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치료
눈이 힘겹게 떠졌다.
"그대는 누구요?"
청수한 얼굴의 점잖은 중년이다.
"무룡입니다. 당신은 누구고 전 왜 여기 있습니까?"
무룡이 갈린 목소리로 질문했다.
"마교 장로 후문영이라고 하오."
사부를 죽인 원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죽이고 싶다. 손가락으로 눈알을 파내서 생으로 씹어 삼키고, 무딘 칼로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 발로 짓밟고, 팔딱이는 심장을 손으로 터뜨리고 싶다. 그러고도 하고 싶은 악독한 짓이 너무 많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사부의 죽음을 봤을 때도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나왔다.
"해칠 마음이 전혀 없으니 두려워 마시오."
무룡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거로 오해한 후문영이 말했다.
"목이 많이 마르겠군."
후문영이 손수 대접에 물을 부어 무룡의 입에 조심스럽게 흘렸다. 그냥 물이 아니고 잡내가 전혀 없는 최상품 찻잎을 달인 찻물이었다.
'진짜 이자일까?'
후문영은 도저히 암수로 사람을 해칠 비열한 놈으로 보이지 않았다. 공자와 맹자를 입에 달고 사는 고지식한 선비가 더 어울리는 외모다.
'추영은 도망쳤을까?'
추영을 떠올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부는 생사가 엇갈릴 때일수록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
노혼은 목숨을 건 싸움에서 내공이나 초식보다 중요한 게 마음가짐이라고 늘 강조했다.
'사부의 복수도 목숨이 붙어 있고 힘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어렵게 마음을 다잡은 무룡이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장로님이 제 구명의 은인이겠군요. 절을 받으십시오."
무룡은 힘겹게 침대에서 내려 후문영에게 큰절을 올렸다.
"은혜랄 것까지야. 정 고맙게 느낀다면 그간의 경과나 들려주시오."
겨우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무룡은 기절하기 전에 추영이 했던 말을 애써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정리했다.
"저는 양부와 함께 깊은 산속에서 둘만 살았습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제 양부는 강호의 무인인 것 같고 마교 장로인 천노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장로님을 보고 불손하게 행동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천산자는 마교 장로가 아니오."
"그런 것도 모르고 제가 생명의 은인에게 크게 결례했군요. 자리에 없어서 경과는 모르지만, 양부는 천노와 말다툼을 벌이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멀리서 보고 달려갔으나 도착했을 땐 양부는 이미 죽고 천노도 떠났습니다. 그때 추 소저가 나타나서 복수를 돕겠다면서 제게 무공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화무룡인 척하면서 자기 지시에 따르라고 했습니다."
후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극독에 중독된 채 마교로 와서 목숨을 구걸한 천노의 말과 비슷했다. 청년의 양부를 죽였다는 말은 없었지만, 화무룡을 발견해 잡아두고 자하신공을 익히게 했다는 대목은 있었다.
'천산자는 평생 속셈만 굴리더니 자기한테 복수를 다짐하는 것도 모르고 영약까지 바쳐가며 이자를 키웠군.'
"그러다가 추 소저가 갑자기 도망가자고 했습니다. 폭포 뒤 동굴에 숨어 있다가 암기로 천노를 해친 다음 말을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강에서 배를 타고 움직일 때 갑자기 남궁세가가 화산파의 복수를 위해 나서 달라며 접근했습니다. 저는 추 소저의 지시대로 남궁가로 갔습니다."
'남궁가로 왜 갔나 했더니. 하지만 남궁가가 화무룡의 얼굴을 모르진 않을 텐데. 설마 진짜 화무룡은 죽은 것인가?'
"그러다가 추 소저가 또 도망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음엔 배를 타고 바다로 갔고 어떤 섬에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천노가 사람을 잔뜩 데리고 나타났고, 갑자기 같이 온 사람들을 죽이고 저와 추 소저를 생포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시오?"
"소인은 아는 게 없습니다. 저는 그저 처음부터 추 소저의 지시에 따랐고 시키는 대로 무공만 수련했습니다."
'성녀께서 양강 계열의 무공을 가르쳐 천산자를 속인 것이군. 남자로 태어났다면 다음 교주 자리에 앉아도 될 정도로 영민하신 분인데.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러다 갑자기 배가 가라앉았습니다. 천산자가 우릴 데리고 다른 배로 갔는데, 그 배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천산자가 함께 육지까지 간다고 해놓고 배를 만든 후 저와 추 소저를 버렸습니다."
"왜 버렸소?"
"배가 암초에 부딪히자마자 우리 둘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저와 추 소저는 헤엄쳐서 어렵게 좌초한 배로 갔습니다."
무룡은 혀로 입술을 핥고 말을 이었다.
"그러다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더니 암초에 걸린 배가 빠져나왔습니다. 그대로 표류하던 중에 천산자가 다시 나타났고, 저는 추 소저를 보호하다가 암기에 당한 다음 정신을 잃었습니다."
추영의 진술은 물론 예전에 천산자가 한 말과 대조해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겠군. 추 소저는 우리 마교의 성녀시고 천산자는 마교 사람이 아니오. 그대도 마교를 겪어보면 그간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걸 느낄 것이오."
"장로님만 봐도 그간 들은 소문이 다 거짓이란 걸 알 것 같습니다."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무룡처럼 우직해 보이는 덩치가 진심을 담아 말하면 더욱더 그렇다.
"하하. 과찬이오."
"건강을 회복하면 장로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쓸모가 없는 놈이니 바닥을 쓸고 차를 끓이는 일에라도 써주시면 소나 말처럼 성심을 다해 일하겠습니다."
"우선 치료에 전념하시오. 단전을 다쳐 당분간은 거동이 힘들 거요."
단전을 다쳤다는 말에 무룡은 사고가 멈춰버렸다. 그런 무룡의 반응을 확인한 후문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떠났다.
자기 방으로 돌아간 후문영은 고개를 빙빙 돌리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파악한 정보를 종합했다. 추영과 무룡 그리고 예전에 천산자가 했던 말을 종합하니 대충 그림이 떠올랐다.
'자하동을 운운하며 천산자를 속여 교를 탈출했고, 천산자가 화무룡을 찾는 사이에 추영은 화무룡을 만든 거였어.'
천산파의 덕을 크게 본 주제에 자기가 똑똑한 줄 알고 잘난 척하던 천산자를 생각하니 비웃음이 절로 났다.
'용혈은 무슨. 추영에게 태기가 있는 듯하더니 저놈이 정인이었구나. 아무리 죽기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비굴한 놈하고.'
추영의 재능과 심계를 높이 평가하는 후문영은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그 뒤로도 후문영은 무룡을 몰래 지켜보았다.
무룡은 마교 무사는 물론 시종과 시녀한테까지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큰 키가 필요한 일에 시종이나 시녀들이 가끔 부탁하면 선뜻 들어주고 늘 최선을 다했다.
추영의 정인이라고 안 좋게 평가했는데 계속 지켜보니 추영이 아까워서 그렇지 사람 됨됨이는 나쁘지 않았다.
"지내는 데 불편한 점은 없으시오?"
후문영은 무룡을 살릴지 죽일지 고민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무룡의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하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마지막으로 대화하려 했다.
무룡이 냉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여기 사람들한테 마교에 신묘한 재주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추 소저를 구하려다가 단전을 잃었는데 어떻게 치료가 안 될까요? 이걸 고쳐주시면 평생 소와 말이 되어 장로님의 시중을 들겠습니다."
후문영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래, 독무곡으로 보내자. 가류라면 좋은 실험 재료라고 마음껏 다루겠지. 단전을 치료하러 보냈다고 말하면 성녀한테도 핑계로 좋고.'
죽이는 게 가장 좋긴 한데 추영의 눈치가 보였다. 실권은 전혀 없는 유명무실한 성녀긴 하지만, 교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어서 비위를 거스르기 싫다.
단전 치료를 핑계로 독무곡으로 보내면 살아서 나올 가능성의 거의 없다. 단전을 치료하는 게 하루 이틀로 되는 일도 아니기에 상황을 봐가며 사람을 보내 목숨을 취해도 된다.
"좋소. 성녀의 목숨을 구한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꼭 그대의 단전을 치료하겠소."
그렇게 무룡은 독무곡으로 보내졌다.
독무곡毒霧谷의 곡주는 가류瘸瘤로 불리는 괴인이었다.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얼굴과 몸에 혹이 여럿 있는 흉측한 모습으로 성질도 겉모습만큼 더러웠다.
"후문영의 부탁이라고? 그럼 들어줘야지."
무룡의 단전은 내상이 아닌 외상으로 파괴되었다. 보통은 내가 중수법이나 파혈침破穴針으로 단전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전이 파괴될 정도의 외상에도 목숨을 부지하는 자가 거의 없기에 가류에게 무룡은 정말 좋은 환자였다.
"이틀 굶겨라. 물은 한 시진에 한 모금씩 마시게 하고."
가류는 무룡을 알몸으로 돌침대에 눕힌 후 손발을 쇠사슬로 묶었다. 돌침대가 있는 곳도 어두컴컴한 지하여서 치료가 아닌 고문이 더 어울리는 상황이다.
돌침대에 묶인 무룡은 얼마 안 지나 고른 숨을 쉬며 깊은 잠에 빠졌다. 다소 섬세하고 유약한 마음과 달리 배짱 자체는 꽤 두둑한 무룡이다.
"살다 살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군."
가류의 제자들이 그런 무룡을 보고 혀를 찼다. 아무리 수준이 낮은 무인이어도 단전을 잃으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이놈은 참 태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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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보다 사흘 정도 늦게 마교에 도착한 후문영이 마교 교주와 독대했다.
"성녀가 회임했다고?"
"그렇습니다. 태기가 확실합니다."
"어떤 놈의 짓인가? 설마 천노는 아니겠지?"
"성녀께서 함구하여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무룡이라는 심증이 있지만, 확실치 않은 말을 입에 올리기 싫었다.
"하긴. 회임한 여자를 고문할 수도 없고 약을 먹여 자백을 받아낼 수도 없고."
추영이 제물로서의 가치가 사라졌는데도 마교 교주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괴물을 죽일 무기는 어떤가?"
"오 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더 빠르게는 안 될까?"
"오 년도 최대한 빠르게 예측한 겁니다."
교주는 심드렁한 얼굴로 몸을 젖히고 생각에 잠겼다.
"괴물을 상대하는 무사와 교도는 나이순으로 뽑게. 백 살이 넘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젊은 사람이 하나라도 더 사는 게 낫지 않겠나?"
"명대로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성녀와 함께 잡은 자는 어쨌는가?"
"독무곡에 보냈습니다."
"잘했다."
독무곡에서 일 년에 목숨을 잃고 사라지는 자가 백 명이 넘는다.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가류의 매질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신 가류가 의술로 살리는 목숨도 수백이 넘는다. 성녀의 방조자로 보이는 놈을 확실히 죽이는 동시에 치료 목적으로 보냈다고 성녀한테 핑계로 대기에 딱 좋은 곳이 바로 독무곡이다.
- 작가의말
독무곡에서 기연 얻어 마교 교주 자리를 먹어 치운 다음 군대를 일으켜 천하를 통일해 황제가 되는 신선한 스토리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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