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기의
추영 일행이 황급히 태산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조금 늦었다. 명해와 세상의 연결이 강해지며 위치가 고정됐다.
어쩔 수 없이 이들은 천방기사가 소환한 배를 타고 노를 열심히 저어야 했다.
"놈들을 막을 방법이 없겠군."
구멍이 뚫린 곳으로 오던 수백만 명의 명해에 사는 인간들 역시 뱃머리를 돌려 추영 일행의 뒤를 쫓았다.
"저들의 목표는 중원일까 우릴까?"
"방향을 틀어보면 알겠지."
추영 일행의 배는 작으나 무척 빨랐다. 배 자체가 잘 만들어진 것도 있지만, 노를 젓는 사람들의 면면도 만만치 않은 덕분이다.
그러나 커다란 돛으로 북풍의 힘을 빈 명해의 배도 느리진 않았다. 거리가 꽤 멀긴 하지만, 시야가 탁 트인 바다여서 서로 놓칠 일이 없었다.
"젠장. 우릴 따라오고 있어."
추영 일행에 약자는 없다지만, 저 무리에 인피요괴 한 마리만 끼어 있어도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사마귀가 급격한 성장을 보이긴 했지만, 아직 검극이나 사마영 등에겐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살상력이 강해 다른 사람이 공격 기회를 만들면 한두 마리 죽이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방향을 서쪽으로 튼다."
중원 기준으로 서북쪽은 넓은 한랭지대가 먼저 나오고, 다음은 사막이다. 숫자가 많을수록 불리하기에 놈들이 마교까지 따라올 가능성이 작다.
추영 일행은 천하에 대한 걱정은 일단 접고 도주하는 데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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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파가 보낸 화미조畵眉鳥입니다."
벽력문과 절검문에 아미파의 화미조가 날아들었다.
"큰일이 터졌군."
벽력문주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패였다.
"벽력문의 생각이 궁금하오."
서문문검이 말했다.
"청람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벽력문주는 게으른 사람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하자면, 게으른 데다가 귀찮은 걸 질색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웬만하면 소문주로 임명한 청람에게 결정을 미뤘다.
"명황성의 결계가 사라진 건 큰 의미에선 좋은 일입니다."
아미파가 화미조를 보낸 건 여섯 개 명황성의 결계가 동시에 사라지며 마물과 요괴들이 세상에 풀렸기 때문이다.
기운이 세상과 다른 명황성에선 법술을 펼치는 게 힘들어 숨은 요괴나 마물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이젠 결계가 사라지며 놈들이 세상에 나왔기에 찾아내는 건 더 쉽다.
그러나 넓은 세상으로 숨었기에 수색해야 할 범위가 늘어서 아미파의 역량도 부족하고 술사의 수도 턱없이 모자랐다.
"계획적인 놈들과 달리 요괴나 마물은 짐승에 가깝소. 인명 피해가 훨씬 심할 것이오."
"하하. 여러분은 놓친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추향이 얻은 어린 요괴가 청동괴는 물론이고 웬만한 요괴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군. 추향만 찾으면 지금 사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겠어."
"그런데 추향은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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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아저씨, 왔어?"
벽력문과 절검문이 학수고대하는 추향은 현재 천수천안에게 잡혀 남명해의 진법에 갇혔다.
다행인 점은 진법이 추향을 전력으로 보호하기에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죽을 걱정이 없다는 것이고, 불행한 건 영혼으로 연결된 예두가 이들이 인간을 멸망하여 혼돈을 불러오려고 만든 제단에 바쳐졌다는 것이다.
"왔다. 제길."
"옆에 현녀문 아줌마랑 그렇고 그런 사이야?"
"아니다. 젠장."
"뭡니까?"
현녀문 문주가 질문했다.
"부끄럽지만, 저 아이와 연결된 요괴의 격이 나보다 높다. 그래서 묻는 말에 대답 안 할 수 없다."
현녀문 문주는 놀라기보단 기쁨을 먼저 느꼈다. 사실 사마귀의 오살공도 격이 부족한 등 여러 이유로 성공 가능성이 작았는데,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요괴가 벌써 격이 천수천안보다 높다고 하니 성공이 거의 확실하다.
"이 진법은 진짜 날 보호하는 게 맞지?"
"그래."
"아저씨도 날 어쩌지 못하나?"
"맞다."
"그럼 방해해야지."
"쓸데없을 걸?"
자신을 가둔 진법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보호함을 다시 확인한 추향은 질문을 멈추고 방해를 시작했다.
"저건 뭐요?"
술사인 천수천안은 추향이 운기하는 심법이 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하나는 소녀공素女功으로 보이고 다른 하나는 여동빈의 순양공純陽功 같습니다."
현녀문 문주의 대답에 잠깐 걱정했던 천수천안은 한시름 놓았다. 작은 힘으로 큰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는 법술과 달리, 무공은 소모한 힘과 비례해 성과가 한정됐다.
"자, 그럼 제사를 시작하겠소. 현녀 구령은 뒤에서 구경하시오."
현녀문 문주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문주가 물러난 걸 확인한 천수천안은 몇 개 법보를 꺼낸 다음, 주문이 적힌 양피지를 꺼내 청동화로 위에 놓았다.
"직접 주문을 외우는 게 아닙니까?"
너무 단출한 준비에 의문이 생긴 문주가 물었다.
"실수할까 봐 미리 주문을 외워 양피지에 담았소. 법력으로 청동화로를 달궈 양피지를 태우면 정확한 주문이 외워질 것이고, 그럼 제사가 시작하오. 난 그 공덕으로 격이 오르고 힘도 늘겠지. 이게 다 문주의 덕이니 내 필히 보답을 잊지 않겠소."
천수천안의 공치사를 듣던 문주의 마음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저자를 제거하고 내가 제사를 주관한다면?'
다보도인이 천수천안을 아낀다고 하지만, 많은 제자 중 하나일 뿐이다. 반면 자신은 구천현녀의 친딸이다.
게다가 인간이 멸망하면 복희와 여와가 친 천라지망이 사라져서 천계의 존재들이 하계로 마음껏 왕래할 수 있다. 그런 큰 공을 세운 자신을 고작 천수천안을 죽였다는 이유로 다보도인이 죽일 것 같지 않았다.
'다보도인은 공격보단 수비에 능하다고 했지. 어머니가 날 보호하는 한 다보도인 손에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전혀 위험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성공했을 때 얻을 과실의 크기를 생각하니 그 정도는 위험도 아니라고 느껴졌다.
'단번에 천 개 목숨을 지우려면 그 방법밖에 없구나.'
마음을 굳힌 현녀문 문주는 소매에서 구천현녀가 물려준 오행오룡여五行五龍輿를 꺼냈다.
오행오룡여는 다섯 용이 이끄는 마차다. 다섯 용은 오행의 방위를 잡은 채 마차를 끄는데, 마차는 토의 방위를 잡은 황룡의 등 위에 있었다.
"멸滅!"
현녀문 문주는 오행오룡여에 천수천안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문주의 지시를 받은 오행오룡여는 여섯으로 분리되었다. 분리된 다섯 용은 천수천안을 포위했고, 마차는 또 여섯으로 나뉘었다가 합쳐지며 천수천안과 다섯 용을 안에 가뒀다.
"하하. 어쩌면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구나."
천수천안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매에서 검 네 개를 꺼냈다.
"아니, 설마 주선검진誅仙劍陣?"
현녀문 문주의 오행오룡여 역시 대단한 법보지만, 주선검진에 비할 바가 아니다. 통천교주는 괜찮으나, 태상노군과 원시천존도 주선검진에 걸리면 온전하게 벗어날 수 없다.
"멍청한 것이 아는 건 많구나."
천수천안은 네 자루 검을 자기 주변에 꽂았다. 동쪽엔 주선검誅仙劍을 보내고 서쪽엔 육선검戮仙劍을 꽂았다. 북쪽엔 함선검陷仙劍을 두고 남쪽엔 절선검絶仙劍을 배치했다.
"주선진도誅仙陣圖는 사라진 지 오래다고 들었는데."
주선검진을 펼치려면 주선·육선·함선·절선의 네 자루 보검이 있어야 하고 또 주선진도도 필요하다. 천계에서도 피할 자가 몇 없다는 대단한 진법인데, 주선진도가 없어서 여태껏 그 위력을 보인 적이 없다.
"통천교주께서 쓰시던 청평검을 아느냐? 청평검을 분지르면 주선진도가 나온다."
마중구문의 세력이 검을 못 쓰는 이유다. 이들은 주선진도를 얻으려고 청평검을 분질렀다. 세상 모든 검의 왕인 청평검을 분지른 바람에 마중구문 소속은 검을 절대 못 잡도록 저주를 받았다.
마중구문의 하수인까지는 괜찮지만, 아무리 검극처럼 뛰어난 자여도 마중구문에 정식으로 소속하는 순간 검술을 더는 펼치지 못한다.
현녀문은 삼교의 하나가 아니었기에 미처 이런 사실을 몰랐다.
"너는 갇혔고 나는 세상으로부터 기운을 얻는다. 결국, 이기는 건 나다."
현녀문 문주가 이를 갈며 기운을 모았다.
"아니지. 갇힌 건 너야."
천수천안은 주선진도에 자신의 양손을 대고 기운을 주입했다. 충분한 기운을 받은 주선진도가 빛을 내더니 네 자루 검이 서로 연결됐다.
"주선검진 역시 오행에 기반한 진법이다."
동쪽에 둔 주선검은 오행 중 목木이 없다. 서쪽에 둔 육선검은 금金이 없고 북쪽에 둔 함선검은 수水가 없으며 남쪽에 둔 절선검은 화火가 없다.
이들을 정확한 위치에 배치하는 것으로 네 개의 오행진이 만들어진다.
거기에 주선진도가 중앙에 자리를 잡으며 다섯 개 오행진이 또 오행진을 이룬다.
"원만한 건 든든하지. 그러나 강한 건 결핍이다."
주선검진의 네 검은 오행에서 하나씩 빼는 것으로 오히려 위력을 극대화했다. 그리고 주선진도를 통해 원만한 오행진을 만들어 안정성을 보장했다.
"이걸 거꾸로 펼치면 태상노군이나 원신천존도 죽일 수 있지."
이번엔 원만한 것으로 결핍을 감쌌지만, 태상노군처럼 강한 상대라면 바꿔서 결핍으로 원만함을 감싸 위력에 치중했을 것이다.
다섯 오행진으로 구성된 오행진은 자신을 가둔 오행오룡여를 넘어 밖의 기운까지 단단히 통제했다.
"함정을 판 건가?"
현녀문 문주는 모든 걸 포기했다.
"그래. 네 오행오룡여가 필요하거든."
오행오룡여가 필요하지만, 뭔가를 내주기 싫어서 현녀문 문주가 먼저 손 쓰게 만든 것이다. 공로를 인정해 구령까지 올려줬는데 현녀문 문주가 배은망덕한 것이니 천수천안에겐 오행오룡여를 빼앗을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왜? 주선검진이 있으면서."
"결핍은 위력만 강하지. 오행의 기운을 제대로 뽑기 위해선 원만한 게 필요하거든."
주선검진을 사용해도 혼돈을 불러오는 데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천수천안에게 꼭 유리하다는 보장이 없다. 위력이 약하더라도 오행오룡여를 사용하는 편이 더 확실하고 안전하다.
"내가 함정에 안 빠졌으면 협상하려고 했던 거구나."
문주는 그제야 왜 천수천안이 처음부터 자세를 낮췄는지 알았다. 구천현녀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신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을 때를 대비해 협상을 쉽게 하기 위해 시종 우대했다.
"네가 이토록 멍청한 걸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안 했을 텐데."
천수천안은 껄껄 웃으며 현녀문 문주를 조롱했다.
시간이 흐르며 오행오룡여가 천수천안의 것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리고 문주는 법보만 뺏긴 게 아니라 자신의 기운마저 모조리 약탈당했다.
"죽지는 않을 거다. 천 년 정도 열심히 수련하면 지금 수준에 다시 돌아오겠지. 물론, 그때 난 어쩌면 사조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됐을지도."
끝까지 현녀문 문주의 마음에 대못을 박은 천수천안은, 강탈한 오행오룡여를 제단에 놓인 예두 근처로 보냈다.
"네 공을 인정해 구경할 기회는 주마."
말을 마친 천수천안이 청동화로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청동화로의 색이 조금씩 변하더니 안에 둔 양피지가 천천히 사라졌다.
- 작가의말
無信棄義 - 신용이 없고 의리를 버린.
전편 소제목에 깔아 둔 복선.
호구발아虎口發芽 - 호구가 싹트다. 여기서 호구는 현녀문 문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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