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추흉
화무룡의 말대로 건망증이 심한 천수천안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물건을 보관했다. 자신을 속박하던 사슬에서 벗어난 사마귀는 어렵지 않게 감롱의 열쇠를 찾아 화무룡을 꺼냈다.
"이제 뭐 할까?"
오살공을 잃었지만, 사마귀는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오살공은 강한 위력으로 사마귀를 강한 무인으로 만들었지만, 동시에 사마귀의 몸과 마음에 큰 짐이었다.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구나."
감롱에 갇힌 바람에 화무룡은 사마귀의 변화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감롱에서 나온 지금, 사마귀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절절히 느껴졌다.
"경지는 서넛 올랐고, 무위는 훨씬 많이 올랐다."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고 올라왔다. 평소라면 억지로 참았겠지만, 이젠 형제나 다름없이 여기는 화무룡과 단둘이 있는 공간이란 생각에 사마귀는 자신이 이룬 성취를 자랑하기로 했다.
사마귀의 왼손에서 하얀 불꽃이 타오르고 오른손에서 파란 눈꽃이 춤췄다. 놀랍게도 사마귀의 염천공 성취는 사마월이 인피요괴들과 싸울 때 동귀어진을 염두에 두고 펼쳤던 것보다 경지가 더 높았다.
내공의 깊이가 크게 차이 나는 바람에 위력은 감히 비교할 바가 되지 않지만, 경지는 확실히 몇 단계 앞섰다.
"이걸 고산종敲山鐘의 수법으로 동시에 적중하면."
사마귀의 손에서 날아간 불과 얼음의 기운이 감롱을 때렸다. 쇠사슬보다 훨씬 강한 법보인 감롱이 사마귀가 날린 기운에 단번에 찌그러졌다.
불의 기운이 진동할 때 약해지는 틈을 얼음의 기운으로 메꾸고 얼음의 기운이 약해지는 틈을 불의 기운이 메꾸면서 들인 기운과 비교해 놀랍도록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현했다.
"펼치는 게 어려워?"
"내겐 쉽지. 오살공 때문에 염천공을 가장 많이 수련했고, 천산옹 체면 때문에 빙천공을 그다음으로 열심히 수련했다. 그리고 가끔 오살공이 자거나 하면 나 스스로 싸워야 하는데, 수련 시간이 부족한 걸 고려해 고산종의 수법 하나만 죽어라 익혔다."
사마월과 사마영과 달리, 사마귀는 배운 무공의 종류가 적었다. 그러나 여섯 살에 염천공에 입문할 정도의 재능을 고작 세 무공에만 쏟은 덕분에 그 깊이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여기 뭐 있는지 잘 살펴나 볼까?"
화무룡은 화진악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던 상대가 마중구문의 하수인임을 이젠 안다. 비록 화진악과 부자의 연을 공식적으로 끊었지만, 화씨 가문에 대해 어느 정도 자부심은 있었다.
그런데 화산파 장문을 역임한 자기 가문이 마중구문의 일원도 아니고, 그 하수인에게 머리나 조아리는 존재였다는 게 영 자존심이 상했다.
"네가 좀 걱정인데?"
오살공을 잃기 전에도 진심으로 싸우면 화무룡이 필패다. 그때보다 훨씬 강해진 사마귀는 화무룡의 무력이 걱정되었다.
"아깝긴 하지만, 나도 봉인을 풀어야지."
화무룡이 해혈법解穴法으로 자신의 혈도를 풀었다. 무공 성취를 단기간에 급히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결혈법結穴法으로 묶어둔 혈도들이 풀리자, 운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화무룡의 몸에 자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설마, 자하신공?"
"정확히는 자하신공 일 단계를 기초로 해서 절검문주가 새로 만든 무공이다.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위로 뻗는 게 아니라 가지를 늘이는 방식이라고 하더구나."
무룡이 익힌 자하신공은 혈도를 늘려 운기 경로를 점점 길게 만든다. 그래야만 일기관통을 이룬 후에 순양공에 입문할 수 있다.
화무룡이 익힌 건 절검문주가 변형한 거로, 아무리 익혀도 자하신공으로 끝나서 여동빈이 익힌 순양공에 절대 이를 수 없다.
무인으로선 당연히 화무룡의 자하신공이 낫다. 입문이 더 쉽고 위력도 훨씬 강하며 마지막 단계인 구 단계에 이르는 데 걸리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짧다.
"어느 정도 수준이지?"
"총 구 단계 중 칠 단계 정도 된다. 이 년 정도 더 버티면 팔 단계에 이를 수 있는데, 당장 목숨이 위태하니 아쉽지만 풀어야지."
금세 염천공에 적응한 사마귀와 달리 화무룡은 반나절 운기해서 자하신공을 안정시켰다. 꾸준한 수련으로 올린 경지가 아니기에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힘으로 해결하는 건 마지막 수단으로 두고, 일단 머리를 쓰자."
"아무래도 여긴 방비가 허술할 거야. 우리 얼굴 모르는 자도 많고. 그러니까 괜히 얼굴 바꾸지 말고 옷만 갈아입자."
화무룡과 사마귀는 동시에 한쪽 벽에 걸린 푸른 도포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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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굴 가장 깊은 곳에 우환이 생긴 걸 모르는 천수천안은 빠르게 날아 부유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저건 뭐지?"
나무로 만든 허술한 마차였다. 훅 불면 날아갈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천수천안의 눈에 무척이나 허름해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법보도 아닌 것이 허공을 둥실둥실 날고 있었다. 끄는 말도 드는 사람도 없이 마차가 허공을 나는 광경은 수천 년을 산 천수천안에게도 조금 놀라운 일이었다.
'무공으로 되는 일인가?'
무룡은 칠신도록의 수법으로 마차를 허공에 띄우고 움직였다.
무인들이 보기엔 술사의 법술처럼 보이고, 술사들이 보기엔 무인의 무공처럼 보이는 신기한 재주였다. 이는 칠신도록이 법술에서 무공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수법은 무공에 가깝지만, 보이는 모습은 법술에 가깝다.
무룡 역시 천수천안을 발견했고, 한눈에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죽인다.'
비록 초면이지만, 무룡은 천수천안을 죽이고 싶었다.
마음이 정해지자 생각이 움직이고, 생각이 움직이자 살기가 생겨 천수천안을 속박했다. 좋은 기분으로 부유도로 향하던 천수천안으로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찮은 놈이."
천수천안도 굳이 왜 자신을 적대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추향을 잡은 다음 영결 계약의 줄을 통해 오행수를 찾으면 모든 게 끝난다.
영생의 진을 만들어 추향을 가둔 다음, 기운을 뽑는 진과 연동하면 세상이 망할 때까지 추향과 오행수 둘 다 살려둘 수 있다.
이것만 해 놓으면 모든 게 끝이다. 태상노군이나 통천교주가 돌아와도 돌릴 수 없다. 그러니 인간치고는 강하나 눈에 차지도 않는 하찮은 놈의 도발이 궁금할 리 없다.
"제길."
작은 방심과 집중력 부족은 큰 참상을 불렀다. 무룡이 던진 독을 돌려주려던 천수천안은 팔을 통째로 버려야 했다.
"절지節肢?"
인피요괴 중 뱀은 자신의 몸을 끊어 독을 피하려 했으나 결국 독에 죽었다. 이는 뱀의 몸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독과 달리 자하괴독은 존재를 말살하는 형식이어서 몸의 일부를 버린다고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천수천안은 달랐다. 지네는 백족충으로도 불리고, 백절百節로도 불린다. 몸이 수많은 마디로 되었는데, 천수천안은 마디마다 독립적인 존재다.
즉, 천수천안은 천 개의 목숨을 지녔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구나 버린 목숨은 수련과 음식 섭취를 통해 보충할 수 있으니 불사의 존재로 봐도 무방하다.
독과 접촉하자마자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움을 재빨리 인정한 천수천안은 팔 하나를 버리는 거로 목숨을 부지했다.
조금만 느렸으면 최소 수십 마디를 버렸을지도 모를 강하면서도 빠른 독이었다.
"네놈이구나."
천수천안은 단번에 무룡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고작 날지도 못해 마차를 빌려 움직이는 놈이 어찌 그런 흉험한 걸 품었을까?"
천수천안은 위기감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비록 천수천안이 무룡을 어찌할 방법이 없지만, 마찬가지로 무룡도 천수천안을 죽일 수 없다.
독이 가까이 못 오게 막고, 설사 뚫리더라도 마디 한두 개 버리면 된다. 무룡이 부리는 독의 기운이 한정되었기에 결국에 먼저 지치는 건 상대다.
"난 무언독왕이라고 한다. 넌 누구지?"
"난 다보도인의 관문 제자 천수천안이다. 젠장."
오살공을 품은 사마귀와 대화할 때도 그랬지만, 천수천안은 자신보다 격이 높은 상대가 묻는 말에 반드시 대답해야 하고, 대답에 거짓을 섞지 못한다.
'이러다 다 털리겠다.'
천수천안은 재빨리 몸을 돌려 도망쳤다. 사마귀는 오살공을 뽑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접촉해야 했고, 질문 수준이 낮아서 딱히 걱정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무룡은 아는 게 많아 자칫 중요한 기밀이 누설될 수 있다. 더구나 생포한 추향을 명해로 데려다가 죽음에 몰기 위해 움직이고 있기에 속이 켕겼다.
"놈, 서라."
안타깝게도 무룡은 천수천안의 사정을 모른다. 그저 상대가 자기 독이 두려워 도망치는 거로 여겨 쫓기만 했다.
"안 선다."
천수천안은 무룡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며 도망쳤다.
만약 천수천안이 법보를 타고 움직였다면 무룡을 금세 떨궜을 것이다. 어설픈 외관과 달리 아주 심혈을 기울여 비율을 정한 마차지만, 천수천안의 법보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천수천안은 그저 법술로 나는 중이어서 무룡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마차를 파괴하자.'
천수천안의 말마따나 무룡은 마차가 있어야만 지금처럼 날 수 있다. 바다에서 그저 수영하는 것보다 널빤지 같은 게 있으면 훨씬 편하듯이, 독 때문에 다룰 수 있는 기운이 한정되고 운기 역시 원활치 않은 무룡에게 마차는 바다에 뜬 배와 같은 역할이다.
마차를 파괴하면 무룡은 속도가 느려질 거고 오래 날지도 못한다.
그런데 천수천안이 날린 파벽술破壁術이 마차 근처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존재를 말살하는 자하괴독이 법술 자체를 흡수해 버린 것이다.
차라리 바위 따위를 던졌으면 마차를 파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천수천안은 술사답게 법술로 해결할 생각만 했다.
그래서 몇 번 법술을 날리고는 도망치는 데 전념했다.
갑자기 편지를 남기고 사라진 추향을 찾으러 나섰던 무룡 역시 딸을 찾기보단 천수천안을 쫓는 데 집중했다.
'죽이면 좋고, 아니어도 놈의 근거지를 찾으면 큰 성과다.'
'미치겠다. 이대로 현녀문에 갈 수도 없고.'
무룡을 죽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추격을 막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룡을 데리고 본거지로 가거나 현녀문으로 갈 수도 없고.
막막하던 차에 천수천안은 마음을 정했다.
'태산파로 데려가자. 어차피 버릴 놈들인데 날 대신해 저놈을 잠시라도 막아주면 좋지.'
- 작가의말
결말을 정해놓고 글을 쓰니까 자꾸 길이 좁아지네요. 모든 캐릭터가 결말을 완성하기 위해 움직이니 흐름이 빨라지기만 합니다. 완급조절을 좀 더 익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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