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법전수
"설마 오사형입니까?"
"떠보는 건 그만둬. 내가 일곱 번째인 걸 잊지 않았을 텐데."
손청우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송구합니다. 손청우가 무룡 사형께 인사드립니다."
"제자 노계혼이 무룡 사백께 문안 올립니다."
들을 말이 너무 많다.
다행히 손청우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정리해 들려줬다.
무룡은 노혼이 마교의 세 장로와 대결한 이유를 알았고 싸움의 과정이 어땠는지도 알았다.
"사부께선 늘 죽음이 삶을 완성하는 마지막 단어라고 하셨지. 강호의 사람들은 충이나 협의 같은 단어를 보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사부의 마지막은 화산이다."
무룡의 말에 손청우가 눈시울을 붉혔고 노계혼은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뚝뚝 떨궜다.
화진악의 주검이 발견된 후, 조형래가 조씨 가문을 이끌고 화산에 왔다. 그러나 이미 화산에서 제적되었기에 복귀는 불가능했다.
조형래는 수완을 발휘하여 같은 배분의 제자들을 최대한 포섭했고 화무룡과 같은 배분의 제자 중에서 가장 다루기 쉬운 청웅을 양자로 삼아 대사형 자리를 줬다.
지금도 눈치가 보여 화산 장문인 자리는 공석이지만, 화무룡이 장문인 자리를 거절하기만 하면 바로 청웅을 앉힐 예정이다.
"화진악 등이 도망친 사실을 알리면 화무룡의 대사형 자격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장문인 자리에 청웅을 앉힐 수 있는데 왜 안 그랬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청웅의 멍청함이 여전하여 많은 교육이 필요했고 또 하나는 화진악이 도망쳤다고 강호에 공표하면 화산의 명예가 바닥에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고수 대부분이 죽어 속이 텅 빈 강정인데 전대 장문인이 싸우다 명예롭게 죽은 것도 아니고 도망치다 의문스러운 죽임을 당했다고 하면 화산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하찮아지겠습니까."
대외적으로 화진악은 문파 고수들을 거느리고 마교를 요격하다가 장렬히 희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노계혼이 한 보따리 짊어지고 움에서 나왔다.
"사조님은 저희가 명당에 모셨습니다."
무룡은 손청우와 노계혼을 따라 노혼의 무덤으로 갔다.
노혼의 무덤은 조양봉 꼭대기에 돌로 쌓았다. 화산에서 가장 높은 곳이고 비가 와도 바람이 와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이다.
물론, 해를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제가 생각이 깊어 다행이다. 사부께 정말 어울리는 곳이군."
화산을 가장 넓게 볼 수 있고 화산에 닥친 풍파에 가장 먼저 맞서야 하는 곳이다. 생기를 가득 머금고 뜨는 아침의 해도, 피곤함에 찌들어 서산으로 지는 저녁의 해도 가정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지켜봐야 하는 곳이다.
노계혼이 준비한 음식들로 부족한 대로 구색을 갖춰 제사상을 차렸다. 무룡은 만감이 교차하여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할 말이 정말 많은데 정작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든 화산을 죽이고 바르게 살리겠습니다. 손에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히든 후회는 없습니다."
무룡이 어렵게 입을 열자 손청우와 노계혼도 바로 말을 받았다.
"사형을 따라 화산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사부와 사백을 따라 목숨 바쳐 화산을 살리겠습니다."
노혼의 무덤에 정성껏 절을 올린 무룡은 큼직한 돌 하나 주워다가 무덤에 얹었다.
"먼저 내려가라. 난 좀 더 있겠다."
조양봉 꼭대기에 혼자 남은 무룡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간 사부의 무덤 앞에 서는 상상을 수없이 했지만, 모두 부질없었다. 그저 무기력하고 슬퍼서 우는 것밖에 더 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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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를 인정하니 그만 돌아가십시오."
청웅의 지시를 받고 시비를 걸러 온 제자들을 노계혼이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정 비무를 하고 싶으면 오줌싸개 청웅 보고 직접 오라고 해라. 그리고 썩 꺼지지 않으면 가장 거슬리는 놈을 골라 모가지를 자르겠다."
화산에서 손청우의 별명은 광서생이다. 평소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서생으로 보이나 입술 한번 깨물고 흰자를 보이면 누가 봐도 미친 짓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해낸다.
조형래의 배분까지 가도 손청우를 이길 고수는 다섯도 안 된다. 지금까지는 노계혼이 비검을 받아줘서 탈이 없었지만, 패배를 인정한 순간 더 질척거리다간 손청우가 개입할 수 있다.
청웅의 제자들은 황급히 인사를 올리고 꽁지 빳빳이 도망쳤다.
"내일도 오지 마라. 정 비검하고 싶으면 청웅 보고 진검 들고 찾아오라고 일러라."
옥허심법의 경지가 오 성을 넘어 멀리 도망간 제자들의 귀에도 손청우의 외침이 똑똑히 들렸다.
그렇게 귀찮게 구는 날파리들을 쫓고 무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느낌이 어때?"
무룡은 노계혼에겐 벽파검법을 알려주고 손청우에겐 자하신공을 알려줬다. 괜히 문을 독으로 녹이면 아무나 자하동을 드나들 수 있다. 무룡은 신중을 기해 손청우가 삼 년 안에 자하신공 일 단계를 이룰 가망이 보이면 독으로 녹이는 걸 잠시 보류할 생각이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제겐 옥허심법이 훨씬 적합합니다."
화산파가 어디 동네 무관도 아니고 당연히 자질이 뛰어난 손청우에게 가장 적합한 심법을 찾아 익히게 했다. 음기가 양기보다 강한 옥허심법을 익힌 손청우의 체질은 자하신공과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구나. 문을 녹이고 들어가야겠다.'
노계혼이 있긴 하지만, 이제 심법에 입문하는 단계여서 기대할 바가 아니다.
"사백, 이 초식을 잘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엔 이 두 연결 동작은 군더더기로 느껴집니다."
얼굴이 땀범벅이고 숨도 거칠지만, 뭐가 그리 즐거운지 노계혼은 늘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 나도 벽파검법을 익힌 지 육 년이 되어서야 깨달았으니까. 지금은 그저 초식대로 익히는 것과 자기한테 맞는 공격 속도를 찾아내는 데 집중해라."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벽파검법은 몸으로 익혀야 한다. 목숨을 걸고 목숨을 취하는 검법인데 한가하게 머리를 써서야 되겠냐? 머리는 싸우기 전에 쓰는 거고 전투가 시작되면 초식을 얼마나 몸에 익혔고 검법을 얼마나 이해했는지에 달렸다."
그 후로 무룡은 노계혼의 벽파검법을 지도하는 데 집중했다. 자질도 괜찮지만 열의가 대단하여 벽파검법의 성취가 아주 빠르게 올라갔다.
순식간에 보름이 지났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검법 수련을 멈추고 심법 수련에 집중해라."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무룡은 잠시 장안 근처의 야장촌으로 다녀오기로 했다.
"왜 그래야 합니까? 한창 수련이 잘 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너무 빨리 익히면 이후 성취가 깊어진 다음 잘못 익힌 부분을 고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지금 열심히 할수록 이후에 더 힘들어진다. 네 몸이 익힌 걸 머리가 받아들일 시간을 좀 줘야 한다."
"사형께선 편히 다녀오십시오. 이놈은 제가 검을 못 잡게 단단히 감시하겠습니다."
무룡은 독 가루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후 야장촌으로 달렸다.
"사부, 사백은 왜 경공을 펼치지 않는 것입니까?"
노계혼은 무룡의 무겁게 달리는 모습을 보고 커다란 의문이 생겼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사형은 단전에 내공이 느껴지지 않아. 그러나 평소 모습을 보면 나보다 내공 경지가 훨씬 높아 보인단 말이지."
"벽파공이 그만큼 대단한 것이겠지요?"
"그렇겠지. 그러니 당분간 죽검을 잡지 말고 심법 수련에만 몰두하거라. 벽파공을 십 성까지 익히면 자하신공도 가르친다고 하셨으니."
무룡은 바로 야장촌으로 가지 않았다.
'장사가 잘되는구나.'
화진악이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천하 정세가 불안한데도 조형래의 주루는 장사가 매우 잘되었다. 화산파의 실세인 조형래와 안면을 트려고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 덕분이었다.
'천벌 받을 놈들.'
살이 피둥피둥 찐 조형래의 큰아들이 주루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정말 즐겁게 웃는 낯짝을 보니 속에 천불이 났다.
'당분간 화산의 일에 신경 쓰지 못할 것이다.'
무룡은 조씨 가문이 운영하는 일곱 개 주루와 두 개의 객점을 일일이 방문해 우물이나 물독에 배탈을 유발하는 독을 탔다.
그리고 조씨 가문이 소유한 다섯 개 장원을 돌며 세 개의 우물에 독을 탔다. 남은 둘은 우물이 없고 근처의 강에서 물을 길어 먹기에 그냥 놔뒀다.
경공을 펼칠 수 없는 몸이어서 장원의 물독에 독을 타는 모험은 하지 않았다.
이는 무룡의 생각이 아니라 손청우의 계책이다. 생각 같아선 독을 풀어 다 죽이고 싶으나 무고한 사람이 다칠 걱정에 참았다.
'이번엔 그저 작은 인사일 뿐이다.'
배탈을 일으키는 독을 탄 건 자하동을 들어가는 일에 최대한 방해를 안 받으려는 속셈이다. 진정한 복수는 힘을 얻은 뒤에 할 생각이다.
그렇게 계획한 일을 끝낸 무룡은 야장촌으로 가서 의뢰한 물건을 받고 잔금을 치렀다.
황동 주전자 다섯 개는 무룡이 원했던 모양과 크기로 정확히 만들었다. 그러나 검은 무룡이 원했던 것보다 조금 길었다.
"생각보다 단조가 잘 되어 세 번 더 접었더니 검이 살짝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균형점이 잘 잡혀 사용하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을 겁니다."
무룡은 가죽으로 된 검집에서 검을 뽑아 몇 번 휘둘렀다. 자루가 손에 착착 감기고 검도 스무 근이나 되는 무게라고 안 느껴질 정도로 가벼웠다.
'내가 그때보다 키가 컸고 팔도 길어졌어. 오히려 조금 긴 게 더 어울리는구나.'
흡족한 마음에 야장에게 공치사를 가득 한 무룡은 화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엔 황동 주전자 다섯 개를 들고 가느라 조금 느렸다.
흘궁이 정확한 계산으로 설계한 주전자가 찌그러지거나 하면 안 된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운 후 음양강수의 가루를 특별히 제작한 국자로 평평하게 담아서 넣으면 가장 강한 독이 된다. 조금이라도 변형하면 독성이 약해지기에 조심해 달리느라 조양봉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초저녁에 조양봉에 도착하니 노계혼이 나무 아래에서 눈을 감고 벽파공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노계혼 근처엔 벌레를 쫓는 쑥향이 세 개나 타고 있었다.
'사제는 훌륭한 사부구나. 나도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야 할 텐데.'
손청우와 노계혼을 보며 무룡은 아직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식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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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이대로 떠날 겁니까?"
안타깝게도 음양강수는 자하동의 문을 녹이지 못했다. 문은 물론이고 문 주변의 돌조차 녹이지 못했다.
그냥 돌은 물론 커다란 바위도 일각이 안 걸려 무르게 만드는 음양강수이건만, 자하동엔 아무 효과도 없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서 무룡은 노혼의 제사를 치르고 바로 떠나기로 했다.
"그럼 저 음양강수는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사제는 뭘 꾸미는 거지?"
"저걸로 화진악을 비롯한 도망자들의 비석을 녹일 생각입니다. 화산에는 조형래의 처사에 불만이 큰 제자가 많습니다. 구심점이 없어 뭉치지 못하는 것뿐이지요. 만약 백 개가 넘은 비석이 뽑히거나 깨지는 것도 아니고 녹아버린다면 조상들이 노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무룡은 무식하게 죄를 지은 자들을 다 죽인 다음 훌륭한 제자들만 남겨 화산을 바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손청우는 화산의 맥을 이으려면 그저 죽이고 살리는 것으로 불가능함을 알고 내내 고민하여 더 나은 계획을 세웠다.
무룡은 조양봉 꼭대기에 모신 노혼의 무덤을 본 이후 화가 많이 가라앉았다. 화산에 대한 애정도 얕지 않아 손청우의 하나도 틀린 게 없는 말에 설득되어 생각을 바꿨다.
"조형래 일가는 반드시 다 죽여야 하고 화산의 정기를 어지럽힐 것 같은 놈들도 추방해야 한다."
그렇다고 어중간하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조씨 가문의 멸문은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화산을 좀먹는 벌레들은 죽이는 대신 쫓아내기로 했다.
- 작가의말
사람이 쉽게 안 변합니다. 주인공이 강철처럼 단단한 독심을 얻으려면 좀 더 달구고 두드리고 담금질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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