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안섬여
홍안섬여는 머리가 총명한지 본능이 뛰어난지 함정을 잘 간파한다. 그러나 무룡이 미끼로 내놓은 투명 거미의 유혹조차 뿌리칠 수는 없었다.
무룡은 그간 상자에 작은 구멍을 내고 몇 번이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러나 처음 한두 번만 효과가 있고 그 뒤로는 별 쓸모가 없었다.
마환기공의 경지 상승에도 도움이 안 되고 전환한 내공도 혈도에 쌓이는 대신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래서 투명 거미를 미끼로 걸기로 했다.
투명 거미를 먹으러 온 홍안섬여는 머리만 내놓고 몸을 완전히 늪지에 묻은 무룡을 발견하지 못했다.
더구나 무룡이 그간의 노력으로 면면불식의 호흡을 회복했기에 기척도 전혀 없었다.
단전이 없는 주제에 숨을 오래 참으면 의심받을까 봐 걱정되지 않았다면 머리까지 늪지에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홍안섬여는 꽁무니에 달린 눈알을 데룩데룩 굴리며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점이 없자 혀를 쑥 내밀어 투명 거미가 갇힌 상자 속으로 집어넣었다.
홍안섬여의 혀에 감긴 투명 거미가 작은 구멍으로 쏙 빠져나왔다. 다리의 힘이 부족해 직접 비집고 나오진 못했으나 몸이 유연하여 홍안섬여의 도움으로 자유를 얻었다.
짧은 자유의 대가는 참혹했다. 상자를 벗어난 투명 거미는 홍안섬여의 입으로 들어가야 했다.
극독을 품은 투명 거미를 삼킨 홍안섬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무룡이 움직였다.
포식을 끝내고 경각심을 완전히 버린 홍안섬여는 그만 무룡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상자의 구멍으로 혀를 넣으려면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는 곳에 미리 손을 놓고 기다린 덕분이었다.
제자들이 호각을 불었다. 무룡의 손에 잡힌 홍안섬여가 입으로 독 안개를, 꽁무니로 독액을 뿜었다.
꽁무니로 뿜은 독액이 무룡의 장갑에 닿자 칙 소리와 함께 누런 김이 솟았다. 그리고 독액보다는 약하지만, 안개 역시 독성이 대단해 다른 제자들은 감히 무룡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잘했다."
가류가 드물게 칭찬을 뱉으며 홍안섬여를 가죽 주머니에 가뒀다. 그리고 해독단을 꺼내 자신이 하나 먹고 무룡에게 하나 먹였다.
무룡은 입안에 넣은 해독단을 바로 삼키지 않았다.
장갑을 녹이고 무룡의 피부에 닿은 독액은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그리고 무룡의 몸을 죽이려고 강하게 공격했다.
무룡은 한참 버티다가 현재 자신의 수준으론 어림도 없음을 확인하고 그제야 해독단을 삼켰다. 해독단의 도움을 받은 마환기공이 독에 저항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잠깐의 기간에 마환기공의 경지도 오르고 내공도 조금 쌓여 헛되지 않은 시도였다.
"그래. 네 소원을 말하거라."
홍안섬여를 얻은 가류는 기분이 엄청나게 좋았다. 무룡이 독무곡 곡주 자리를 달라고 해도 선뜻 내줄 생각이었다.
"사부의 의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무룡의 말은 가류와 모든 제자의 예상을 벗어났다.
"이유는 뭐냐?"
"사부님을 존경합니다. 염라대왕이 보낸 저승사자도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는 사람이 의원이고, 사부님은 그 의원의 정점에 있습니다. 저도 사부님처럼 생사를 주관하는 판관이 되고 싶습니다."
가류의 마음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가류의 입장에서 세상에 안 부러운 사람이 없다. 가문에서 쫓기거나 거지로 살다가 독무곡으로 온 제자들도 다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중에서 제일 부러운 게 무룡이었다.
가류가 본 사람 중에서 키가 가장 크고 덩치도 좋다. 그냥 덩치가 큰 놈들과 다른 건강함이 있었다. 덩치가 훨씬 큰 서역의 역사보다도 힘이 강했고 체력도 뛰어나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과 달리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서도 뭔지 모를 당당함이 있었다.
마교 제일의 신의로 불리면서도 자괴감이 깊은 가류로서는 가장 부러운 부분이었다.
그런 무룡의 입에서 자신을 존경한다는 말이 나오자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러고 보니 저놈은 항상 내 눈을 피했지만, 다른 놈들하고 달랐어.'
가류가 무서워서 눈을 피하거나 역겨워서 피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무룡은 그저 가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심기를 건드려 매를 벌기도 했다.
마환기공의 수련을 위해 일부러 매를 청한 것인데 가류는 무룡이 자신을 두렵거나 역겨운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존경하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라고 해석했다.
"한 입으로 두말할 순 없지."
"감사합니다."
무룡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황송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다른 자가 그랬다면 비굴하게 보였겠지만, 홍안섬여를 잡은 무룡이 하니 느낌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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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가 죽었다.
큰일이다.
일국의 황위 계승자가 죽은 건 당연히 큰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큰 일이다.
황제가 약 이십 년 전부터 시름시름 앓으며 황태자가 실질적으로 황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의식도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황제의 숨은 무려 이십 년이나 이어졌다.
충격적이게도 황제 대신 섭정을 하면서 황태자는 만인이 지탄할 악행을 벌였다. 같은 황실의 혈통을 이은 핏줄들을 하나씩 제거한 것이다.
결국, 물증이 잡혀 황궁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황태자는 역모의 죄명으로 머리가 장안성 성루에 걸렸다.
공교롭게도 황태자가 죽고 삼 일 뒤에 황제가 붕어했다. 일억에 가까운 중원의 백성이 칠 일 동안 상복을 입었고 청루홍루를 비롯한 주루들이 문을 닫았다.
칠 일이 지나고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암투가 시작됐다. 미처 황태자가 죽이지 못한 자들이 각자 세력을 구축해 황좌를 차지하려 했다.
그리고 황당하게도 용혈이 사라졌다. 독과 자객 등 비열한 수단을 가리지 않은 탓에 동귀어진한 것이다.
뱃속에 들어간 독은 상대를 먼저 죽였다고 효과를 잃지 않고, 파견한 자객도 의뢰주가 죽었다고 살행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에겐 좋은 패가 있소."
소가주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저었다.
"삼 년이 넘은 기간 찾아다녔는데도 아무 흔적이 없었소. 오히려 지금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저의를 의심해야 하오."
"남궁가의 힘으로 못 찾으면 온 강호의 힘을 빌리면 되오."
소가주의 말에 장로들이 고개를 저었다.
"비밀을 공개하자는 뜻이오?"
"누구 좋으라고 그냥 공개하겠소.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문파들을 모아 연맹을 만든 다음 남궁가가 맹주가 되어야 하오. 용혈의 행방을 안다는 소식을 전하고 연맹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만 자세한 정보를 알릴 생각이오."
"용혈을 찾았다고 해도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오? 우린 용혈을 이용하고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그건 우리만 알고 있소. 그리고 설사 용혈이 모든 걸 안다고 해도 상관이 없소. 멍청이만 아니라면 모든 원한을 내려놓고 우리와 힘을 합칠 수밖에 없소."
황제가 된다는 유혹과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많다는 위협. 두 가지만으로도 남궁가와 손잡을 이유는 충분하다.
최악의 경우 약을 쓰거나 협박하여 의도대로 움직이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남궁가는 소가주의 주도하에 친한 문파들에 서신을 보냈다. 그 문파들이 또 친한 문파와 고수들을 끌어들이고, 그렇게 소식을 접한 자들이 또 지인을 모으고.
예상을 뛰어넘은 진행으로 애초에 남궁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의 단체가 구성되었다.
직속 세력만 십만에 육박하는 단체의 힘은 과연 대단했다. 어렵지 않게 천애고도에 있었던 일을 탐문했고, 확신은 없지만 용혈이 마교에 있다는 추측을 얻었다.
"자고로 양국이 전쟁을 벌일 때는 선예후병先禮後兵이 원칙이오."
먼저 예의를 차려 협상하고, 협상이 틀어질 경우 선전포고를 한 다음 전쟁을 벌이는 방식을 말한다.
중원 문파들은 자신들의 연합체를 정의연正義聯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남궁가의 가주가 맹주 직을 차지했다.
그래서 마교로 가는 협상단도 남궁가 위주로 구성하게 되었다. 용혈을 찾아 혼란한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뭉쳤지만, 결성한 지 얼마 안 되어 어렵고 위험한 일은 서로 안 하려고 했다.
거대한 이익이 있다면 오히려 위험한 일에 제자들을 밀어넣으며 발언권을 얻으려 하겠지만, 아직 뭔가 확실한 건 없다.
남궁가의 사람들이 협상단의 절반을 차지한 이유다. 그렇게 협상단에는 소주 분가의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소가주의 눈밖에 난 것도 있지만, 무룡과 추영의 얼굴을 아는 자가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괴물과 싸우면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잃은 지 이 년 정도밖에 안 된 마교도 싸움을 반기지 않았다. 그래서 정의연의 이름으로 온 협상단을 술상으로 맞이했다.
정의연은 용건을 말하기 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시간을 끌었고 마교는 어떻게든 이들의 진짜 목적을 알려고 애썼다.
결국 더 미룰 핑계가 사라진 협상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가문에서 황태자의 부탁으로 보호하던 용혈이 있습니다. 마지막 행적이 마교로 향했다고 하는데 천하의 평안을 위해 내주시기 바랍니다."
"하하. 내가 교주라지만 교의 모든 일을 아는 게 아니오. 혹시 장로들 중에 사정을 아는 자가 있는가?"
후문영은 빠르게 고민을 끝내고 몸을 일으켰다.
"일전에 단전을 잃은 자가 있어 독무곡에 치료를 받으라고 보냈습니다. 외형이 남궁가의 협객들이 얘기한 사람과 비슷합니다."
"얼굴은 우리가 아니 어서 보여주시오."
후문영이 교주에게 포권했다.
"그렇다면 제가 중원의 협객들과 함께 독무곡에 가서 행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리하게. 진짜 용혈이 맞다면 극진하게 대접하여 우리 마교에 유감이 없도록 해야 할 걸세."
후문영은 연회가 끝나고 바로 협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독무곡으로 출발했다.
동시에 연회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 하나가 은밀히 움직였다.
"성녀께 아룁니다. 정의연은 남궁가에서 보호하던 용혈을 찾으러 왔다고 합니다."
성녀는 품에 안은 아기 얼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기와 닮은 어떤 단단한 얼굴이 마음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어딘가 했더니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 작가의말
독무곡 곡주 가류가 부릅니다. 소원을 말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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