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교장로
"작은 오해 때문에 결례를 범했습니다."
줄곧 무룡을 적이라고 우기던 사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다른 사내들도 머리를 눅눅한 땅에 박은 채 무룡의 처분만 기다렸다.
'큰 오해를 했으면 사람을 열 번도 죽였겠다.'
무룡이 속으로만 툴툴댔다.
"살다 보면 오해도 받고 그러는 거 아니겠소. 난 그대들을 나무라지 않소."
"독성毒聖께선 무슨 일로 오독교를 방문하셨습니까?"
'빨리도 물어본다.'
"독을 더 배우고 싶어서 알아보니 여기가 최고라고 해서 찾아왔소."
"가당치 않습니다. 찾아주셔서 저희가 영광입니다. 허락하신다면 앞에서 길을 열겠습니다."
"부탁하오."
이들은 오독진의 독무에도 끄떡없는 무룡을 전설의 독성이라고 오해했다. 사실 무룡은 내공을 움직일 수 없어 독공을 익히는 것조차 어려운 몸이다.
"내공은 일부러 봉인하신 겁니까?"
"다음 경지로 넘어가는 과도기요."
'몸에 내공 대신 독이 흐른다는 독룡유毒龍遊의 경지가 분명하다.'
처음에 무조건 무룡을 적으로 몰아가던 사내는 금세 태세를 바꿔 무조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내가 찾아온 게 때가 아닌가 보오?"
"아닙니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괜찮다면 무슨 사정이 있는지 듣고 싶소."
"제가 지위가 낮아서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습니다. 일부러 독성을 기만하려는 건 아니니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오독교 제자들은 늪지에서 걷는 데도 별 기척을 내지 않았다. 무공은 평범한 대신 내공은 다 깊은 편이고 경공이 뛰어났다.
'독이 사람을 가리는 게 아니니 투독投毒(독을 던지다)하고 바로 도망쳐야겠구나.'
무룡은 오독교 제자들을 보며 독공에 필요한 조건을 유추했다.
"그런데 독성께선 몸에 독을 품지 않으셨나 봅니다."
잠시 쉬는 사이에 무룡의 발목에 독침을 꽂은 전갈을 지켜보며 덕구가 질문했다. 독물은 본능적으로 강자를 알아보기에 무룡의 몸에 독이 있다면 물지 않았을 것이다.
"살리면 약이고 죽이면 독이오. 검으로 베면 검이 독이고 돌멩이로 때리면 돌멩이가 독이오."
벽파검법 구결의 변형이다.
그러나 무룡을 독성이라고 굳게 믿는 사내는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대대손손 가훈으로 전하겠습니다."
어느새 독주머니를 비운 전갈이 뭔가 잘못됐음을 알고 도망쳤다.
"한낱 미물도 독성을 알아보고 경외하는데 아까는 정말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무룡은 사내가 전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극진한 공경을 받으며 삼십 리 길을 걸어 오독교에 도착했다. 늪지 가운데 바위로 덮인 곳이 있고 거기에 집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땅에서 반 장 거리를 띄운 나무로 된 집들 가운데 유일하게 돌로 쌓은 건물이 있었다.
하늘이 내린 재주를 품은 장인의 솜씨인지 세월이 빚은 건지, 주변과 아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석조 건물이었다.
"교주, 교주. 덕구가 독성을 모셨습니다."
무룡은 덕구 말고 다른 사내한테 질문했다.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가고 집들이 비어 있소?"
"늪지에 자라는 과일과 독초를 채취하러 갔습니다. 일부는 독사 잡으러 갔고요."
곧 가을이어서 뱀들이 독이 바짝 오른 때다. 오독교는 뱀을 잡아 독을 뺀 다음 방생한다. 독을 뽑으면 높은 확률로 죽는 오공이나 반드시 죽는 벽호는 번식기가 지난 다음 잡는다. 흔해빠진 전갈과 섬여는 그저 한가할 때 잡아서 독을 뽑는다.
"덕구 이놈. 감히 교주한테 장난을 쳐?"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소녀가 건물에서 나와 호통쳤다. 아버지뻘인 덕구한테 함부로 말하는 걸 보면 교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분이 높은 시녀나 교주의 딸로 추측되었다.
"장난 아닙니다. 이분이 바로 만독불침을 이룬 독성입니다."
"만독불침? 난 아직 오독불침도 못 이뤘는데. 거짓말이지?"
"제가 언제 거짓말하는 걸 본 적 있습니까?"
"응. 매일 봤어."
말을 마친 소녀가 경공을 펼쳐 접근했다. 잠자코 둘이 하는 짓을 구경하고 있던 무룡은 갑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소녀 때문에 허둥댔다.
검을 잡았다면 모를까, 빈손인 상태에선 경공으로 몸을 가볍게 한 상대의 속도를 따를 수 없었다.
'권각술도 익혀야겠다.'
너무 쉽게 상대에게 명치를 내줬다.
"독성? 내 오독장도 못 막는데 무슨 독성이야?"
아까 이들이 오독진을 펼쳐 공격한 것보다 독성이 몇 배는 강했다. 다행히 방금 한 번 경험했기에 마환기공이 잘 대처한 덕분에 입을 열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대들이 말하는 독성은 도대체 어떤 존재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룡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것이다. 심성이 악독한 건지 그냥 철이 없는 건지.'
독무곡만 해도 속이고 죽이고 뺏는 데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들이 많다. 무룡 덕분에 독무곡에 소속감을 느끼며 나쁜 짓을 자제하지만, 나쁜 일이어서 자제하는 게 아니라 독무곡의 명예를 위해 자제하는 것이다.
먼저 독무곡을 경험했기에 무룡은 오독교의 두 번에 걸친 공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혼자 중얼거리던 소녀가 모습을 감췄다. 비록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무룡은 상대가 경공을 펼쳐 자신의 뒤로 갔음을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룡의 명문혈로부터 정체 모를 독이 체내에 쏟아져 들어왔다.
'현재 내가內家 중수법엔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상태구나.'
소녀가 펼친 게 내가 중수법은 아니지만, 내공을 타격이 아닌 독을 상대 체내에 주입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에선 비슷했다.
"흥. 내가 직접 만든 화봉장花蜂掌도 버티면 인정하지."
일반적인 독은 퍼지려는 성질이 강하다. 인간의 몸에 들어가면 우선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용이한 곳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화봉장의 독은 달랐다. 흩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로 강하게 뭉쳐 상대를 죽이려 했다.
'다행이다.'
면면부절 덕분에 숨이 멎지 않았다. 아니었으면 마환기공이 채 독을 다 없애기 전에 숨이 막혀 죽었을지도 모른다.
"진짜 독성인가?"
어느새 무룡의 앞으로 이동한 소녀가 낯빛이 그대로인 무룡을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독에 대해 아는 건 빙산의 일각에도 못 미치는구나.'
평온한 기색과 달리 무룡은 죽을 맛이다. 뭉치는 힘이 강한 독 상대로 무룡이 제멋대로 자환신공이라고 이름을 지은 내공도 외공도 아닌 괴이한 심법이 고전했다.
'내가 개입할 순 없을까?'
단전이 없어 내공을 움직이지 못하는 무룡이다. 반면 단전이 있어도 내공을 쌓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는 감각과 의지의 문제다. 기와 혈도를 느끼는 감각과 실체를 가늠하기 힘든 기를 움직일 의지를 동시에 갖춰야만 내공에 입문할 수 있다.
무룡은 단전이 없을 뿐 감각도 의지도 있다. 직접적인 개입은 어렵더라도 자신을 살리려고 고전하는 자환신공에게 길 정도는 알려줄 수 있다.
'만경벽파로 깨부순 다음 벽파연연으로 흩어놓고 다음 도도부절로 하나씩 제거하면 된다. 암도흉용으로 서로 돕지 못하게 방해도 하고.'
말은 쉽지만, 실제로 검을 들어 펼치라고 하면 백 번 죽었다가 깨도 불가능한 일이다.
노도박안 다음으로 위력이 강한 만경벽파는 초식이 단순하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검을 휘두르면 된다.
벽파연연은 상대가 막든 피하든 흘리든 상관 않고 공격을 이어가는 초식이다. 이 초식은 살상이 목적이 아니라 확실한 기회를 잡아 살초를 펼치기까지 기세를 이어가는 용도다.
도도부절은 얼핏 벽파연연과 비슷한 것 같지만, 벽파연연은 공격을 이어가는 연환에 중심을 두고 도도부절은 작은 상처라도 내려고 공격하는 데 무게를 뒀다. 비슷한 형태지만 도도부절은 살상을 목적으로 한다.
암도흉용은 초식 속에 숨긴 초식이다. 벽파연연을 펼치다가 갑자기 암도흉용으로 전환해 필살의 공격을 펼칠 수도 있고 암도흉용으로 상대를 견제한 다음 다른 살초를 펼칠 수도 있다.
이렇듯 제각각 성질이 다른 데다가 이름은 하나여도 무수한 응용이 존재하는 복잡한 초식 네 개를 동시에 펼치는 건 노혼도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기는 실재하나 무형의 존재다. 인간이 육체와 공간과 시간의 제한으로 절대 못 하는 일도 기는 해낼 수 있다.
무룡의 의지에 반응한 자환신공이 독을 공격하는 방식을 바꿨다. 예전에 알아서 술술 딸려오는 착한 독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바위를 부수는 망치처럼 강한 힘으로 단단히 뭉친 독을 때렸다.
때리고 흩어놓고, 떨어져나온 작은 조각을 해치우고. 그사이 다시 뭉친 독을 또 때리고.
'비약을 먹기 전이었으면 내가 죽었다.'
근원을 보호하며 몸을 죽였다 살리는 용도로 만든 비약 덕분에 무룡의 몸은 독에 저항하는 능력이 강했다.
"내가 당한 독 중에서 두 번째로 대단하군."
무룡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벽파검법을 결합하지 않았다면 자칫 죽었을지도 모를 독을 장법으로 펼친 소녀가 대단해 보였다.
"제일 강한 독은 뭔데?"
"홍안섬여를 비롯해 세 개 독물에 수백 가지 독과 약을 섞어서 꼬박 일 년 동안 제작한 독이오."
"홍안섬여! 한 마리 키우고 싶다."
"교주. 내가 독성이라고 했지 않았습니까? 어서 사과하세요."
소녀가 사과를 종용하는 덕구에게 혀를 쑥 내밀어 골려준 후 무룡을 향해 활짝 웃었다.
"교주의 권한으로 널 호교장로 직위에 임명한다."
"교주. 그건 제게 주기로 한 자리 아닙니까?"
"그럼 너도 독성 되든가."
말을 마친 소녀가 폴짝폴짝 뛰어서 나온 집으로 돌아갔다.
"아 참. 난 난화봉蘭花蜂이라고 해. 호교장로는 이름이 뭐야?"
"그냥 독성이라고 부르면 되오."
그렇게 무룡은 팔자에도 없는 호교장로가 되어 오독교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덕구라는 이름의 충실한 졸개도 얻었다.
- 작가의말
송구스럽게도 제목이 독왕 무룡전인데 아직 주인공이 독공에 입문하지 않았고 독에 관한 얘기도 지엽적으로만 나왔습니다.
일단 독성이라는 호칭과 독룡유의 경지를 가볍게 던집니다. 독공에 관한 설정은 추후 차근차근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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