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교비사
"혈교는 마중구문의 일원이야 아니면 하수인이야?"
추향의 질문에 통천선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믿기지 않지만, 혈교는 원래 마중구문에 저항하던 세력이었다."
"마중구문의 하수인이 혈교랑 거래하던데?"
"확실한 건 혈교가 마중구문보다 더 오랜 곳이고, 둘은 처음부터 적대적이었다는 것이다."
#
무룡은 기운을 움직여 접문을 열었다. 그러나 접문에 뛰어 들어가도 다른 공간으로 이동되지 않고 그대로 감옥 안이었다.
무룡은 마치 물에 비친 달을 건지려고 애쓰는 듯한 자신의 모습이 황당하여 헛웃음을 연발했다.
"이게 아닌가?"
무룡처럼 한계를 초월한 무인은 오랜 기간 음식과 물을 섭취하지 않는다고 죽지 않는다.
그러나 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공으로 약해진 근력을 보충할 수 있지만, 잘 먹고 잘 쉴 때보다 초식의 전개가 매끄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피로한 정신으로 반응이 평소보다 느린 것도 내공이 많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지금 상태에서 사마영과 다시 싸우면 무룡이 진다. 무룡 역시 내공 없이 꽤 오랜 기간을 보내긴 했으나 사마영과 비교조차 할 수 없다. 정상이 아닌 상태에 훨씬 적응한 사마영이 작은 틈을 비집고 무룡을 제압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
'고육계를 써야 하나?'
고민하던 끝에 무룡은 다시 진법으로 돌아가 사마영이 알려준 방식으로 걷기로 했다. 함정인 건 분명하지만, 비천각주가 돌아온 걸 보면 그리 대단한 함정이 아니다.
아무래도 사마영이 뭔가를 하는 동안 잠깐 이목을 끌어주는 용도였을 거로 무룡은 판단했다.
그러나 무룡의 계획은 시작도 전에 끝났다. 천으로 온몸을 꽁꽁 감싼 자그마한 괴인 십수 명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무룡을 공격했다.
'눈코입 다 막았다.'
무룡은 상대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상정하고 대처하기로 했다. 괜히 인간이라고 생각하다가 예상치 못한 재주에 낭패를 볼 수 있다.
"마중구문에서 보냈느냐?"
"아니구나."
놈들은 무룡의 답을 듣기도 전에 아니라고 판단했다. 질문을 들은 무룡이 표정이나 어떤 반응으로 부정의 답을 한 게 틀림없다.
"그대들은 누구시오?"
"모른 척하기는. 숨어서 다 엿들었으면서."
"남화교의 혈영살수가 먼저 공격했소. 그것도 여러 차례. 난 그 이유와 배후가 궁금해서 찾아온 거요."
"진짜다."
"멍청한 놈들."
"혈영살수라. 웃기지도 않는구나."
무룡의 머리는 기지로 번뜩였다.
'불사혈괴를 연구하는 과정에 나온 산물이 혈영살수구나. 저들이 저토록 분노하는 건 혈영살수가 실패작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유나 배후를 알려주면 나도 얌전히 물러나겠소. 협박은 아니고, 내가 화를 내면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지오."
"진짜다."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군."
"우리도 모르는 걸 어떻게 알려줘?"
"방법은 있다."
불사혈괴들은 물론이고 무룡의 이목도 방법을 언급한 자에게 몰렸다.
"힘을 합쳐 미씨를 제압한 다음 고문하면 된다."
"그대들은 남화교 사람이 아니오?"
"남화교는 원래 우리 염씨炎氏의 것이다. 수백 년 전에 미씨가 반란을 일으켜서 교주를 선출직으로 바꾼 다음 쭉 자리를 차지했다."
"이 지하뇌옥은 뭐요?"
이들이 지하뇌옥을 관리하는 거로 알았던 무룡에겐 정말 의외의 말이었다.
"우리도 세상일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래서 음식과 물을 줘서 목숨을 붙여두고 가끔 데려다가 아는 바를 털어놓게 하고 그랬지."
그제야 미씨 가문이 애타게 지하뇌옥으로 드나들 길을 찾던 게 이해가 됐다. 아주 은밀하고도 안전한 출입 방법을 보유했음에도 길라잡이들을 대량 투입한 게 이상했는데, 불사혈괴와 미씨 가문이 서로 적이라면 말이 된다.
"음식이랑 물은 어디서 온 거요?"
"의심이 많은 아이로구나. 여전히 우리한테 충성하는 가문이 많다."
#
"나도 소문으로 들은 거여서 확실치 않은데, 수백 년 전에 반란이 일어나 교주 일가가 몰살했다. 그때부터 교주를 선거로 뽑기로 했는데,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세 가문 중 하나가 교주 자리에 앉는다."
"그 많은 사람이 누굴 지지하는지 일일이 알아본다는 거야?"
"머릿수만 세면 되는 일이니까. 일반 교도는 자신이 지지하는 가문의 깃발 주변에 모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반란으로 뒤집을 정도로 교주 가문이 쇠락했어?"
"내 추측인데, 마중구문이 개입한 게 아닌지 싶다."
#
"네가 무슨 일을 당했건, 배후가 누군지 모르겠고 그 이유조차 불분명하다면 십중팔구는 마중구문의 수작이다."
"왜 그리 확신하시오?"
"우린 남화교의 남은 가문을 다 합친 것보다 강했다. 게다가 저들은 몸에 혈독이 있어 감히 반항할 엄두도 못 냈고."
"그럼 어떻게 반란에 성공한 거요?"
"정혈단을 도둑맞았다."
사라진 정혈단을 찾으려고 인원을 분산한 사이에 각개격파 당했다. 그러나 일부 가문이 여전히 충성스럽게 따르는 거로 미뤄봤을 때, 남은 자들이 힘을 어떻게 합쳐도 각개격파조차 힘들어야 맞는다.
"내가 어떻게 돕길 바라는 거요?"
무룡에겐 배후를 캐내는 일이 최우선이다. 정체가 전혀 짐작이 안 가는 상대를 알아야 숨든지 싸우든지 정할 수 있다.
"우린 정혈단에 묶여 정해진 곳만 다닐 수 있다. 네가 교주전 지하에 가서 제단에 놓인 정혈단을 치우면 남은 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다."
"정혈단은 사라졌다고 들었소."
"아니다. 주문을 훼손하는 건 성공했지만, 정혈단은 찾지 못했다. 미씨 가문이 일부러 낸 소문이다."
백 년쯤 전에 미씨 가문의 신임을 얻은 다음 주문을 훼손한 건 불사혈괴의 지시를 받는 가문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원래 목적이었던 정혈단을 제단에서 치우는 데는 실패했다.
주문을 훼손한 건 혼란을 줘서 정혈단을 제단에서 치우려 했던 목표를 들키지 않기 위함이다.
"나를 믿소?"
"넌 이미 혈독에 중독되었다. 혈신血神의 이름으로 맹세컨대, 네가 정혈단을 제단에서 치워주면 철저하게 해독해 주겠다."
#
"그럼 염씨 가문은 우리 편으로 볼 수 있는 건가?"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중요치 않다. 추향은 독무곡을 공격해 자신의 일상을 깨뜨린 자를 상대하는 데 같은 편인지 아닌지만 궁금했다.
"남화교는 자신들이 가장 순수한 인간이라고 여긴다. 통혼도 기본적으로 원래부터 남화교에 있던 가문끼리만 하고, 외부에서 유입된 가문과는 피가 섞이는 걸 극도로 경계한다.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놈들이 널 동등한 상대로 여길 가능성은 없다."
"믿기 어렵다는 말이네? 인간은 보통 짐승이랑 한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니까."
#
무룡은 불사혈괴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협력하는 척하기로 했다.
다른 건 다 제치더라도 몸에 품은 자하괴독을 상대하려면 꼭 필요한 무기인 정혈단의 소재를 파악하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다.
'저놈들도 내가 다른 꿍꿍이가 있음을 알겠지. 그러나 정혈단은 자기들 빼고 다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 방심하고 있을 거야.'
무룡은 정혈단을 다루는 법을 천환서고에서 봤다. 그리고 강호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현녀문의 환생환이 무엇인지도 안다.
반쯤은 포기하고 있던 정혈단을 얻을 기회가 코앞에 왔고, 현녀문의 소재도 우연히 알아냈다. 둘만 얻으면 자하괴독과 벌이는 싸움에서 큰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그러는 넌 우릴 믿는가?"
"안 믿는다고 해도 무슨 방법이 있겠소?"
"말이 통해서 좋군."
불사혈괴들은 무룡에게 정혈단이 있는 제단의 위치 그리고 정혈단을 제단에서 분리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서둘러라."
무룡은 불사혈괴들이 알려준 방식으로 진법을 걸었다. 덕분에 대청이 아닌 교주의 방과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
'천장에서 태극을 찾은 다음, 양의·삼재·사상·오행·육합·칠성·팔괘·구궁의 풀이로 내려오라고 했지.'
무룡은 경공을 펼쳐 천장에 간 다음 태극을 찾았다. 어렵지 않게 찾은 태극에서 방위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진법이 느껴졌다.
무룡은 구룡유九龍遊의 경공을 펼쳐 허공에 뜬 다음 천천히 양의부터 시작해 진법을 걸었다. 구룡유는 무룡도 열 번 시도에 한 번 성공하기 어려운 경공인데, 응비도를 익힌 덕분에 다른 경공들보다 더 쉽게 느껴졌다.
마지막 구궁을 풀이한 움직임이 끝나자 무룡은 교주의 책상 앞으로 왔다.
'너무 쉬운데?'
출입 방식이 어려워서 교주 본인도 자주 드나들지 않는다고 하더니 아예 경계도 안 설 줄은 몰랐다. 그러나 태극부터 시작해 구궁까지 정확히 풀이하고, 풀이 대로 진법을 걸을 경공을 보유한 자가 천하에 몇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또 마냥 어색한 일은 아니다.
'보자.'
무룡은 교주의 방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는 데 급급해하지 않았다.
그저 도둑이라면 서랍을 들춰 귀한 재물부터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룡은 서신이나 죽간 그리고 양피지 위주로 살폈다.
덕분에 추향이 추리로 얼추 파악한 청동괴와 삼두랑의 비밀을 알았고, 미씨 가문이 독무곡에 혈영살수를 보낸 장본인임을 알았다.
그리고 미씨와 협력한 자가 구왕九王의 하나인 상왕商王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상왕이라는 자에게 또 배후가 있겠지?'
불사혈괴의 입에서 마중구문을 들었으나, 무룡은 그저 혈교의 원수 중 하나로 치부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름이 모든 사건의 배후일 거라는 상상은 시작도 안 했다.
'그럼 지하로 가자.'
무룡은 내공을 빠르게 돌려 근력을 강화한 다음, 일반 탁자와 달리 통나무로 된 길이가 일 장이 넘은 커다란 나무 탁자를 힘껏 밀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탁자는 바닥을 미끄러지면서도 아무 소음도 내지 않았다.
탁자를 어느 정도 밀어 바닥의 구멍이 드러나자 무룡은 바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밑에서 기관을 통해 탁자를 다시 원위치로 보냈다.
'내 은신술이 불사혈괴를 속일 수 있을까?'
일이 술술 풀렸지만, 무룡에겐 큰 걱정이 있었다. 일신의 자유를 위해 정혈단을 제단과 분리하길 원하는 불사혈괴와 정혈단을 삼켜야 하는 무룡은 일단 이해타산이 맞는다.
그러나 목표가 일치하는 것도 정혈단을 제단에서 분리하는 데까지다. 자유를 얻은 불사혈괴는 당연히 정혈단을 되찾으려 할 거고, 무룡은 그걸 곱게 건넬 생각이 전혀 없다.
'진인사대천명. 내 행실이 딱히 나쁘진 않았으니 하늘이 날 궁지로 몰진 않을 거다.'
- 작가의말
세계관이 탄탄해야 개연성과 재미를 골고루 갖춘 이야기가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판타지나 게임 판타지가 상대적으로 몰입감이 좋은 건, 그쪽은 이미 탄탄한 세계관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순수 무협이라면 좀 더 디테일에 신경을 쓸 수 있는데, 선협 요소를 추가한 탓에 아직 세계관이 확고하지 않습니다. 설정 붕괴를 걱정하여 확실한 것만 적으려고 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빨리 흐르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주인공 위주로 우선 진행하고 어느 정도 이야기가 흐른 다음 무협과 선협을 결합한 세계관을 펼치려던 생각이 또 이렇게 좌절했습니다. 글을 쓸 때 늘 어떤 목표를 정하는데, 대부분 실패로 끝났습니다.그래도 실패로 늘 배우는 게 있어 다행입니다. 아무래도 이 글을 완결한 후 당분간은 무협 대신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거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하지 싶습니다.
Comment ' 2