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검백검
무룡은 사슬에 묶인 채 감옥을 방불케 하는 컴컴한 방에서 종일 수련했다. 그러나 노인과 여아의 바람과 달리 무룡은 자하신공이 아닌 벽파공을 운기했다.
태생적으로 단전이 약한 무룡이다. 다른 혈도들은 노혼의 추궁과혈로 강해졌지만 단전만은 아니다. 그래도 노혼의 추측처럼 다른 혈도들이 강해지며 운기 속도가 빨라진 덕분에 단전이 자극받아 빠르게 단련되고 있다.
아직 어설픈 자하신공보다는 경지가 높고 운기도 빠른 벽파공을 수련하는 게 단전을 단련하는 나은 방식이다.
게다가 평생 복수를 못 할 가능성도 있으니 죽기 전에 노혼이 가르친 벽파공을 십 성까지 익혀야 할 책임을 느끼기도 했다.
"놈, 수련은 열심히 하는데 왜 진전이 없느냐!"
무룡이 눈을 뜨자 화가 잔뜩 난 얼굴을 한 천노가 채찍을 휘둘렀다. 이미 성한 곳을 찾기 어려운 무룡의 몸에 시뻘건 자국이 하나 추가됐다.
"열심히 한다고 진전을 보고 채찍으로 때린다고 효과를 보면 천하에 고수 아닌 사람이 없겠소."
무룡은 채찍에 맞은 게 다른 사람인 것처럼 태평하게 말했다. 많이 맞는다고 덜 아픈 건 아니지만, 예상할 수 있는 고통은 참는 게 가능하다.
"네놈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정해진 기한까지 일 단계를 못 이루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줄 알아라."
노인은 상처투성이인 무룡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곧 붉은 얼굴이 올 차례인데.'
경극에서 두 사람이 싸울 때 누가 좋은 사람인지 판단하는 건 매우 쉽다. 흰 얼굴은 악역이고 붉은 얼굴은 정의의 편이며 검은 얼굴은 중립이다.
사람을 어르고 달랠 때 하나는 홍검을 맡고 하나는 백검을 맡는다. 백검이 악독하게 군 다음 홍검이 나타나 살살 달래는 거로 속없는 놈을 등쳐먹는 게 강호의 사기꾼들이다.
과연, 추영秋瑛이 금창약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미안해. 나이가 들면 느긋하다고 하는데 사실 반대야. 앞길이 창창한 젊은 사람이야 급할 게 없지만, 천노 나이가 되면 한 끼 먹으면 한 끼 줄잖아."
깨끗한 천에 금창약을 묻혀 상처에 바른 추영이 입김을 호호 불었다. 무룡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코웃음을 쳤다.
약을 다 발라준 추영은 깨끗한 천을 따뜻한 물에 적셔 무룡의 몸을 닦아줬다.
"조금 쉬어. 곧 밥 가져다줄게."
물을 정확히 맞춰서 센 불에 잘 익힌 밥, 갓 땄는지 생생한 나물을 기름과 소금에 무친 반찬, 작은 민물고기를 잔뜩 넣고 소금 간만 해서 끓인 국, 꿩으로 보이는 큼직한 새를 푹 삶아 깨와 버무린 요리.
무룡은 생나무를 깎아 만든 젓가락을 들고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부었다. 차 한 잔 끓일 시간도 안 되어 꽤 많은 양의 식사를 깨끗이 해치운 무룡은 맑은 물로 입을 가신 후 곧 수련을 시작했다.
이들이 말하는 자하동의 비밀을 무룡은 이미 알고 있다. 서쪽 벽의 첫 글자부터 시작해 양쪽 벽의 글자를 조합하면 구결이 된다는 것, 일 단계를 이룬 후 십 성 공력을 운기하면 몸에 노을이 생기고, 그 빛으로 비추면 벽에 새로운 글자가 나타난다는 것.
자하신공의 마지막 단계가 아홉 번째라는 것. 벽파공을 십 성까지 이루면 칠 단계까지 채 이 년도 안 걸린다는 것.
저들이 알려고 하지 않는 것까지 무룡은 다 안다.
'자하동의 독을 너희가 버틸 수 있을까?'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대략적인 방향은 잡았다. 자하동에 들어가 둘이 환각에 걸린 다음 밖으로 나가 자하단을 찾고 저들이 굶어 죽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린 다음 다시 돌아가 자하단을 먹으며 수련한다.
"소문과 달리 자질이 평범한가?"
작은 구멍으로 무룡이 수련하는지 감시하던 천노가 말했다. 지금까지 지켜본 무룡은 누구보다 열심히 그리고 진심으로 수련에 임했다. 그리고 성난 파도처럼 빠르게 흐르는 내공은 먼 거리에서도 느껴져 절대 수련하는 척 흉내만 내는 게 아니었다.
"쟤 말대로 자하신공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무공이면 신공으로 불리지도 않았겠지."
"자하동의 비밀을 푸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릴지 몰라. 한시가 급하다."
추영의 말대로 노인이 훨씬 다급했다.
"내가 보기엔 단전이 약한 것 같던데."
추영의 말에 천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화진악이 좋은 약을 많이 먹였는지 다른 혈도는 아주 발달했는데 단전은 형편없다."
"천노라면 단전에 도움이 되는 약도 만들 수 있잖아."
천노가 우물쭈물하며 바로 대답을 못 했다.
"내가 도망칠까 봐? 평생 도망자로 살고 싶진 않아. 정 마음이 안 놓이면 진법을 치고 가면 되잖아. 다 이해하니까 걱정하지 마."
"좋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나 역시 목숨을 걸었다는 걸 잊지 마."
"나간 김에 옷 좀 사 와. 키가 자라서 원래 옷이 안 맞아."
며칠이 지나 천노가 돌아왔다. 추영에겐 알록달록 이쁜 옷들을 선물했고 무룡에겐 냄새가 역겨운 비린 환약을 먹였다.
"제길. 내 제자한테도 먹인 적 없는 귀한 약을 네놈한테 주다니."
자하신공을 익혔는지 여부를 확인할 때보다 훨씬 안타까워하는 걸 보니 귀한 약재가 많이 들어간 모양이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무룡은 약이 입에 들어오자 전혀 주저하지 않고 꿀꺽 삼켰다. 그러곤 바로 벽파공을 운기해 내공을 돌렸다.
세찬 내공의 흐름에 빠르게 발작한 기운이 무룡의 단전을 강하게 단련했다.
"지독한 놈."
대부분 무인의 내공 성취가 느린 건 단전의 성장이 느려서다.
단전을 단련하는 일이 쉬우면 고수가 아닌 사람이 없다. 단전을 빨리 깨우는 편법과 온갖 약이 넘치는 마교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는 단양환丹陽丸은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큰 고통을 준다.
단양환을 복용하면 극심한 복통으로 며칠씩 드러눕는 게 일반적인데 무룡은 비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운기를 이어갔다.
'빨리 강해져서 복수해야 한다.'
운기한다고 약효가 더 강해지는 건 아니지만, 내공의 흐름이 약 기운을 자극한 바람에 낭비가 전혀 없었다. 원래는 약 기운의 칠 할 정도는 대소변과 함께 배설되는데 고통을 견딘 무룡은 십 할 기운을 모두 단전에 썼다.
그러나 무룡이라고 무쇠로 빚은 사람이 아니었다. 집중력이 허락하는 데까지 내공을 돌린 무룡은 결국 못 버티고 그대로 기절했다.
먹고 자는 시간마저 아껴서 수련에 쏟은 무룡은 기절한 김에 그간 못 한 수면을 보충하기라도 하듯이 푹 잤다.
"어, 깼다."
생글생글 웃는 추영을 무시하고 무룡은 배부터 긁었다. 약 기운으로 단전이 급하게 성장하는 바람에 몹시 가려웠다.
그러나 실제로 가려운 게 아니기에 아무리 긁어도 시원하지 않았다.
"화산엔 여제자가 많아?"
"모른다."
"천노가 옷 몇 벌 사 왔거든. 어느 옷이 이쁜지 몰라서 그래. 품평 좀 부탁해도 될까?"
추영은 대답도 안 기다리고 사라졌다. 한참 뒤에 노란 옷을 입은 추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때?"
"잘 어울려."
"잠시만."
사라진 추영이 이번엔 시원한 푸른색 궁장을 입고 나타났다.
"이건?"
"꽤 어울려."
말도 없이 사라진 추영이 빨간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건 좀 별론데."
"이게 젤 이쁘구나."
무룡은 발끈하는 마음이 생겼다.
"왜 나랑 반대로 가는데?"
"네 입이 네 마음이랑 반대로 갔으니까."
무룡의 얼굴이 빨개졌다. 사실 붉은 옷을 입은 추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그저 과장된 표현이라고 여겼는데, 옷 색깔과 모양이 바뀌는 거로 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보니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똥 쌀 거니까 어서 나가."
무룡의 심술에 추영이 깔깔 웃으며 떠났다. 기분이 잡친 무룡은 수련 대신 그냥 드러누워 잡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자꾸 사부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갑갑했다.
"저기, 거기 있어?"
무룡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거기 말이야. 추영, 혹시 있어?"
진짜 떠났는지 대답이 없었다.
'뭐지? 내가 논다고 채찍을 휘둘러야 할 천노도 없고.'
늘 자신을 감시하던 둘이 사라지자 무룡은 오히려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에잇, 수련이나 하자."
무룡은 정신을 하나로 모은 후 벽파공을 수련했다. 수련에 집중해서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단전의 가려움이 사라졌다. 수련을 멈추면 또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것 같아 무룡은 필사적으로 집중했다.
'곧 십 성을 이루겠다.'
그러나 무룡의 예상과 달리 벽파공의 마지막 한 걸음은 천 리 길보다 멀었다. 손만 내밀면 닿을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작은 진전조차 보이지 않자 무룡의 인내심이 점점 바닥났다.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면 천노가 채찍질을 멈춘 것이다. 그리고 천노가 드물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무룡은 단전을 가렵게 하는 약을 먹었고, 추영은 무룡 앞에서 옷을 자랑했다.
"무룡. 이 옷은 어때?"
"그저 그래."
"이것도 이쁜가 보네. 천노한테 같은 옷 한 벌 더 사달라고 해야겠다."
"아니. 진심으로 별로야."
"진심 이쁘다고?"
"네가 입으니까 이쁘게 보이는 거지. 옷 자체는 정말 별로야."
추영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기 실언을 깨달은 무룡도 얼굴을 굳혔다.
'정신 차려. 사부님이 억울하게 죽어 눈도 못 감고 계실 텐데 뭐 하는 짓이야.'
화가 난 무룡은 자기 혀를 세게 깨물었다. 혀끝이 터지며 심장을 에이는 고통이 몰려왔다.
그래도 마음은 오히려 편해졌다.
"칭찬 고마워. 오늘 식사는 특별히 맛있게 차려줄게."
추영이 깔깔 웃으며 떠났다.
무룡은 왠지 화산비검의 결승에서 화무룡한테 진 거로 결론 났을 때보다 더 화가 치밀었다.
'자하동에 가기만 해봐.'
먹고 자고 싸는 시간을 빼고 수련에만 몰두했다. 그리던 어느 날 깊은 잠에 빠져 꿈도 없이 푹 골았다.
'내일부터 자하신공을 수련해야겠구나.'
- 작가의말
홍검 - 관우 등
백검 - 조조 화웅 등
흑검 - 포청천 등
아이폰을 쓰는 자는 악역이 아니다와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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