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천선사
감옥에 들어간 당백호는 바로 비천공을 펼쳐 천장에 붙었다. 배로 벽에 붙는 벽호공과 달리 등으로 천장에 붙는 특이한 경공으로, 사마영이 혈교에서 사용했던 바로 그 경공이다.
물론, 당백호의 비천공은 사마영의 것과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수준이 낮았다. 그러나 어두컴컴하고 딱히 경계하는 자가 없는 감옥이기에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
'다들 젊고 잘생긴 남자다.'
당백호는 빠르게 감옥 안 상황을 파악했다.
'창살이 그냥 나무인 걸 봐선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거나 경지가 낮은 자들이 분명하다.'
감옥에 쇠창살을 쓰는 건 황궁이나 가능한 일이다. 죄수를 가두는 창살 대부분은 굵은 나무로 만든다.
그러나 나무에 조금씩 흠을 내서 끊으면 탈출이 쉽기에 바닷물에 담그고 송진을 바르는 등 여러 조치를 한다.
그런데 이 감옥은 대문이 활짝 열렸고 사람들을 나눠 가둔 창살도 겨우 손가락 서너 개 굵기의 생나무였다.
'아까 본 여자들의 노리개인가?'
그러고 보니 감옥에 들어오기까지 장원에서 별다른 인기척을 느낀 적 없다. 들킬까 봐 감각을 잔뜩 곤두세웠기에 일부러 기척을 숨긴 게 아니라면 장원에 아무도 없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당백호는 천장에 등을 꽉 붙이고 천천히 움직였다. 등이 천장에 쓸리면서 바스락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눈길을 주는 자 하나 없었다.
'눈이 다들 이상하다.'
눈빛이 몽한약에 취한 듯 무기력하고 흐리멍덩하다. 그런데 얼굴만큼은 살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빛나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땅굴을 파서 만든 감옥은 지상에 보이는 장원보다 훨씬 컸다. 당백호는 안전하게 숨을 곳을 찾으려고 구석구석 살피다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눈이 딱 마주쳤다.
뚫어지라 당백호를 살피던 노인이 손짓으로 신호를 줬다. 신호를 이해한 당백호는 비천공으로 감옥에 접근한 후, 일엽장신一葉藏身의 재주를 펼쳐 창살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고양이 요괸가?"
백발노인이 농을 던졌다.
"아니요."
그러나 당백호는 진심으로 답했다. 괜히 추향이 맨날 어린 주제에 꼬장꼬장하다고 핀잔을 주는 게 아니었다.
"거참."
농으로 분위기를 풀려던 노인이 입맛을 다셨다.
"누구시오?"
"그러는 그대는 누군가?"
"길을 가다가 미친 여자 일곱에게 쫓겨 여기로 숨은 사람이오."
"난 일곱 여자한테 잡혀 여기 갇힌 사람일세."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에 대화에 별 진전이 없었다.
"도주할 방법을 아시오?"
"그건 모르는데, 도주하는 시기는 알지."
"알려주면 데리고 나가겠소."
"처음 보는 사람 말을 어찌 믿고."
당백호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짐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 경은 짐의 뜻을 받들라."
백발노인이 킥킥 웃었다.
"제국이 망한 게 언젠데."
"가문이 망한다고 그 가문 사람이 다 죽나?"
"제국이 망했으면 황제는 황제가 아니지."
"이젠 황제가 아니라고 내 명예가 사라지는가?"
당백호의 말엔 천근이 넘은 무게가 실렸다. 백발노인도 그런 당백호의 기세에 눌려 더는 키득거리지 않았다.
"그래. 널 믿는다고 치자. 그런데 일곱 마녀의 손에서 어떻게 도주할 생각인데?"
"일행이 있다. 거기까지 가면 일곱이 아니라 백이 와도 걱정할 바가 아니다."
'저게 미친놈이 아니라면 진짜 제국의 마지막 황제란 뜻인데. 그렇다면 호위가 한둘은 아니겠지. 마녀들을 이기는 건 어려워도 내 한 몸 빼는 건 문제없다.'
최악의 경우 당백호와 그 일행을 미끼로 던지고 도주하면 된다. 결심이 선 노인은 바로 고개를 끄덕여 당백호에게 말했다.
"내 뒤에 와서 숨어라. 때가 되면 내가 말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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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에게 마녀로 불린 일곱 여인은 당백호를 찾으려고 작지 않은 지역을 누볐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다.
이들은 추적술 따위를 익힌 적도 없기에 무작정 의심이 가는 곳을 뒤지는 무식한 방법을 썼다. 만약 누구라도 도주의 흔적을 발견해 장원 쪽으로 간 걸 알아차렸으면 바로 범위를 좁혀 당백호를 어떻게든 찾아냈을 것이다.
일견 다행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대부분 고수는 무공만 익히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여 추적술 따위는 잘 배우지 않는다.
"아쉽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탄로 날 걸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세력이 아미파와 마교인데, 둘 다 먼 거리에 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하도 험해 대규모로 인원을 동원하기 어렵다. 일반인보다 참을성이 강하다지만, 먹고 마셔야 하는 건 고수도 똑같으니까.
그래서 이들은 그저 맑은 기운이 넘치는 당백호를 놓쳤다는 아쉬움뿐이었다.
이 역시 당백호에게 큰 호재로 작용했다. 만약 저들이 아쉬움이 컸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원을 뒤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노인의 뒤에 모습을 숨긴 당백호를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장원에 돌아간 일곱 여인은 각자 방에 들어가 운기했다. 같은 무공을 익혔지만, 경지에 따라 운기가 끝나는 시각이 달랐다.
먼저 운기를 끝낸 여인은 감옥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골라 방으로 돌아간 후 교합을 통해 기운을 뽑아냈다.
강호에선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을 사술로 치부하며 하찮게 여기는데, 사실 이는 도가의 정통 수련법이다.
단, 보통은 음양이 조화를 이뤄 서로한테 이득이 되는 수련을 일방적으로 좋고 상대에겐 해가 되는 방식으로 펼치기에 사술로 여겨도 할 말이 없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일곱 여인의 소희환환공素姬歡歡功 역시 사술이다. 자신의 것은 안 주고 상대 기운만 빼앗는 무공이니까.
그러나 상대 기운을 뺏은 다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남은 건 돌려준다는 부분에서 강호의 잡스러운 채양보음의 무공보다 훨씬 낫다.
"지금이야."
일곱 여인의 움직임은 거의 기척이 없다. 백발노인이 감옥 가장 깊은 곳에 갇혔기에 그 기척을 느끼는 건 어렵다.
그러나 여인들에게 끌려나가는 사내들은 무공을 익히지도 않았고, 더구나 여인들에게 원기에 가까운 기운을 지속하여 뺏겼기에 사지가 무력하고 발걸음이 무겁다.
덕분에 무공을 거의 잃은 노인도 여인들이 드나드는 기척을 알 수 있었다.
"업혀라."
'멍청한 건가 자신감이 넘치는 건가?'
일곱 마녀한테 쫓겼다는 걸 보면 무공이 아주 대단하진 않을 거다. 그런데 선뜻 처음 보는 사람을 등에 업겠다고 나서는 걸 보면 또 자신감이 대단하다.
뒤통수에는 뇌호혈을 비롯해 내공을 싣지 않고 힘만 실어 때려도 치명타가 되는 혈도가 여럿 있다. 혈도를 정확히 때리는 것도 물론 힘들지만, 비슷하게 때려도 어지러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도주할 시간이 아깝기에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당백호의 등에 업혔다. 당백호는 바로 경공을 펼쳐 감옥 입구를 향해 달렸다.
'이놈 뭐지?'
감옥 입구를 벗어난 당백호는 바로 새로운 경공을 펼쳤다. 산월공을 연속 세 번 펼쳐 농밀한 숲에 들어간 당백호는 또 경공을 바꿨다.
오밀조밀하고 불규칙적으로 자란 나무 사이를 평지 걷든 자연스럽게 누비며 장원과 멀어진 다음, 초상비의 경공을 펼쳐 나뭇가지 높은 곳을 밟으며 날 듯이 달렸다.
"일행은?"
당백호가 멈추자 노인은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일행과 합류하지 못하면 언제든 마녀들한테 따라잡힐 거고, 그러면 짐밖에 안 되는 자신을 당백호가 버릴 것이다.
당백호가 일행과 합류해야만 그나마 노인이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 살고도 더 살고 싶은 건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부터 당백호는 하대를 서슴지 않았다.
"세상에 전해야 할 말이 있네."
"꼭 전해야 할 말이면 우선 나한테 전하는 게 순서 아닌가?"
"널 어떻게 믿고?"
당백호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다음 다시 움직였다. 당백호를 기다리다 못한 추향은 암호를 남기고 떠났다. 심술이 났는지 암호를 조금 어렵게 남겨 해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어디로 가는 건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말을 마친 당백호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백발노인이 말해주진 않았지만, 말투에서 다급함을 느낀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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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 어디 갔다가 짐 하나 달고 왔어?"
"장공주, 체통을 지키시오."
당백호의 말에 추향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고, 이 철부지 폐하야. 함부로 신분 노출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진짜 용혈인가?"
"진짜면 어쩌고 가짜면 어쩔 건데?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어? 질문은 내가 하고 넌 대답만 하는 거야. 알겠지?"
추향의 말에 백발노인은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 여자인가 남자인가? 얼굴이나 몸은 남자인데 장공주라고 부르지 않나. 정작 기운도 여자이고."
"기운? 기운으로 성별을 판단할 수 있다고?"
"남자와 여자는 혈도가 몇 개 다르다. 위치가 비슷해서 같은 이름으로 부르긴 하는데, 성질은 확실히 다르지. 그걸 알면 기운의 흐름으로만 성별을 판단할 수 있다."
"제길. 고수한테는 이게 쓸모없다는 말이네?"
추향은 얼굴에 쓴 가면을 뜯어 배낭에 넣었다. 답답했던 난화봉 역시 좋아하며 가면을 뜯어냈다.
"아니, 당신은 마교의 성녀?"
추영의 얼굴을 본 백발노인이 체통도 잊고 뾰족한 소리를 질렀다.
"아니지. 내가 본 성녀라면 이미 환갑이 지났을 텐데. 딸 아니면 손녀인가?"
"맞아. 내가 바로 제국의 장공주이자 마교의 성녀다. 여긴 내 쌍둥이 동생으로 제국의 황제이자 독무곡의 소곡주이지. 그리고 여긴 오독교 교주이자 마교 소교주의 짝을 꿈꾸는 난화봉이라고 해."
백발노인은 추향의 소개를 곱씹느라 조금 시간을 허비했다.
"얼굴을 보니 안 믿을 수도 없고. 하여튼 마녀들과 한패가 아닌 건 확실히 알겠군."
백발노인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정중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난 아미검문의 태상장로 통천선사通天禪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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