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침투
"조금 서둘러야겠다."
"이유가 궁금하오."
추향이 해가 서쪽에서 뜬다고 하면 아침에 서산을 바라보는 석군과 달리, 손청우는 매사에 질문을 던졌다.
추향이 안 미더워서가 아니라 어떤 성향인지 알아내서 화산 장문인이 되라고 꼬드길 속셈 때문이었다.
"불괴검왕이 아빠야. 처음부터 아빠가 나섰다는 건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뜻이야."
"불괴검왕이 진정 사형이오?"
손청우는 무룡의 무공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사람을 죽인 것으로 가끔 눈물도 흘리는 무룡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 목숨을 풀 베듯 한 불괴검왕이라고 믿기 힘들었을 뿐이다.
"그거랑 이건 다르지. 그땐 제정신이 아닌 상황에 무고한 자들도 죽였잖아. 지금은 제 발로 죽으려고 찾아온 자들이고."
무룡의 마음이 여리다곤 해도 우유부단한 성격은 아니다. 꼭 죽여야 할 놈을 살려둬서 후환을 남기는 일이 멍청함은 명확히 안다.
남궁세가의 무고한 시녀와 시종 그리고 내막도 모르고 자리에 왔다가 죽은 정의연의 무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죽어야 할 놈들을 죽인 것엔 추호의 후회도 없었다.
"근데 내외공을 똑같이 높은 수준으로 익힐 수 있습니까?"
내공을 단전에 모아두는 내공. 내공을 전신 혈도로 분산하는 외공.
내공과 외공을 익힘에 있어 단전의 역할은 상반된다. 하나는 모아야 하고 하나는 나눠줘야 하니까.
물론, 하나의 혈도가 무조건 한 가지 성질만 띠라는 법은 없다. 내공을 익히는 자들도 정체되면 외공에 눈을 돌리고, 외공을 익히는 자들도 내공심법을 필수적으로 수련한다.
단, 둘을 비슷한 경지로 익히는 건 힘들다. 어디까지나 남은 하나를 보조적인 역할로 익힐 뿐이다.
"무공은 틀에 박힌 재주야."
무공과 법술은 상반된다. 무공의 내공심법은 운기 경로가 명확히 그리고 엄격히 규정되었고 초식 역시 변화의 여지가 적다.
반대로 법술은 정해진 게 없다. 법력이라는 내공보다 훨씬 자유롭고 신비하며 다양한 기운을 부려 법칙을 비틀고 역류하는 재주로, 기본을 이해한 후 법술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만든 법술을 다른 사람은 펼치기 어렵다. 그래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법술을 창안한 자들에게 대가大家나 법존法尊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반대로 법술은 틀을 만드는 재주야."
술사의 세계는 작고 폐쇄적이다. 서로 교류가 활발하지 않기에 현재 법술은 정해진 게 적은 상황에서 누구나 펼칠 수 있는 법술을 찾는 단계다.
"현재 법술은 공격적인 부분에서 무공에 한참 못 미친다고 여겨지지. 그건 공격용 법술이 드물기 때문이야. 숨어서 지내야 했던 술사들은 공격용 법술보다는 보호나 은신 그리고 도주를 위한 법술만 개발했거든."
"그게 사백의 무공이랑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추향은 한숨을 풀 내쉬고 말을 이었다. 이쯤 말하면 대부분 사람은 바로 알아듣는데, 석군은 추향이 생각하는 대부분 사람이 아니었다.
"무공이 틀을 깼을 땐 법술처럼 신비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고, 법술이 틀을 제대로 만들 땐 무공처럼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무룡은 천환서고에서 수많은 책을 읽어 의식과 무의식에 새겼다. 덕분에 무공의 틀을 깨어 무인들은 이해하기 힘든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틀은 어떻게 깨는 겁니까?"
"어우, 짜증 나."
추향은 석군과 나누는 대화가 너무 답답했다.
"내가 어제 말이야. 어떤 강아지를 봤는데, 날개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늘을 나느냐고 나한테 묻더라. 그래서 내가 뭐라 했는지 알아?"
"강아지가 말을 합니까?"
"가서 날개부터 만들라고 했어. 이 멍청한 놈."
"석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으면 어서 감사드려야지."
손청우의 말에 석군은 반사적으로 포권하고 머리를 숙였다.
"추 소저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석군은 멍청이가 아니다. 석람이 하도 뛰어나서 머리를 쓰는 습관을 안 들였을 뿐이지, 글자도 많이 익히고 글도 꽤 읽었다.
"우선 무공의 틀이 뭐고, 어떻고, 어디까지인지 알아야 깰 수 있겠군요."
"그렇지. 나처럼 무공과 법술 모두 높은 경지로 익히는 건 타고나야 해."
괴물을 잠재울 기운을 피에 타고난 추씨 가문의 여인들은 법술을 익히기에 적합하다. 반대로 무룡은 이해력이 조금 부족하긴 해도 육체적으론 무공을 익히기에 참 적합하다. 단전이 약한 걸 빼면.
다행히 추영이 어려서부터 당백호의 단전을 추궁과혈했고, 월영심법 덕분에 추향도 그 혜택을 단단히 보았다. 그래서 무공에만 자질이 있는 당백호와 달리 추향은 법술과 무공 어느 하나 빠진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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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도문은 겉으로 보기엔 볼품이 별로 없었다.
중원에 진출한 당시 급하게 구매한 커다란 장원의 담장은 굳이 고수가 아니어도 쉽게 넘을 높이였다. 장원 안에 횃불을 들고 순찰을 하는 자들이 있긴 하지만, 오합지졸답게 하품에 잡담에 제멋대로였다.
"기관하고 진법이 있다."
단, 장원 중앙에 있는 삼 층 건물만 달랐다. 세 개의 진법과 일곱 개 기관으로 물 샐 틈 없이 둘러싸인 건물은 나는 새도 출입이 어려웠다.
"둘이 소란을 좀 피워야겠다."
추향은 둘에게 소란을 피울 지점과 시각 그리고 언제 어디까지 물러날지를 자세히 정해줬다.
"시간을 꼭 엄수해야 해. 아니면 그냥 소란으로 끝날 수 있어."
손청우와 석군이 각자 해야 할 일을 세 번 연속 정확히 구술한 후에야 추향이 출발했다.
"사부, 추 소저의 은신술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느새 장원에 스며든 추향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거로 보인다. 내공도 나 못지않지만, 기운을 다루는 능력은 진짜 넘볼 수 없구나."
"제자는 언제 저런 경지에 이를까요?"
"언제인지는 생각 말고, 꼭 이르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하여라."
약속한 시각이 되자 손청우와 석군은 추향의 지시대로 각자 이동하여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먼저 석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자 백 냥이다."
"제길."
원래는 멋지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고 호기롭게 도전장을 내밀려 했다. 그런데 목청을 가다듬느라 잠깐 지체한 사이 석군의 얼굴을 알아본 패도문 무인들이 선수를 쳤다.
강호에 자신의 이름 두 자를 각인하려던 석군의 계획은 아주 간단히 물거품이 되었다.
석군의 목에 걸린 현상금에 눈이 먼 순찰대는 신호를 보내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추 소저 말대로다.'
석군은 벽파검법을 펼쳐 순찰조를 상대했다. 매화검법과 비교해 한참 모자란 무공이라고 여겨 형만 익혀두고 수련도 게을리했는데 여기까지 오는 중에 추향의 가르침을 통해 약한 무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검극 역시 많은 사람이 거들떠보지 않는 낮은 수준의 검법을 익혀 중원 최고의 검객이 되었다. 벽파검법 역시 초식이 극단적이고 검의 역시 살인에 맞춰졌지만, 생사를 가르는 선 하나를 아슬아슬 타는 검법답게 무진장 많은 것을 욱여넣었다.
어떻게든 살려는 발버둥으로 온갖 검법을 어설프게 흉내 냈는데, 수준 높은 검객에겐 오히려 자신에게 맞춰 주무를 여지가 큰 검법이다.
추향 덕분에 벽파검법을 자신에게 알맞게 변화한 석군은, 오랜 기간 수련하여 손에 익은 매화검법보다 벽파검법이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애송인데 검법 수준이 높다."
화산 제자 대부분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벽파검법으로 노혼이 화산제일검 소리를 들은 건, 자신에게 꼭 알맞게 벽파검법을 다듬어 익힌 덕분이었다.
검법의 창시자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 같지만, 사실 당연하지 않다.
처음 만들 때 목표한 것과 다르게 검법을 변형하여 익히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애송이? 나만큼 큰 애송이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아직 내공 수련이 깊지 않은 석군은 입을 열어 말할 수 없었다. 이는 상대가 강해서가 아니라, 최근 높은 수준으로 익힌 벽파검법을 제대로 펼치려면 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르면 나아질 테지만, 현재 석군은 검법에 끌려다니는 다소 좋지 않은 상황에 있었다.
상대는 석군을 되도록 생포하려 했다. 예전에야 소식이 미리 독무곡에 전해지는 게 싫어서 여차하면 죽이려 했지만, 이젠 사로잡아서 어디까지 아는지 캐묻는 게 맞다.
덕분에 근래 벽파검법으로 무공이 일취월장한 석군은 전혀 위기가 없이 잘 버텼다.
"으악!"
장원 반대편에서 커다란 비명이 터졌다.
'사부가 움직이셨다.'
평소 점잖은 모습과 달리 검만 뽑으면 흉신악살이 따로 없는 손청우다.
사실 손청우의 손속이나 행세가 강호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아니다. 단, 평소 모습과 너무 큰 괴리를 보이는 바람에 똑같은 행위도 다른 사람보다 훨씬 과격하게 느껴져서 광서생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여기가 양공佯功이고 저쪽이 주력이다."
그제야 순찰조는 석군이 미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제길, 들켰네. 그럼 이만."
석군은 계획대로 뒤로 물러났다. 추향의 예측대로 고작 다섯 명이 석군을 쫓아 나왔고 남은 자들은 또 다른 침투자를 경계해 자리를 뜨지 않았다.
'요쯤에서 살수를 펼치라고 했던가?'
싸움으로 흥분한 바람에 원래 계획이 뭐였던지 살짝 헷갈렸다.
'맞아.'
확신을 얻자 석군의 검법이 변했다. 연환에 치중했던 벽파검법이 일격필살로 바뀌었다.
갑자기 달라진 기세에 바로 반응하지 못한 무사들은 목숨 두 개를 대가로 내놨다.
둘의 목을 베어 피를 낸 석군은 바로 몸을 돌려 빠르게 도망쳤다.
"제자 왔구나."
약속 지점엔 벌써 피투성이인 손청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청우 주변엔 패도문 무인이 분명한 주검이 서른 개 넘게 널브러져 있었다.
석군의 뒤를 쫓던 세 무인은 손청우 주변의 주검을 확인하고 급히 신형을 멈췄다.
"늦었네."
손청우의 검이 번쩍였다. 몇 장의 거리를 두고 뭐 하는 짓인지 몰라 궁금해하던 세 사내는 검기에 심장을 내주고 속절없이 쓰러졌다.
- 작가의말
추향 : 귀한 물건 있으면 혼자 꿀꺽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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