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룡유담
무룡은 착하다. 약인을 벌했음에도 가끔 떠올리며 괴로워할 정도로 바른 심성을 타고났다.
거기에 협의행의 육 년 동안 인간군상의 온갖 꼴을 다 본 노혼이 엄하게 가르친 탓에 어떤 상황에도 다투기보단 양보나 회피를 선택하는 성향이 강하다.
노혼의 품을 벗어난 후엔 추영 때문에 온갖 상황에 휘말려 자기주장을 별로 펼치지 못했다. 단단한 고집과 드높은 자존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표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진짜 해보자는 거구나!"
꾹 눌렸던 것이 드디어 폭발했다. 이번엔 자신만 잘하면 되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는데, 난데없이 신선들 놀음에 말려들었다.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무룡이 배를 타는 선택을 했더라도 어떻게든 말려들게 했을 것이다. 아까까지 자신의 신중하지 못함을 자책했던 게 너무 억울했다.
"난 잘못한 적 없어. 잘못은 다 너희가 한 거야!"
극도로 흥분한 무룡은 자하신공으로 단전 주변의 기운을 움직여 몸을 순환하게 했다. 감싸고 있던 기운이 약해지자 단전에 봉인된 여의주가 반응했다.
"나와! 내 몸에서 나와!"
무룡을 가둔 세상이 꿈틀거리더니 하늘과 땅이 또 바뀌었다. 건곤경은 주기적으로 하늘과 땅이 위치를 바꿨는데, 이번엔 하늘이 위로 갔다.
툭 소리와 함께 책 한 권이 무룡의 발치에 떨어졌다. 그러나 눈이 뒤집힌 무룡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여의주를 밖으로 꺼내려고 애썼다.
여의주가 딱히 잘못한 건 없지만, 넘치는 화를 쏟아내야 할 상대가 필요했다. 너무 오랜 기간 눌러뒀던 화가 극도의 절망과 만나 용암처럼 분출됐다.
여의주는 천계의 존재들도 두려워 피하는 극독을 품었다. 그대로 두면 세상이 어찌 될지 몰라 여동빈을 비롯한 몇몇 신선이 순수한 양의 기운이 가득한 순양동에 봉인했다.
그런 여의주가 몸의 기운을 모두 양기로 바꾼 무룡에게 반응해 모습을 드러냈고, 여의주를 강렬히 원하는 무룡의 의지에 반응해 자하동을 가득 채웠던 자하괴독을 흡수하여 봉인을 벗어났다.
그때 여동빈이 나타나서 순양의 기운을 품은 검으로 여의주를 부수려 했다. 그런데 자하구가 농간을 부려 여의주를 무룡의 입에 들어가게 했고, 결국엔 삼키게 했다.
무룡 역시 순양의 기운을 품었고 하단전이 존재한 적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결국, 무룡이 자하동을 대신하여 여의주를 봉인하는 봉인체가 되었다.
십 단계에 이르며 순양공에 입문한 자하신공, 어떠한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진 단전, 마환기공으로 인간인가 싶을 정도로 단단한 육신.
정말 최소한의 조건만 충족했는데 용케 봉인에 성공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신선이라는 작자의 수작에 말려들어 자신과 추영과 아이는 물론 세상까지 위험해질 상황이 되었다.
아무리 단단한 인간이어도 더 버티는 건 어렵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무룡은 우선 자신이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운 채 단전에 봉인한 여의주를 꺼내려 했다.
무룡의 의지에 반응한 여의주가 밖으로 나오려 했다. 대경실색한 마환기공이 급히 기운을 끌어다가 여의주를 감싸려 했다.
그러나 무룡의 의지에 호응한 자하신공이 지속하여 기운을 뺏어갔다. 거기에 벽파공까지 가세하자 마환기공이 점점 약세를 보였다.
봉인이 완전히 해제되지 않은 탓에 여의주는 무룡의 단전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신 여의주가 품은 자하괴독이 밖으로 나왔다.
자하괴독은 순수한 양기에 우호적이다. 그래서 양기로 가득한 무룡의 몸에 해를 끼치는 대신 어울려 함께 움직였다.
그러나 극도의 흥분으로 아무것도 못 느낀 무룡은 그저 여의주를 밖으로 끄집어내려고 용을 썼다.
그때 바닥에 있던 책이 둥실 떠올랐다. 종이가 생기기 전인 상고 시대의 책은 매미 속 날개처럼 얇은 수천 장의 가죽으로 이뤄졌다.
무룡의 눈앞으로 떠오른 책의 책장이 절로 넘어갔다. 눈에 뵈는 게 없는 무룡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 또 천지가 뒤집혔다. 무룡의 눈앞에 떠 있던 책이 세상이 뒤집히며 하늘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무룡은 깊이 고민할 겨를도 없이 땅을 박차며 손을 내밀어 책을 잡으려 했다.
무룡의 몸이 둥실 떠올라 민들레 홀씨처럼 날았다. 발버둥을 치고 양팔을 허우적거려도 전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악!"
화가 치민 무룡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어쩌면 뭔가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평정심을 잃은 탓에 천금 같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일부러 날 화병으로 죽이려는 거야.'
끓는 속을 주체하지 못한 무룡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 마구 휘둘렀다. 배운 게 벽파검법밖에 없어서 극도로 흥분한 와중에도 벽파검의 초식을 순서대로 펼쳤다.
화로 단순해진 머리가 흥분으로 빠르게 돌아가며 어느 때보다 훌륭한 벽파검법을 펼쳐냈다. 무룡의 기운들이 검을 타고 허공에 파도를 그렸다.
그에 따라 무룡의 몸이 검을 휘두르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손발을 제멋대로 휘젓는 것과 달리 초식에 따라 일정 방향으로 힘을 투사한 덕분에 무룡은 하늘을 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침착. 침착하자.'
무룡은 고개를 돌려 하늘로 떨어지는 책을 찾았다. 평범한 사람은 물론 안법을 사용하는 고수보다도 밝은 눈 덕분에 어렵지 않게 깃털처럼 나풀거리는 상고기서를 발견했다.
무룡은 마음을 다잡고 검을 휘두르며 책에 접근했다.
떨어지는 깃털처럼 종잡기 어려우나 방향을 크게 꺾는 일은 없었다. 양손으로 검을 잡고 부지런히 초식을 펼친 덕분에 무룡은 상고기서와 아주 가깝게 접근했다.
그때 세상이 또 뒤집혔다. 땅이 밑으로 감에 따라 무룡도 책도 같이 추락했다.
그러나 깃털처럼 나풀거리는 책보다 무룡이 추락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쿵 소리와 함께 무룡이 땅에 찰싹 달라붙었다. 마환기공 덕분에 부상은 없었지만, 몸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고 숨이 멈추며 면면불식이 내호흡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책이 무룡의 앞에 떨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룡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그때 책자가 손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벌떡 일어서더니 책장이 절로 넘어갔다.
책의 제목은 신농백초神農百艸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초와 독초는 물론이고 이젠 세상에 없는 풀들까지 다 적혀 있었다. 무룡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독술로 책자의 내용을 머리에 새겼다.
책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기 무섭게 세상이 또 뒤집혔다. 하늘이 아래가 되어 책이 날아갔고 무룡은 그대로 땅에 붙어 있었다.
여전히 까딱할 힘도 없는 무룡은 순심술을 펼쳤다.
"독룡유? 뭐지?"
무룡의 심상에 독룡유라는 세 글자만 있고 내용은 전혀 없었다. 덕구가 있었으면 독성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알려줬을 텐데, 개똥도 약에 쓰려면 절대 안 보이는 법이다.
무룡이 독룡유가 뭔지 몰라 멍해 있는 대신 자하괴독이 반응했다. 양기를 따라 자하신공의 운기 경로를 따르던 괴독이 독자 노선을 선언하고 경로를 이탈했다.
괴독은 백화쟁염을 이뤄 더없이 튼튼한 무룡의 혈도들을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방문했다. 벽해청공의 경지에 이른 탓에 성질이 다른 기운이 같은 혈도를 동시에 방문해도 별 탈은 없었다.
어차피 의지만 있고 그걸 실행할 힘이 전혀 없는 무룡은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편식하지 않고 모든 기운을 품으며 보호가 목적인 마환기공. 양기만 좋아하는 자하신공. 음기를 더 좋아하나 양기가 없으면 안 되는 벽파공.
거기에 무룡은 뭔지조차 모르는 독룡유까지 해서 네 가지 방식의 운기가 무룡의 몸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단전 위치에서 출발해 수백 개 혈도를 차례대로 거쳐 다시 단전으로 돌아오는 자하신공. 그저 빠르고 끊이지만 않으면 혈도 몇 개 정도 잘못 가도 괜찮은 벽파공. 혈도끼리 기운을 주고 받고 뱉으면서 균형을 이뤄 몸을 지키는 마환기공.
거기에 독을 일정 규칙으로 순환하여 암혈暗穴 중에서도 가장 찾기 어렵다는 독룡담毒龍潭을 찾아내는 독룡유의 흐름.
백화쟁염과 벽해청공 덕분에 신선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무룡의 몸은 잘 버텨냈다. 커다란 충격으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네 흐름 모두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게 오히려 복이 된 셈이다.
괜히 무룡의 의지가 끼어들어 흐름이 어긋나면 일을 그르칠지도 모른다.
독 중에서도 최고인 자하괴독이 독룡유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자 독룡담이 오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단전에 자리를 잡은 여의주가 반응했다. 단전도 포근한 둥지가 맞지만, 독룡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하신공이 양기로 여의주를 포근히 감쌌다. 벽파공이 세찬 파도를 일으켜 여의주를 태웠다. 마환기공이 여의주가 주변 혈도들을 공격하지 못하게 경고했고, 독룡유가 벽파공의 파도를 독룡담으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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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다."
구름에서 헤엄치며 노닐던 잉어 요괴가 지느러미를 부르르 떨었다.
"무슨 일이지?"
건곤경은 잉어 요괴의 것이기에 다른 자들은 안에 상황을 알 방법이 없다.
"여의주가 암혈로 자리를 옮겼다."
같이 있던 신선과 요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럼 어떻게 되는데?"
"나도 잘 몰라. 하나 확실한 건,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저놈이 여의주로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 암혈은 별개니까 놈과 여의주의 연관이 사라졌다고 봐도 돼."
"그냥 둬도 이룡을 죽일 가능성이 희박한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었구나."
질책을 받은 잉어 요괴가 몸을 펄떡이더니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빨간 옷을 입고 머리에 작은 모자를 써서 세상 귀여운 모습인데 쓴 황련을 달여 마신 것처럼 얼굴은 울상을 넘어 죽상이었다.
"어떻게 수습하지? 아는 사람 있으면 알려줘."
법보를 꺼내 질문하는 자도 있고 품에서 책을 꺼내 읽는 자도 있고 허공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하나같이 탄식을 뱉었다.
"풀어 주고 지켜보는 수밖에."
"아니면 우리를 섬기는 인간들에게 계시를 내려 놈을 죽이라고 하자."
"부스럼을 더 긁으려고?"
격렬한 토론 끝에 이들은 무룡을 풀어주고 자신들을 따르는 인간들에게 무룡을 죽이라고 암시하기로 했다.
- 작가의말
암혈은 앞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 있습니다. 추영이 모은 기운을 암혈에 숨겨 내공이 전혀 없는 척했지요. 무룡도 잉어 요괴가 내린 기연으로 암혈 하나 발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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