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천산
무룡은 기를 가라앉혀 기척을 숨겼다.
배운 적은 없고 반란을 획책한 가주들이 노혼을 찾아왔을 때 지붕 위에 숨어서 깨달은 방법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고, 그저 기운을 숨긴다는 생각으로 뭔가를 했는데 노혼조차 무룡을 찾지 못했었다.
우렛소리와 함께 시종 들끓던 바다가 갑자기 고요해졌다. 꽤 많은 부분이 훼손된 진법이 드디어 효용을 잃은 것이다.
동시에 바다에 커다란 배 세 척이 나타났다. 그중 한 척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진법을 파훼하는 과정에 충격을 받아 선창에 구멍이 난 듯하다.
마교의 깃발을 단 배가 나타나자 추영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미안해라. 죽기 전에 바다 한 번 보겠다고 이렇게 많은 분을 수고롭게 하다니. 목숨으로 사죄하겠습니다."
뭔가 희끗거리더니 해변에 딱 봐도 고수 티가 나는 노인 다섯 명이 나타났다. 배가 너무 커서 얕은 바다로 못 오기에 고수들만 경공으로 날아온 것이다.
다섯 중에는 무룡도 익히 아는 천노가 포함되었다.
"성혈 가문의 마지막 불씨여."
검은 장포를 입고 등에 검 두 자루를 멘 노인이 자애롭게 웃었다.
"그대에겐 미안한 마음뿐이오. 우리가 못나서 당신들의 희생을 강요했네."
"그럼 좀 모른 척하지."
"염치없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부탁하네. 놈을 죽일 무기를 완성하려면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네. 그사이 놈이 깨지 않으면 그댄 살아서 교의 성녀가 될 거요."
"우리 언니 때도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노인이 무안한지 추영의 눈길을 피했다.
그때 천노가 움직였다. 어느새 꺼낸 판관필 두 자루로 붉은 장포를 입은 노인과 흰 마고자를 걸친 노인을 기습했다.
천노가 대단한 고수인 것도 있고, 꼬물만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어서 마교의 두 장로는 눈도 못 감고 즉사했다.
"놈!"
추영에게 자애로운 얼굴만 보여주던 흑의 노인이 추상같이 호통을 치며 쌍검을 뽑아 휘둘렀다. 그리고 서역인으로 보이는 누런 수염의 노인도 등에서 짧은 봉 하나 꺼내 천노를 공격했다.
'뭐지? 천노는 도대체 누구 편이지?'
"추영, 빨리 날 도와 놈들을 처리해."
배에서 수십 명이나 되는 마교 무사가 뛰어내려 해변으로 헤엄쳤다. 무룡은 지금 나서서 천노를 도와 마교 장로들을 처리해야 할지 더 지켜봐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난 교를 위해 희생하기로 마음먹었어."
추영은 이대로 마교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게 아니면 마교의 추적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무룡까지 목숨을 잃을 수 있다.
"네가 처녀지신을 잃은 걸 알아.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고 나를 도와."
천노는 추영이 처녀가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이대로 돌아가봤자 괴물을 멈출 수 없고, 그렇게 되면 화가 천노뿐이 아니라 천산파까지 미친다.
차라리 여기서 마교의 무리를 다 죽인 다음 천산으로 달려가서 문파 제자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치는 게 낫다.
"난 내공을 다 잃었어. 돕고 싶어도 못 도와."
추영에겐 직접 제작한 대단한 암기들이 있다. 마음을 먹으면 천노를 돕는 게 가능하지만, 마교를 배신한 천노에게 추영은 아무 의미도 없다. 마교 무사들을 다 죽이면 천노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을 잘 안다.
"안타깝구나."
경공으로 몸을 뒤로 훌쩍 날린 천노가 주먹 크기의 구를 던졌다. 추영이 황급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내공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어서 뒤로 물러서는 속도가 느리진 않았다.
쾅 소리와 함께 구가 터졌다. 어떻게 했는지 구가 터지며 날린 파편의 대부분이 마교의 두 장로에게 향했다.
추영은 자신에게 향하는 파편들을 땅을 구르는 거로 피하고 천노는 오히려 부상을 무릅쓰고 두 장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누런 수염의 장로는 봉을 열심히 휘둘렀지만 결국 파편을 다 막지 못했다. 독이 묻은 파편이 몸에 박히자 참을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서 천노의 추가 공격을 막지 못하고 즉사했다.
쌍검을 쓰는 흑의 노인은 파편을 모조리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천노의 공격도 어깨를 스치는 부상으로 끝냈다.
흑의 노인을 제거하는 데 실패한 천노는 훌쩍 뒤로 물러나서 해약을 꺼내 복용했다. 흑의 노인은 천노를 쫓지 않고 지원하러 오는 무사들을 기다렸다.
'천산파도 어쩔 수 없구나. 나라도 목숨을 부지해야겠다.'
생각을 마친 천노는 파편을 피하고 몸을 일으키는 추영을 덮쳤다. 추영을 죽이고 도주하면 마교의 무리도 끝까지 자신을 쫓지 않을 것이다. 괴물이 언제 깰지 모르니 칼 잡은 무사 한 명이 아쉬운 시기다.
예상도 못 한 전개에 무룡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무룡이 생각하기엔 천노가 추영을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마교와 척을 진 마당에 적을 더 만드는 건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러나 그건 무룡의 입장이고, 천노 입장에서 추영을 죽이는 게 득만 되고 해는 없는 일이다.
다행히 흑의 노인이 제때 끼어들어 천노의 판관필을 막았다.
"이미 처녀가 아니라니까. 미간의 자미성이 사라졌어."
천노가 뒤로 물러나며 흑의 노인에게 말했다. 폭포 뒤 동굴에선 너무 어두워 판단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환한 대낮이어서 확실히 봤다.
"네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교를 위해 백 년이나 희생해 온 가문을 이렇게 대해선 아니 된다. 제물로 가치가 없다면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도록 교에서 극력 도와야 한다."
"그럼 굳이 싸울 필요도 없겠네. 이 아이는 그냥 섬에 두고 너흰 돌아가. 나도 이 아이를 절대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천노의 말에 흑의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교로 데려가서 처녀가 아니라는 걸 확인한 다음 교주께 선처를 바랄 일이다."
"교에 데려가면 이 사내 저 사내 손을 타면서 아이 낳는 암컷 취급을 받을 텐데."
"내게 이 아이 하나 정도를 지킬 힘은 있다."
마교 장로는 추영을 데려가려 해서 악인이고, 천노는 추영을 죽이려 해서 악인이다. 추영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고 내공을 대부분 잃어 그럴 능력도 없다. 거기에 마교 무사 수십 명이 달려오고 있다.
무룡은 최대한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벽파검법의 구결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냉철한 이성으로 지금 상황을 바라보고 정확한 결정을 내리려고 애썼다.
'사부, 내게 길을 알려줘요.'
"내가 도망치면 끝까지 쫓을 거냐?"
천노가 질문했다.
"네가 나보다 열 살은 많은 거로 아는데, 그렇게도 살고 싶으냐?"
흑의 노인이 천노를 비웃었다.
"하하. 이 천산자가 평생 셈을 하다가 오늘 여기서 꼬꾸라지는구나."
인산불여천산人算不如天算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셈을 아무리 잘해도 하늘보다 나을 수 없다는 뜻이다.
천노는 천산자天算子로 불리며 천산파天山派의 태상 장로다. 천산의 천산자라고 하면 마교 세력권에서 평생 손해 안 보고 정확한 선택만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자하동의 비밀에 대한 욕심으로 추영의 꼬임에 넘어가 자신은 물론 천산파까지 멸문의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대화하는 사이 마교 무사들이 하나둘 도착해 흑의 노인 뒤에 섰다.
"날 쫓기보단 빨리 돌아가는 게 어때?"
"이대로 돌아가면 네 손에 죽은 장로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하구나."
천산자는 대화로 시간을 벌며 무사 숫자를 셌다. 배에 남은 건 마교 소속이 아닌 고용한 선장·선원뿐이라는 걸 확인한 천산자는 내공으로 품에 숨긴 벽력탄을 움직였다.
벽력탄은 겨드랑이를 통해 천천히 흘러내려 천산자의 손에 떨어졌다.
손바닥으로 벽력탄을 잡고 손가락으로 판관필을 움켜쥔 천산자가 추영을 덮쳤다. 흑의 노인이 앞으로 두 걸음 나가 천산자를 막았다.
실전 경험이 풍부한 마교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천산자를 포위했다.
추영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흑의 노인 역시 뭔가 이상을 느꼈다. 검과 부딪힌 판관필이 허망하게 날아갔다. 천산자 같은 노강호가 이런 실수를 할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천산자는 뒤로 공중제비를 돌아 판관필을 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찌르는 마교 무사의 검을 밟고 더 높이 뛰었다.
대부분 사람의 시선이 천산자의 손에서 벗어나 하늘을 나는 판관필로 간 틈에 몰래 바닥에 떨군 벽력탄은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다. 천산자는 몸을 높이 솟구치는 동시에 손가락으로 내공 한 조각을 쏘아 벽력탄의 뇌인을 건드렸다.
"엎드려!"
크게 외친 흑의 노인이 검을 휘둘러 검막을 만들었다.
벽력탄이 폭발했다.
마교 무사들은 대부분 즉사했고 거리가 멀었던 몇도 숨이 들쑥날쑥했다. 검막을 만든 흑의 노인 역시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즉사했다.
다행히 추영은 흑의 노인 덕분에 무사했다. 벽력탄이 터지면서 날린 흙모래로 옷도 얼굴도 시커멓게 됐지만, 다친 곳은 없었다.
무룡은 지금이 천산자를 죽여야 할 때임을 알았다. 벽력탄이 터지고 바로 허리의 검을 뽑아 노도박안의 초식으로 천산자를 덮쳤다.
동시에 추영도 움직였다. 몸에 숨긴 암기 세 개를 모두 꺼내 천산자를 향해 쏘았다.
"흥!"
천산자는 몸을 날려 추영의 암기를 피했다. 예전에야 거리가 너무 가깝고 무룡의 혈도를 푸느라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지만, 이번엔 싸우는 내내 추영이 언제 움직일지 유의했다.
그러나 추영의 암기도 대단하고 발사한 시점도 교묘하여 결국 침 세 개가 몸에 꽂혔다.
"독이 없구나."
안타깝게도 미처 독을 구하지 못해 살을 아프게 하는 것에 그쳤다.
무룡의 노도박안 역시 천산자의 판관필에 쉽게 막혔다. 무공 자체는 비교가 무의미하고, 무인으로서 무룡의 경지는 천산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천노. 자하동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아?"
무룡의 심장으로 향하던 판관필이 멈췄다.
- 작가의말
돌고 돌아 결국 다시 천노 손에 떨어졌습니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