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독승천
"좀 더 기다리자."
그림자들이 당장 예두를 제단에 올리려는 천수천안을 말렸다.
"서둘러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지만, 서두르지 않아서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 만약 그자가 그 흉험한 독을 천계로 보내는 데 실패하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줄어들기만 한다."
"예전 같지 않지만, 혈육은 피로 서로를 느낄 수 있다. 혹여 자기 딸이 위험에 처한 걸 알고 흉독을 승천시키는 데 실패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가 생긴다."
무룡이 자하괴독을 천계로 보내는 데 성공한다고 가정하면 기다리는 게 맞다. 자하괴독이 사라지면 하계에 더는 위협이 남지 않는다.
그러나 무룡이 혹여 실패한다면 차라리 지금 시작하는 게 낫다. 자하괴독이 세상을 파괴하기 전에 혼돈을 부르면 자하괴독을 처리할 가능성이 작게나마 생긴다.
아주 안전하게 가느냐 아니면 모험하느냐의 선택인데, 솔직히 무룡이 자하괴독을 천계로 보내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지극히 낮기에 별 차이가 없다.
그저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갈릴 뿐이다.
"좋다. 그러나 기다리다가 일이 틀어지면 너희 중 셋 정도가 존재를 바쳐 인간을 말살하는 시간을 단축해야 할 것이다."
천수천안의 말에 그림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뜩이나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일인데 굳이 추향과 영적으로 연결된 예두를 제단에 올리는 것으로 무룡을 자극해 성공 활률을 더 낮출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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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룡은 환생환과 해독주를 삼켰다.
환생환은 이름만 환생일 뿐, 사실은 재생력을 극대화하는 비약이다. 원신만 무사하면 몸을 거의 무한하게 재생할 수 있기에 환생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해독주 역시 이름과 부합하지 않았다. 독을 없애거나 밀어내는 게 아니라 존재를 고정하는 물건이었다.
존재를 온전하게 고정해 어떤 기운도 쉽사리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실상 독과 아무런 관련도 없었다.
비록 둘 다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지만, 무룡에겐 오히려 호재였다. 특히 존재를 고정하는 해독주는 마환기공의 부족한 부분을 확실히 메꿔 무룡을 거의 불사의 존재로 만들었다.
"해신海神께서 노하셨습니다."
이들도 딱히 부유도의 진정한 정체를 몰라 해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무슨 일이냐?"
"머리 세 개를 빼시고 노한 소리를 토하고 계십니다."
현녀문 문주는 근질거리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노한 게 아니라 두려움에 찬 비명이라는 걸 해신을 진짜 신처럼 떠받드는 제자들한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천수천안 이 더러운 자식.'
현녀문 문주는 그제야 천수천안의 수작에 놀아났음을 알았다. 해신이 두려워할 정도라면 무룡이 품은 건 예사 존재가 아니다.
그런 흉물을 여기에 풀어버리면 해신은 제치고라도 자칫 현녀문이 멸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무룡을 제지할 수도 없다. 현녀문의 무력으로 무룡을 제지할 수 있는지는 둘째 치고, 천수천안과 한 약속을 어기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무룡만큼은 아니지만, 천수천안의 지네독 역시 살상력이 대단하다.
- 격이 부족하다.
자하괴독이 무룡에게 말했다.
'길을 알려줘.'
정작 자하괴독을 떠나보내려고 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했다. 그게 자하괴독이 떠남과 함께 막대한 힘을 잃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무룡도 구분이 힘들었다.
- 전신도를 펼쳐라.
'어떻게 펼치는데?'
- 벽력문에서 익혔던 것들을 떠올려라.
일섬을 수련하기 위해 벽력문의 기초가 되는 무공을 모조리 익히거나 외워뒀다.
- 최초로 칠신도록을 완성한 인간이 바로 벽력문의 전신이다. 전신도가 따로 전해지지 않은 건 남은 여섯을 대성하여 자신만의 전신도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실마리는 벽력문의 기초 무공에 있다.
무룡은 마음을 깊이 가라앉혀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어갔다.
'점과 점 사이엔 가장 빠른 길, 가장 강한 길, 가장 피하기 힘든 길이 있다.'
빠른 길은 피하기 어렵지만 막기 쉽다. 강한 길은 막기 어렵지만 피하기 쉽다. 피하기 힘든 길은 힘이 부족하여 적중해도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
고수는 상대에 따라 셋을 적절히 조합하는 거로 쉽게 승리를 따낸다. 그리고 절정에 이른 고수는 셋 모두를 겸비한 경로를 찾아내는 수준의 무인이다.
'벽력문은 가장 빠르고 강하며 피하기 힘든 길 대신 힘을 찾았다.'
벼락은 가장 빠르고 가장 강하며 가장 피하기 힘든 힘이다. 인간의 몸으로 품기 어려운 힘이어서 성취를 내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수준에만 이르면 경지와 비교해 어마어마한 위력을 낸다.
'벽력문은 벼락의 힘을 소환하여 사용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조사로 모시는 전신과 같은 무인이 나오지 않았다.'
무룡은 벼락의 힘을 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마침 무룡의 몸엔 벼락의 힘을 강하게 품은 물건이 있다.
바로 전신뇌였다.
무룡은 자모침을 깨워 품은 전신뇌의 힘을 풀어버렸다. 인간의 몸으론 감당하기 힘든 파괴와 정화의 힘이 무룡의 안을 가득 채웠다.
'하나도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
무룡은 억지로 벼락의 힘을 순환했다. 너무 강한 힘에 칠신도록의 여섯 재주는 미처 못 펼치고 순양공과 벽파공에 의지했다.
순양공으로 기운을 돌리고 벽파공이 가속했다. 마환기공은 해독주의 도움을 받아 무룡의 몸이 파괴되지 않게 보호했다.
시간이 흐르며 순양공이 점점 많은 기운을 움직이자 무룡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무룡은 아주 조금 생긴 여유를 낭비하지 않고 응비도를 펼쳤다.
응비도로 기운을 뭉치자 순양공이 더 쉽게 기운을 움직였고, 덕분에 여유가 커졌다. 커진 여유로 무룡은 와행도를 펼쳤다.
순양공은 기운을 뭉치려면 빠르게 순환해야 한다. 와행도와 서로 충돌하는 셈인데, 응비도로 기운을 강하게 뭉친 덕분에 굳이 순양공이 필요치 않았다. 무룡은 순양공과 벽파공을 멈추고 맹룡도를 펼쳤다.
벼락의 힘에 타서 소멸한 무룡의 몸이 빠르게 재생했다. 재생하는 과정에 처음엔 무룡이 품은 기운을 소모했고, 무룡의 기운이 소진되자 벼락의 기운을 썼다.
그렇게 벼락의 기운이 조금씩 줄고, 무룡이 다루는 기운은 조금씩 늘었다. 결국 균형이 맞춰져서 무룡의 몸이 더는 소멸하지 않았다.
- 목숨을 부지했으니 한발 더 나아가라.
자하괴독의 말이 무룡의 멍하던 머리를 깨웠다.
'전신도를 펼치려면 남은 여섯 모두 펼쳐야 한다고 했지.'
허신도와 호세도 그리고 경탄도를 펼쳐 외부 기운을 받아들였다. 벼락의 기운을 감당하기도 힘들었기에 내부에만 집중했는데, 이젠 여섯 운기법을 동시에 펼쳐도 괜찮다.
'칠신도록은 벼락의 힘과 궁합이 가장 좋구나.'
본신의 기운은 초반에 몸을 재생하느라 다 소모했다. 독은 자하괴독이 승천에 성공하기 위해 독룡담에 꽉 잡아뒀다.
무룡의 몸엔 순수한 벼락의 기운만 남았고, 벼락의 기운을 잔뜩 품은 무룡은 외부에서도 벼락의 기운만 흡수했다.
그런데 훨씬 풍부한 다른 기운을 수련할 때보다 모이는 속도가 몇 배 빨랐다.
- 네게 시간이 얼마 없으니 내가 하나 알려주마.
자하괴독이 말했다.
- 무극과 태극이 서로 전환하는 데 벼락이 쓰인다.
거대한 깨달음이 무룡의 뇌리를 강타했다.
자하괴독의 조언은 장기적으로 보면 무룡에게 해가 된다. 미처 알지 못했던 걸 자하괴독이 강제로 무룡의 머리에 새겼기에 높은 벽이 되어 언젠간 무룡의 앞길을 막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부족한 건 자하괴독이 아닌 무룡이다. 지금은 비록 벼락의 힘을 잘 통제하고 있지만, 경지도 격도 부족하여 언젠가 파탄이 나기 마련이다.
적절한 깨달음, 불괴에 가까운 육체, 써도 써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막대한 힘.
삼박자가 고루 맞춰지며 무룡의 격이 빠르게 올랐다. 예전엔 천환서고에서 읽은 지식이 무의식에 쌓여 무룡에게 부담이 됐는데, 격이 빠르게 오르면서 오히려 지식에 대한 갈증이 강하게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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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 해신께서 모습을 드러낸 채 북으로 유영합니다."
"명해로 가는 것이니 호들갑을 떨지 말아라."
자하괴독의 목표는 승천이다.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해신 역시 자하괴독이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음을 모르기에 그나마 목숨을 보전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는 명해로 헤엄쳤다.
"다른 때와 달리 유영 시간이 깁니다."
그제야 문주도 무룡에게 모두 쏟던 관심을 밖으로 돌렸다.
"큰일이구나. 명해의 결계에 큰 구멍이 났다. 이대로는 며칠 안에 결계가 모두 망가져 명해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어찌해야 합니까?"
현녀문의 제자들 역시 세상에 배척을 받기에 정기적으로 명해로 돌아가 시간을 보내며 회복해야 한다.
"그간 인간의 기운을 많이 흡수한 덕분에 간단한 결계로도 버틸 수 있다. 문제는 명해가 아니면 기운을 보충할 방법이 없다는 건데."
"혈교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혈교의 남명해 역시 북명해와 같은 기운을 품었습니다."
문주의 결단은 빨랐다.
"밀실에 가둔 여자를 풀어주고 우린 떠난다. 혈교로 가서 남명해로 가는 문을 찾는다."
수천 명 현녀문 제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운이 좋아 부유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면 최대한 물건을 챙겨야 한다.
수천 년 살면서 모은 재화와 귀한 물건이 가득해 수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문주. 밀실에 가봤는데 이런 것만 있었습니다."
"당했구나."
현녀문 문주는 이가 갈렸다. 추향 같은 애송이한테 농락당한 것도 분하지만, 천수천안의 계책에 꼼짝도 못 하고 속은 것이 몹시 원통했다.
'결국 속고 속아서 나만 손해 봤구나.'
추향에게 속은 건 그저 분한 것으로 끝나지만, 천수천안에게 속아서 보금자리를 잃게 됐다. 무룡에게 환생환과 해독주를 넘긴 것 역시 큰 손해다.
투자한 만큼 돌아오는 게 있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약속받은 보상은 겨우 법보 몇 개다. 그것도 목숨이 붙어야 천수천안한테서 받아낼 수 있다.
'언젠간 이 빚을 받아내고 말겠다.'
현녀문 문주는 전후 사정을 자세히 적어 서신으로 남긴 후 제자들과 함께 혈교 영역으로 움직였다. 빨리 남명해를 찾지 못하면 명해에 남은 자들처럼 그림자가 되거나 소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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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지만, 당분간 네 한계는 여기까지다.
무룡의 격은 본인조차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올랐다. 그런데 자하괴독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꽤 있었다.
- 내가 떠난 후 네 격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 수련하고 깨달음을 찾으면 별 어려움 없이 회복할 수 있으니 아쉬워 말아라.
'떠나기 섭섭한 눈친데?'
- 이제부터 내겐 가시밭길만 존재한다. 그리고 하계에선 불멸불사의 존재지만, 천계로 가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른 길을 알아볼 수도 있잖아.'
- 천명이란 그런 거다. 그래도 타고난 게 아니어서 그리 가혹하진 않구나.
자하괴독의 말투는 오래 알고 지낸 이웃집 사람 같았다.
- 가끔 네가 생각나면 밤하늘에 커다란 별을 띄우겠다.
산 채로 내장을 따이는 물고기의 기분이 이와 같을까. 형언하기 힘든 괴이한 느낌과 더불어 자하괴독이 무룡의 몸을 떠났다.
- 전신도를 펼쳐라.
자하괴독이 떠난다고 끝이 아니다. 천계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룡의 존재가 자하괴독으로부터 세상을, 세상으로부터 자하괴독을 보호해야 한다.
무룡은 구결 한 글자조차 모르는 전신도를 자연스럽게 펼쳤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벼락의 기운으로 결계를 만들어 자하괴독과 세상을 격리했다.
찰나와 같은 영원이, 영원과 같은 찰나가 흘렀다. 매 순간 집중했지만, 끝나고 나니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하괴독은 무사히 천계로 갔고, 밤하늘에 달처럼 밝은 별이 하나 커다랗게 떴다.
그리고 무룡의 곁엔 검 한 자루가 놓였다. 자하괴독과 함께 천계로 간 검룡이 남긴 껍데기였다.
'다 끝난 건가?'
자하괴독도 벼락의 힘도 사라졌다. 전신도 덕분에 기운이 빠르게 쌓이고 있지만, 기운의 양도 질도 전과 비교해 무척이나 부족했다.
그때, 까마귀가 나타났다.
"아이고, 속 터져. 추향이 위험하다."
- 작가의말
까마귀 : 어휴. 너 때문에 내가 속까지 시커멓게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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