무리에서 빌렸고 일부는 늪지에서 찾아냈다.
그렇게 모은 약초들을 찧고 빻고 끓이고 해서 섞은 후 기영에게 먹였다. 숨이 점점 고르게 변하는 것이 무룡의 약이 효과가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가류가 채찍을 휘둘렀다.
"놈! 누구 지시를 받고 잠입한 것이냐?"
가류는 무룡이 자신이 만들려는 약을 훔치러 온 간세로 의심했다.
"아닙니다. 전임이 독거미에 죽은 것 때문에 특별히 알아본 겁니다."
서재의 책을 훔쳐봤다고 할 수는 없어 자기 손으로 죽인 대제자를 핑계로 댔다.
"진짜냐?"
무룡이 무엄하게도 고개만 끄덕였다.
비록 혈액에 반응하고 작용하는 혈액독이긴 하지만, 입으로 흡입한 무룡이 무사할 리는 없다. 그래도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가류의 채찍질로 입안이 터지며 구강에 잔류한 독이 혈관에 침투했다.
입술과 혀가 순식간에 부어 말을 할 수 없었다.
무룡의 꼴을 본 가류는 의심을 접었다. 목적을 갖추고 온 간세가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제자를 구하려고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호각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가류는 바로 채찍을 허리에 감고 경공을 펼쳐 떠났다.
남은 제자들도 황급히 몸을 일으켜 달렸다. 그래도 의리가 있는 자가 없진 않아 무룡을 따르던 제자 중 하나가 무룡을 둘러업었고, 무룡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제자가 기영이라는 제자를 업고 달렸다.
"놓치면 큰일입니다."
방금 호각은 홍안섬여를 발견했다는 신호다. 지금 소리를 들은 모든 제자가 호각이 울린 곳으로 달리고 있다.
만약 이번에도 홍안섬여를 놓친다면 늦게 도착하거나 도착하지 못한 제자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룡은 몸속에서 거세게 꿈틀대는 내공 때문에 자신을 업은 제자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냥 때리는 타격과 달리 가류의 채찍질은 내공으로 전환하는 비율이 높았다. 그러나 투명 거미의 독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예전에 독초를 먹었을 땐 이 정도가 아니었다. 혈액독이어서 그런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입이 터지며 혈관에 들어간 독은 꽤 많은 양의 내공으로 전환했다.
안타까운 점은 마환기공의 경지가 부족해 대부분 내공이 허망하게 소실되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많은 양의 내공이 수십 개 혈도에 저장되었다.
"사형, 버텨야 합니다."
업고 달리던 제자가 자꾸 구역질하는 무룡을 걱정했다. 무룡이 마환기공의 경지를 올리고 내공을 더 쌓을 욕심으로 삼킨 독을 게워 터진 입안을 통해 혈관으로 보내려는 속셈을 모른 탓이다.
마환기공 때문에 칼이 소용없지 않았다면 자기 배를 찔렀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추영의 자해 소식을 들은 무룡은 마음이 조급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꾸며서 일을 벌일 정도는 아니지만, 적절한 기회가 생기면 목숨 정도는 걸어볼 용의가 충분히 있었다.
질척질척한 늪지이고 예전보다 못해도 몸무게가 꽤 나가는 무룡이다. 그래서 무룡을 업은 제자가 도착했을 땐 이미 홍안섬여를 놓친 뒤였다.
"대제자로서 사제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죄를 청합니다. 오늘 내리실 벌을 제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마환기공 덕분에 부었던 혀와 입술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화가 상투에 치민 가류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만약 무룡의 부은 입이 너무 빨리 가라앉은 걸 의심했다면 지금 느끼는 분노로 무룡을 그냥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
"좋다. 내 오늘 특별히 선심을 써서 딱 백 대만 때리겠다."
무룡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다음 양손으로 뒤통수를 감쌌다.
가류의 채찍이 쌕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다가 무룡의 몸에 도착해 둔탁한 소리를 만들었다. 바닥에 엎드린 무룡의 몸이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떡였다.
"둘!"
가류의 채찍은 평소보다 훨씬 강했다. 그러나 무룡은 만족하지 못했다.
'더, 더 세게.'
"스물!"
무룡은 뒤통수를 감쌌던 손을 내리고 편하게 옆으로 뻗었다. 그 행동이 가류의 분노에 기름을 뿌렸다.
"스물하나!"
보다 큰 궤적을 그리며 채찍이 느리게 휘둘러졌다. 그리고 무룡의 몸을 때렸을 때 소리가 훨씬 작게 울렸다.
무공을 수련한 자들은 소리가 작은 게 더 많은 힘이 무룡의 몸에 전달된 탓임을 알았다.
"쉰!"
제자들도 가류를 따라 속으로 셈을 셌다. 무룡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심이 없든, 지금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어서 빨리 백 대가 끝나고 무룡의 숨이 붙어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든!"
팔십 대나 되었지만 가류의 채찍은 조금도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작게 꿈틀대는 무룡 덕분에 제자들 모두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흔아홉!"
무룡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백!"
마지막 채찍을 날린 가류가 경공을 펼쳐 사라졌다.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가 무룡의 몸을 뒤집었다.
"숨! 숨이 있어."
눈물을 흘리는 자도 드물지 않았다. 대부분 불행한 유년을 보내 지극히 이기적이거나 가족도 반기지 않을 정도로 개차반으로 산 자들이다.
그러나 자신들을 구하려고 살신성인한 무룡에게 감동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각종 내상약이 무룡의 입으로 들어가고 온갖 외상약이 무룡의 몸에 발라졌다.
"사형이 깨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홍안섬여를 잡자. 이대로는 평생 가도 실패할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에 모두 호응했다. 이들로선 난생처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 타인의 호의를 받은 것이기에 감동의 깊이가 남달랐다.
한편.
가류의 채찍질에 무룡의 위가 끝내 찢어졌다. 그냥 채찍질과 달리 내공이 듬뿍 담겼기에 내가 중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무룡의 위에 머물던 독들이 터진 부위를 통해 혈관에 침투했다.
다행히 그때 가류의 채찍질도 끝났다. 그게 아니었으면 독에 죽든지 채찍질에 죽든지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환기공은 황급히 독을 전신으로 분산했다. 그리고 일부를 내공으로 전환했다.
타격처럼 순식간에 끝나는 힘과 달리 지속하여 공격하는 독은 꽤 높은 비율로 내공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운기 경로에 이백사십이 개나 되는 혈도를 포함한 자하신공 일 단계의 운기법이 마환기공을 도왔다.
절반 이상의 내공이 덧없이 사라졌지만, 마환기공과 자하신공의 합작으로 엄청난 양의 내공이 무룡의 혈도들에 쌓였다. 그렇게 쌓인 내공이 독에 저항하고, 마환기공이 뭉치는 독을 전신에 계속 분산하는 동시에 내공으로 전환하고.
무룡은 계속 강해지고 독은 지속하여 약해졌다.
"만세!"
무룡이 눈을 뜨자 제자들이 만세를 불렀다.
"사형. 이제부터 사형의 분부를 전적으로 따르겠습니다."
무룡이 깨기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던 제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좋다. 지금부터 함께 움직인다. 보름 안에 홍안섬여를 잡아내고 독무곡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일어서서 환호하며 기뻐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가류가 흥 콧방귀를 뀌고 자리를 떴다.
키가 크고 덩치도 커서 부럽고 질투 나는 놈이다. 화가 날 때 가장 때리고 싶은 놈이어선지 정작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이번 주인공은 알아서 매를 버는 타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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