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탄로
눈에 안 보이는 무형의 막이 사마귀와 화무룡을 천천히 조여 왔다.
법술을 전혀 안 익힌 무인이긴 하지만, 다행히 사마귀와 화무룡 모두 일정 경지에 이른 고수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감각이 후천적인 단련을 통해 더 강해졌다.
"뭔진 모르지만, 재밌는 건 아니겠지?"
사마귀의 말에 화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걸 해결할 사람은 나라는 것도 알겠소."
"왜?"
"날 보낸 이유가 이거 빼고 또 있겠소?"
사마귀는 고개를 젖히고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 우리 친구 하자."
화무룡은 살짝 놀라운 기색을 비쳤으나 이내 신색을 회복했다.
"까짓거. 그러지 뭐."
말을 마친 화무룡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그런데 천검산장 대문 앞에서 대결할 때의 길고 잘 빠진 검이 아니라 검신이 희고 짧으며 실용성보다 관상성이 훨씬 뛰어난 검이 나왔다.
"그거 뭐야?"
"백변검百變劍. 절검문의 보물이지."
"좀 더 서둘러라."
사마귀와 달리 태산파 도사들은 장식용으로나 쓸 법한 아름다운 검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결검無缺劍·파破."
하얀 검신에 자색 기운이 잔뜩 서렸다가 사방으로 힘없이 퍼졌다. 그러나 보이는 것과 달리 강한 힘을 품은 자색 기운은 둘을 조여오던 투명한 막을 조각 하나 안 남기고 말끔히 없앴다.
자기 역할을 마친 검이 검집으로 들어갔고, 두 무리는 태산파 도인들이 법술을 펼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걸 꺼내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마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산파의 도사가 외쳤다.
"절검문주는 아닐 테고. 사내이니 서문춘영도 아니고. 남은 건 화무룡밖에 없구나."
백변검을 꺼내는 바람에 화무룡의 정체가 탄로 났다. 그러면 당연히 낮에 함께 왔던 사마귀의 정체도 알려진 셈이다.
"뜻밖의 대어구나. 주검은 온전히 묻어줄 테니, 묘비에 남길 말이 있으면 빨리 생각해 둬라."
"절검문주가 널 보낸 건 다른 뜻이 있어서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화무룡은 생소한 공격에 당황하여 차분히 생각지 못했다. 정체를 숨기려고 가면을 써서 체형까지 바꿨는데 백변검으로 어이없이 신분이 밝혀졌다.
절검문이야 이미 감추고 자시고 할 게 없지만, 마교가 이 싸움에 끼어든 건 당분간 비밀로 지켜져야 했다.
"우리 둘이 이들을 다 죽일 수도 없고."
술사는 무인처럼 몸에 많은 기운을 담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에게 알맞은 기운을 찾아 최대한 순수하게 몸에 담고, 그 기운을 단련하여 밀집력을 높인다.
마치 영물의 내단처럼 뭉친 기운을 핵으로 삼아 외부의 기운과 동조해 법술을 펼치는 게 이들의 방식이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 태산파의 도사들은 건강을 생각해서 간단한 토납법을 익힌 평범한 사람으로 보인다.
"품은 기운의 백 배 이상으로 힘을 쓰는 자들이다."
화무룡 역시 도사들의 능력을 꽤 정확히 판단했다.
"나한테 목숨을 맡기겠나? 친구!"
화무룡은 냉담한 사람은 아니나 꽤 차분한 편이고 쉽게 충동하는 성격도 아니다.
"그깟 목숨 뭐 아깝다고."
그러나 사마귀의 말에 뭔지 모를 호연지기가 속에서 마구 솟아났다.
"좋아, 그럼 간다."
#
술사는 대부분 총명하다. 성격이 모난 사람이 많아서 선비처럼 우러름을 받진 못하지만, 이들이 똑똑하다는 데 이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똑똑하다고 모든 판단을 정확히 그리고 신속히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방어막을 강화하고, 남은 자는 모두 두 침입자를 찾는 데 전력을 한다. 그리고 지원도 불러."
사마귀와 화무룡이 갑자기 입구로 뛰어들 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가장 많은 숫자가 입구 주변에 몰려 있었고, 그 많은 사람 모두 태산파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다.
아주 이성적으로 둘이 북쪽이나 서쪽으로 도망칠 거로 예상하던 태산파는 사마귀의 의외 결정에 허를 사정없이 찔렸다.
"서둘러라. 부상을 회복할 틈을 줘선 안 된다."
물론, 사마귀도 꽤 큰 부상을 대가로 내놨다.
"제길. 여긴 또 무슨 곳이야?"
분명히 태산의 높고 험한 봉우리의 중턱에 있는 구멍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입구로 뛰어든 둘의 귀엔 선명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일단 숨자."
화무룡은 피가 철철 흐르는 사마귀의 옆구리에서 눈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운이 나빴으면 심장에 여파가 미쳤을 위험한 곳이다.
"그래. 두 시진이면 다 나을 수 있으니까 어디든 숨자."
둘은 굳이 멀리 안 가고 채 마르지 않은 암초 사이에 몸을 숨겼다. 이 역시 허를 찌르는 거로, 누구도 쫓기는 신세인 둘이 조금만 주의해서 살피면 들킬 곳에 태연하게 몸을 뉘었으리라곤 상상치 못할 것이다.
"이상한데? 왜 추적자가 없지?"
둘이 굳이 바닷가를 은신처로 고른 건 이곳의 기운이 혼잡하기 때문이다. 모습보다는 기운을 숨기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뭍으로 들어가기보다는 해변에 남는 걸 선택했다.
"난 진법 쪽에 아는 바가 거의 없어."
화무룡은 자신들이 진법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이건 진법이 절대 아니야."
사마귀 역시 진법에 조예가 깊은 건 아니지만, 진법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정도의 지식은 보유했다.
"구중진의 협곡 정도만 해도 놀라운 거야. 내가 확실히 알려줄 수 있는 건 진법으로 이렇게 큰 세상을 만들 수 없어."
"그럼 우린 바닷가로 옮겨진 건가? 태산이 바다랑 아주 먼 건 아니잖아."
"깊은 바다와 얕은 바다는 색이 다르다. 지금 여긴 깊은 바다의 색이다. 기온을 봐선 북해나 남해는 아니고 동해 어딘가인지 싶은데."
화무룡은 사마귀의 관찰력과 추리 능력에 탄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마음이 진정되면 화무룡 역시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사마귀처럼 이렇게 빨리 객관적인 결론을 얻는 건 절대 무리다.
'나도 꽤 경험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와 비교하면 정말 애송이에 불과하구나.'
"그리고 말인데. 진법이 아니라면 아무래도 놈들이 우릴 찾는 건 힘들 거야."
"왜?"
"여기 딱 봐도 별거 없잖아. 그럼 놈들이 왜 굳이 입구를 애써 지켰을까? 그건 놈들도 입구로 들어가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거지. 아예 모르거나, 갈 만한 곳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우리가 도주하는 걸 막으려고 입구를 지켰다는 거야?"
"아니. 입구를 통해 갈 수 있는 곳 중에 아주 중요한 곳이 분명히 있어. 아무래도 놈들은 입구를 통해 들어간 다음 가장 먼저 그곳부터 확인할 거야. 그러니까 당분간 우린 안전하다는 거지. 재수 없이 누군가가 여기로 오지 않는다면."
그때 허공에 짙은 아지랑이가 생겨서 꾸물대더니 사람 한 명을 뱉어냈다.
"죽여."
굳이 복식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풍기는 기운 자체가 태산파 도인이었다.
화무룡은 차분하게 백변검의 자루를 잡고 뽑았다. 검집에선 물소의 뿔처럼 완만하게 휜 짧은 비수가 나왔다.
"무결검·할割."
화무룡의 몸이 돌개바람에 휘말린 바싹 마른 가랑잎처럼 회전하며 사라졌다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 못 하고 어리둥절한 채 가만히 서 있는 도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완전한 무방비 상태인 도사의 목을 가차 없이 베었다.
"검이야 검법이야?"
"어떤 검을 잡아도 똑같이 초식을 펼칠 수 있으면 세상에 이기지 못할 자가 없다는 무결검법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어서 백변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단 각각의 초식에 꼭 알맞은 검으로 경지를 높인 다음 방법을 찾자는 생각이었지."
"대단하군."
사마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마교에도 흑응조를 비롯해 대단하거나 기괴한 무공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절검문처럼 체계적인 느낌이 아니라 중구난방으로 제멋대로다.
"여길 어떻게 벗어날 생각이지?"
주검을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옮긴 화무룡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부끄럽지만, 화무룡은 수영을 거의 못 한다.
내공 덕분에 물에 빠져 죽을 걱정은 없지만,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거리는 아주 짧다.
"여길 왜 벗어나. 놈들이 숨기는 게 뭔지 캐내야지."
#
노계혼과 덕구는 사내의 의뢰를 수행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넘치는 황금에도 불구하고 둘은 기뻐할 수 없었다.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데?"
천하는 현재 수십 명의 군벌이 각자 장악하여 나눠 다스리고 있다.
"거의 다 같은 편인 거잖아."
둘이 군불의 호송을 맡은 것만 벌써 세 번이다. 네 무리가 더 있다고 하니 대충 열다섯 명인데, 이는 마교가 지나갈 것으로 예상하는 지역의 군벌 중 칠 할이 넘은 숫자다.
중원 서쪽에 있는 마교와 중원 남쪽에 있는 남화교 사이의 지역은 빈궁한 편이다. 노계혼이 암중 세력이라면 여기보단 물산이 풍부한 동부와 북부에 더 힘을 쏟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남부에서 칠 할이나 되는 군벌을 장악했다는 건 사실상 세상이 암중 세력의 손아귀에 들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뭘 기다리는 거지? 이들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추대하면 끝인데."
노계혼과 덕구는 당백호를 죽이고 옥새를 뺐어야 새 황제가 나올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명분과 정통성도 중요하지만, 세상은 결국 힘의 논리로 돌아간다.
그 힘이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미모일 수도 있고 명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힘은 결국 무력이다. 돈이고 권력이고 미모고 명분이고 절대적인 무력 앞에선 색이 바래기 마련이다.
"우리가 뭘 생각해. 그냥 정보를 사모께 전달하면 끝이지."
말을 마친 덕구는 털에 흙탕물이 잔뜩 묻은 쥐 입에 환약을 넣어줬다. 외관과 달리 자신보다 훨씬 큰 고양이를 물어 죽일 정도로 포악하고, 이빨과 발톱에 독이 있어 함부로 만지면 건장한 남자도 몸을 가누기 힘들다.
"자, 어서 집으로 가."
덕구가 작성한 보고서를 삼킨 쥐는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속도가 빠를 뿐만 아니라 피식자로서 몸을 사리는 본능까지 충실한 놈이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