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출각
"난 쫄리는데."
다람쥐 사내와 곰 사내 사이에 도포를 입고 납작한 모자를 쓴 사내가 있었다. 다른 둘과 달리 그냥 사람처럼 생긴 도사 사내는 손에 나무를 깎아 만든 짧은 검을 들었다.
길이는 날이 조금 긴 비수 크기밖에 안 되지만, 모양은 확실히 검이다. 물론, 이름도 벽회검闢晦劍이기에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감이 안 좋아?"
도사 차림의 사내가 바로 다람쥐와 곰 사내가 말하던 서열 사위다.
"응. 죽을 거 같아."
곰 사내와 다람쥐 사내는 무룡의 뒤를 따르는 독 안개를 가늠했다. 독 안개만 해도 두려운데 안개가 감춘 존재가 뿜는 기세가 훨씬 대단했다.
"치고 빠지자. 그러면 서열 삼위를 네게 줄게."
곰 사내가 선심 쓰듯이 말했다. 도사 사내가 바로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내가 서열 삼위라고 치자. 그런데 네가 날 이겨. 그럼 넌 서열 이위야?"
"그건 아니지."
"그러니까 난 서열 삼위가 될 수 없어. 그런데 내가 서열 오위라고 치자. 그런데 내가 쟬 이겨. 그럼 쟤는 서열 5위 이하여야 해. 말이 돼?"
"그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난 서열 사위인 거야."
서로 삼위를 차지하고 싶은 곰과 다람쥐와 달리 도사는 사위 자리에 꽤 만족했다. 일이위와 거리가 아득하고 육위와도 실력 차이가 크다. 그래서 셋이 서열 다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도사가 사위 자리를 자처하며 남은 둘이 종일 티격태격해야 했다.
"네가 저놈을 멈춰. 그럼 내가 창으로 심장을 찌를게."
다람쥐 사내의 제안에 도사가 혹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건드리면 자신이 죽을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원래 어려운 일을 성취하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 보상이 큰 법이다.
잘하면 십 년 동안 정체해있던 실력을 한 단계 상승할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좋아, 해보자. 그런데 그냥 뒤의 저 괴물한테 죽게 하면 안 될까?"
유혹이 꽤 컸으나 께름직함이 여전하여 도사는 좀 더 안전한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곰 사내가 반대했다.
"놈을 죽인 다음 배를 갈라 구슬을 꺼내야 한다. 구슬을 꺼내기 전에 놈이 괴물에게 먹히면 큰일이라고 했다."
"여길 지나면 정의연과 마교가 싸우는 곳까지 싸울 만한 곳이 없어."
무룡과 괴물의 거리가 꽤 가깝기에 싸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었다. 그나마 산등성이가 있어 괴물이 넘어오는 데 시간이 꽤 걸리는 이곳이 아니면 웬만한 공격은 아예 안 먹히는 무룡을 죽일 기회가 없다고 봐야 한다.
"좋아. 내가 놈을 멈추면 네가 공격해. 그리고 괴물이 보이면 바로 떠난다."
세 사내가 합의를 본 순간 무룡과 괴물의 모습이 모두 사라졌다. 작은 산등성이가 둘의 모습을 가린 것이다.
얼마 안 기다려 무룡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을 뒤에 달고도 산책하듯이 편한 기색인 무룡을 본 도사가 혀를 찼다.
"죽이기엔 아까운 놈이군."
"세상에 죽어 안 아까운 사람도 있어?"
말을 마친 다람쥐 사내가 창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아 허리춤에 갖다 댔다.
빨리 시작하라는 재촉을 알아들은 도사는 벽회검을 들어 무룡을 가리키며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사람의 몸을 땅에 고정하는 정신술定身術이다. 무공과 법술을 결합한 거로, 천근추의 무공을 자신이 아닌 남한테 펼치는 방식이다.
"가라!"
슬렁슬렁 달리던 무룡의 몸이 갑자기 멈춘 것과 도사가 외친 것과 다람쥐 사내가 튀어 나간 건 거의 동시였다.
"황룡도천黃龍搗天!"
다람쥐 사내와 창이 하나가 되어 황룡으로 화해 무룡의 심장을 노렸다.
대전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무룡은 기습에 대비하는 대신 발을 땅에서 떼려고 다리에 힘을 줬다. 자신을 멈춘 자의 기습보다는 뒤에서 쫓는 이룡을 더 염두에 둔 탓이다.
그 작은 생각의 차이가 커다란 간격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창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만약 몸이 멈추자마자 기습에 대비했다면 양손으로 심장 부위를 보호했을 것이고 상체를 흔들어 상대가 심장 부위를 직격하지 못하게 방해했을 것이다.
후회는 언제나 늦은 법. 마환기공 덕분에 가슴이 뚫리진 않았으나 충격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심장에 강한 충격을 받은 무룡의 몸이 경직됐다.
마환기공 자체는 극성으로 익혔지만, 무룡이 무공 전반에 대한 이해나 경지 등이 부족하여 그 효과를 제대로 끄집어내지 못한 탓이다. 그럼에도 천하에서 다섯에 드는 고수의 창을 맞고 목숨을 부지한 걸 보면 마환기공은 정말 대단한 외공이었다.
"은하사지銀河瀉地."
다람쥐 사내의 목소리에 여유가 묻어났다. 마치 하늘의 은하수가 폭포처럼 쏟아지듯, 하얀 빛무리로 화한 다람쥐 사내의 창이 높은 공중에서 무룡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무룡은 눈동자를 굴려 높은 지대에 자리를 잡고 짧은 검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분노가 치솟았다.
계혼과 덕구가 무기의 위치를 삼 리 정도 옮긴다는 얘기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갑자기 산사태가 일어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계획이 조금 틀어졌을 뿐이지 망친 건 아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반나절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지금 예상치도 못한 방해를 받자 평정심이 무너졌다. 자신한테 실망하거나 상황에 절망하진 않았으나, 애써 유지하던 평온한 상태는 여지없이 깨졌다.
산중지왕. 산군.
모두 범을 일컫는 말이다. 그냥 먹이를 탐하는 맹수가 아니라 산 하나를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는 짐승이다. 싸울 때와 피할 때를 아는 현명한 짐승이며 도전자를 죽이는 대신 기세로 쫓아내는 대범한 짐승이다.
단전의 존재를 알기 전에 인간들이 그 기세를 흉내 내려다 만들어진 것이 호세도다. 제대로 익히면 내공을 전혀 수련하지 않은 자도 기세로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무룡의 분노가 호세도를 타고 살기가 되었다. 거기에 괴물이 다가온다는 긴박감과 반드시 살아서 놈을 목적지까지 데려가야 하고, 결국 놈을 처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겹쳐 무룡의 원영元嬰이 몸을 떠났다.
분노와 살기와 절박한 심정이 원영과 함께 호세도를 타고 도사를 덮쳤다. 정신술을 펼치던 도사는 원영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칠공으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원영은 자신 안의 가장 순수한 자신이다. 원영이 몸을 떠난 무룡의 몸은 억지로 세운 짚단처럼 쉽게 쓰러졌다.
덕분에 정수리를 노리던 창이 무룡의 가슴을 한 번 더 찌르게 되었다.
몸 밖으로 나가 도사를 죽인 원영은 강한 힘에 끌려 바로 무룡의 몸으로 돌아갔다. 짧은 기간 멈췄던 무룡의 모든 신체 기능이 회복했다.
덕분에 다람쥐 사내의 창은 무룡의 가슴을 채 삼 푼도 못 뚫고 멈췄다.
무룡이 호세도로 도사를 죽인 걸 모르는 다람쥐 사내는 가슴을 뚫고 들어가는 창에 기뻐했다. 금세 마환기공이 돌아와서 창의 전진을 방해할 것을 몰랐던 다람쥐 사내는 엎드린 김에 절이라고 창을 잡은 손에 힘과 내공을 잔뜩 보냈다.
그런데 예상대로 창이 계속 무룡의 몸을 헤집지 못하자 파탄을 드러냈다. 예상과 다른 진행에 바로 반응해야 할 머리가 잠깐 멈췄다.
무룡은 신속히 일어서며 일섬을 펼쳤다. 무룡의 가슴에 삼 푼 정도 박힌 창이 힘을 전달해 자루를 꽉 잡은 다람쥐 사내를 뒤로 밀었다.
"놔!"
당사자보다 방관자가 더 잘 보이는 법이다. 도사 사내의 생사를 확인하던 곰 사내가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다람쥐 사내는 예상과 다른 진행에 잠시 판단 능력을 상실했다. 머리가 혼란하여 창을 놓고 피하기보단 오히려 무룡의 가슴에 창을 제대로 박으려고 힘을 실었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무룡에게 밀린 다람쥐 사내의 등이 벽에 닿았다. 그리고 더 밀려날 공간이 사라진 사내의 가슴에 창대가 박혔다.
창날을 가슴에 박은 무룡이 훨씬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마환기공으로 튼튼한 신체 덕분에 무룡이 이겼다.
흑의인들의 추격을 받으며 일섬으로 상대를 나무나 바위에 부딪히게 하여 죽인 경험이 있은 덕분에 무룡은 임기응변으로 다람쥐 사내까지 처단했다.
"제길."
곰 사내는 황급히 도사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경공을 펼쳐 도망쳤다. 어느새 이룡을 감싼 독 안개가 산등성이를 완전히 덮었다.
무룡도 덜덜 떨리는 팔에 힘을 줘 가슴에 박힌 창을 어렵게 뽑아냈다.
심장을 직격당한 것도 크고, 비록 정수리는 피했으나 가슴에 박힌 창도 무룡에게 큰 피해를 줬다. 창날이 박힌 거야 별문제 없지만, 창에 실린 기운의 대부분이 무룡의 몸속에 침투한 게 큰일이었다.
"너보단 늦게 죽을 거다."
무룡은 발로 다람쥐 사내의 가슴을 밟고 창을 뽑아냈다. 그리고 천하의 창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쉽게 드는 대단한 무기를 지팡이처럼 짚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었다.
'이럴 때 누가 좀 도와주지.'
그러나 웬만한 사람은 괴물의 존재감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도망치거나 다릿심이 풀려 쓰러질 것이다.
그때 순양공이 움직여 다친 혈도들을 어루만졌다. 마환기공도 다친 혈도의 주변 혈도들에 적절히 기운을 분배하는 것으로 회복을 도왔다. 거칠기만 한 벽파공은 알아서 자제했다.
무룡의 몸이 느리지만 확실히 회복했다.
'종남파의 양선술養仙術은 아무리 큰 부상도 반나절이면 말끔하게 치료한다던데.'
창을 지팡이 삼아 짚고 열심히 걷던 무룡은 창을 뒤로 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그러곤 한 살배기 아기처럼 엉금엉금 기었다.
다리는 여전히 떨리나 팔은 회복했기에 기는 게 훨씬 빠르다는 판단이었고, 무룡의 판단은 정확했다.
점점 가까워져 오던 독 안개의 비린내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천하에도 유명한 다람쥐 사내의 천강창天鋼槍이 독 안개에 삭고 괴물의 몸에 깔려 바스러졌다. 마찬가지로 독 안개에 녹아 핏물 한 줌 못 남긴 다람쥐 사내가 알았으면 황천길 내내 슬피 울었을 일이다.
그러나 무룡은 자신이 방금 버린 창이 은자 천 냥으로도 못 바꾸는 대단한 무기임을 몰랐다. 원체 담백한 성격에다가 당금한 거대한 위협과 이뤄야 할 지난한 목표 때문에 창의 가치를 고민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나쁜 새끼. 그간 천만 명도 넘은 사람을 죽였으면 천벌을 받아 염라전에나 갈 일이지."
느리게나마 내상이 회복되며 무룡도 여유를 찾았다. 방금 흔들린 마음을 다잡으려고 평소 안 하던 농을 괴물에게 던졌다.
무룡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이룡의 기세가 한 층 흉포해졌다.
- 작가의말
도를 아는 사람이 감을 무시하다니. 그러니 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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