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역유도
추향과 늑대 덕구는 세상과 분리되었다. 다르게 이해하면 세상에 둘만 남은 셈이다.
"덕구야. 나 엄마야. 넌 이제부터 추덕구야. 그러니까 어서 엄마랑 계약 맺자."
추향은 까마귀와 맺었던 소환 계약보다 더 높은 단계인 영결靈結 계약을 시도했다. 각자 따로 생활하다가 필요할 때 주문으로 소환해 잠깐 부리는 소환 계약과 달리, 영결 계약은 늘 붙어 다닌다.
게다가 계약자 중 하나가 다치면 남은 하나도 상해를 입기에 서로 끔찍히 아낄 수밖에 없는 관계다.
"낑."
늑대 새끼가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추향의 격이 낮아 영결 계약은커녕 소환 계약도 간당간당하다. 추향은 원래 법술과 온갖 부적으로 자신의 격을 올린 다음 소환 계약을 맺으려고 했다. 그러나 신비세력의 친절한 도움 덕분에 부적도 안 쓰고 영결 계약을 시도하게 되었다.
"나 엄마야. 기억 안 나?"
추향은 자신의 기운을 허공에 풀며 늑대 덕구를 유혹했다. 알에 있을 때 느꼈던 친절한 기운 덕분에 늑대 덕구는 추향이 점점 친근하게 보였다.
"엄마랑 계약하고 훨씬 큰 세상으로 가야지."
늑대 요괴의 격과 비교해 너무 작은 세상. 태어나기 전부터 느낀 추향의 우호적인 기운. 격도 경지도 부족하지만, 늑대 덕구를 담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는 큰 그릇.
게다가 늑대 요괴는 갓 태어나 자신의 격을 제한하는 작은 세상이 주는 갑갑함을 참고 이성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부족했다.
"컹, 컹컹."
반항적으로 짖은 늑대 덕구는 조심스럽게 추향에게 다가간 후 혀로 추향의 손바닥을 핥았다. 그에 따라 늑대 덕구의 기운이 추향의 몸으로 흘러들었다.
추향은 전혀 거부하지 않고 늑대 덕구의 기운을 받는 동시에 자신의 기운을 손바닥을 통해 보냈다.
그렇게 둘의 기운이 서로 섞이기 시작했다.
"덕구, 넌 참 놀라운 아이야."
원래대로라면 늑대 덕구는 오행의 기운만 품어야 한다. 삼두랑의 세 기운과 청동괴의 두 기운을 받아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법을 치는 과정에 우모선에 깃든 음양귀조가 나타났다. 덕분에 덕구는 음양의 기운까지 타고나게 되었다.
"안 되겠다. 네 이름을 바꿔야겠다."
세상의 법칙은 음양과 오행의 대립 그리고 조화로 대부분 해석된다. 음양과 오행을 품으면 세상을 품은 것과 마찬가지다.
덕구한테 미안하지만, 그런 대단한 존재를 덕구로 부르는 건 모독이다.
"예두銳頭, 어때?"
머리가 작고 뾰족하다. 눈이 흑백이 분명하다. 성격이 강인하다.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늑대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우우~"
덕구로 부를 때와 달리 늑대 새끼는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이제부터 네 이름은 추예두이고, 아명은 덕구야."
그러나 덕구라는 이름도 그냥 버려지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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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하는 짓이야!"
삼두랑의 알을 진법으로 감싸 명황성 밖으로 꺼낸 사내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이제 알을 부화해 삼두랑의 새끼만 얻으면 천하의 청동괴는 물론이고 웬만한 요괴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사람을 부릴 때도 늘 사고가 나는 것처럼 청동괴와 요괴를 부리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거란 각오는 있다. 하지만 천하의 청동괴를 마음껏 부리고 명황성의 요괴들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은 사소한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
그런데 술사들이 아무리 주문을 외우고 부적을 태우고 우모선을 흔들어도 진법이 해체되지 않았다.
"요괴가 태어난 것 같습니다."
우두머리가 침착한 말투로 대답했다.
"벌써?"
"부모가 사실 하나나 다름없습니다."
"그걸 감안해서 며칠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어?"
"뭐, 우리가 틀렸나 봅니다."
우두머리의 뻔뻔한 대답에 사내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어떡하지?"
"기다리면 됩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진법이 절로 사라집니다."
사내는 술사 우두머리의 가르치는 듯한 말투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좋다. 그럼 안전하게 금고로 옮긴다."
보통은 금이나 은을 보관하는 창고를 금고라고 부르는데, 사내의 금고는 일반 부자의 금고 수준을 훨씬 넘었다. 금이나 은은 돌멩이 취급하는 곳이 바로 사내의 금고다.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재화에 흔들리지 않는 술사들도 금고라는 말에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켜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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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결 계약은 말 그대로 영혼과 영혼을 연결하는 계약이다. 쌍방이 동의하기만 하면 체결되는 소환 계약과 달리, 계약을 맺기 위해 노력이 필요하다.
다행히 오행과 음양의 기운을 모두 타고났고 알에서 나오기 전부터 기운을 다룬 예두는 물론, 천방기사도 부러워하는 재능의 소유자인 추향 역시 추호의 실수도 없이 계약 과정을 이행했다.
"엄마 기운을 함부로 갖다 쓰면 안 돼."
일반적으로 영결 계약은 격이 비슷하고 힘도 비슷한 상대가 맺기에 이런 걱정이 없다. 계약 즉시 상대의 힘을 절반 정도 끌어다가 자기 것처럼 쓸 수 있는데, 격과 경지가 비슷하면 상대 기운을 다룸에 있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추향과 예두는 격은 물론이고 품은 기운의 차이도 크다. 갓 태어난 예두지만, 훌륭한 부모와 음양귀조 덕분에 추향의 열 배를 훌쩍 넘은 기운을 품었다.
추향이 예두의 기운을 갖다 쓰고 돌려주는 건 아무 문제 없지만, 예두가 기운을 추향에게 돌려줄 때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더구나 추향은 월영심법으로 당백호와 연결이 되었다. 위력은 훨씬 약하지만, 월영심법 역시 영결 계약과 비슷한 부류다.
영결 계약은 복수로 맺는 게 불가능한데, 세상과 격리되며 추향과 당백호의 연결이 끊겼기에 아무 문제 없었다. 그러나 진법이 사라지고 세상에 나가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예두가 추향의 기운을 끌어 쓰다가 당백호와 연결될 수도 있다. 셋이 영결 계약을 맺은 사례는 아직 없기에 어떤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다.
"컹."
다행히 예두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그럼 이제부터 진법을 나가자."
추향은 예두의 기운을 끌어다가 법술을 펼쳤다. 예전엔 부적을 태우고 귀한 재료를 소모하며 펼치던 법술이 그냥 기운으로 펼쳐도 안정적이었다.
"도역유도라는 말이 있어. 뭘 하든 지켜야 할 게 있다는 뜻인데, 우릴 열심히 도운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겠어."
추향은 천방기사도 제대로 못 펼치는 역행逆行 법술을 펼쳐 진법을 해체했다. 진법은 차곡차곡 역순으로 해체되며 소모한 재물과 부적을 도로 토해냈다.
예두는 밤하늘처럼 까만 눈동자를 별처럼 빛내며 추향이 펼치는 법술을 열심히 관찰했다. 본능적으로 기운을 다루는 예두에게 일정한 법칙을 지키며 기운을 움직이는 추향의 모습이 아주 흥미롭게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며 진법이 해체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추향이 기운만 갖다 바치면 알아서 진행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일단 세상에 적응하고 네 적성을 찾은 다음, 적성에 맞는 법술을 수련해 경지를 높여 함께 선계로 가는 걸 첫 목표로 하자."
추향 혼자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격이 높은 예두와 영결 계약을 맺은 덕분에 열 배 이상으로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그렇게 추향이 갓 태어난 예두에게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사이, 진법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추향과 예두 주변엔 진법을 펼치는 데 소모한 재화와 부적들이 무더기로 쌓였다.
"사람은 마음을 곱게 써야 돼. 원하는 바를 성취하면 상대에게 보답하는 예의 정도는 있어야지."
추향이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갑자기 마주한 세상에 전율한 예두는 추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추향 역시 자아도취에서 빠르게 깨어났다.
"어머, 이게 다 뭐야."
추향은 진법을 펼치는 데 소모한 재료를 그대로 돌려주는 거로 신비세력에 보답했다. 그러자 신비세력은 어마어마한 보물들로 추향의 고운 마음씨에 다시 보답했다.
"예두야, 기운 좀 빌려. 하나도 남기지 말고 다 챙겨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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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법이 해체되었습니다."
"예상보다 빠른 거 아닌가?"
"진법을 해체하려던 우리 시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놈은 어떻게든 갈아치워야겠다.'
왠지 근래부터 술사 우두머리의 말투가 거슬렸다. 술사 우두머리의 말투가 전혀 변하지 않은 걸 생각하면 사내의 심기에 변화가 생긴 게 틀림없다.
그리고 사내는 자신의 심기가 왜 변했는지 절절하게 깨달았다.
"젠장, 이게 뭐야!"
금고 문을 열기 전에 수많은 술사와 무인을 동원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삼두랑의 새끼를 제압한 후 강제로 계약해 청동괴와 약한 요괴를 부리는 수단으로 쓰려 했다.
그런데 활짝 열린 금고 문을 통해 보인 광경은 예상과 너무나도 달랐다.
진법을 뒀던 곳엔 금은을 비롯한 귀금속과 보석 그리고 부적이 가득 쌓였다. 그러나 상상했던 늑대 요괴의 모습은 없었고, 금고에 뒀던 수많은 보물도 모습을 감췄다.
"술사, 이거 장안법인지 그거 아니야? 눈에 안 보이게 속이는 거."
술사 우두머리가 침중한 얼굴로 다른 술사에게 법술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진짜 사라졌습니다."
법술을 펼쳐 금고의 보물이 모두 사라졌음을 확인하고도 사내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야. 다들 들어가서 찾아 봐."
사내의 지시에 무인들이 텅 빈 금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팔을 휘적거리며 보물을 찾았다. 그 틈을 타 은신술을 펼친 추향과 예두가 금고를 벗어났다.
"송구하나, 없는 것 같습니다."
무인들을 통솔하는 자가 자기 잘못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하하하."
사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주변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 상황에 저리 상쾌한 웃음이라니. 누가 봐도 미친 게 분명했다.
"이 일을 벌일 수 있는 자는 늑대 요괴뿐이다. 저 많은 보물을 삼켰다는 건 늑대 요괴가 매우 강하다는 뜻이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닌가."
그제야 사내가 기쁘게 웃은 이유를 알아챈 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어나자마자 이 정도 능력을 보이니 이후 어디까지 성장할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물은 어차피 다시 모으면 된다. 그러니 그딴 신외지물은 상관 말고 늑대 요괴부터 찾아라."
그러나 예두는 이미 금고와 수십 장 떨어진 곳에서 우모선을 입에 물고 음양귀조의 기운을 열심히 뽑는 중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배운 게 도둑질이기에 죄책감은 당연히 없었다.
- 작가의말
盜亦有道 - 도둑질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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